밥 펠러
스스로 기회를 내려놓은 투수
투수가 통산 300승을 올렸다는 것은 전설의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르면 더 나오겠지만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현재까지 단지 24명만이 이런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조만간 입회가 확실시 되는 랜디 존슨과 약물 복용 의혹 때문에 계속 거부되는 로저 클레멘스를 제외하고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그 위상이 설명 될 정도다.
따라서 300승은 현재 에이스 소리를 현역 투수들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달성하기를 원하는 염원이라 할만하다. 최근에는 한 시즌 10승 정도를 올리면 실력이 있는 투수라고 여겨지지만 이 정도로 300승을 이루려면 산술적으로 30년을 뛰어야 한다. 따라서 300승은 단순히 잘해서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라 대단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겨우 이룰 수 있을까 말까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20년 가까이 꾸준히 활약할 수 있는 강철 같은 체력이 필요하고 부상도 없어야 한다. 커트 실링과 존 스몰츠는 부상으로 말미암아 300승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대표적 명투수들이다. 팀 경기다 보니 동료들의 도움도 절대 필요한데 만일 약팀에 속한다면 기록 달성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300승은 실력과 더불어 운도 함께 있어야 달성이 가능한 기록이다.
투수가 통산 300승을 올렸다는 것은 전설의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르면 더 나오겠지만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현재까지 단지 24명만이 이런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조만간 입회가 확실시 되는 랜디 존슨과 약물 복용 의혹 때문에 계속 거부되는 로저 클레멘스를 제외하고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그 위상이 설명 될 정도다.
따라서 300승은 현재 에이스 소리를 현역 투수들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달성하기를 원하는 염원이라 할만하다. 최근에는 한 시즌 10승 정도를 올리면 실력이 있는 투수라고 여겨지지만 이 정도로 300승을 이루려면 산술적으로 30년을 뛰어야 한다. 따라서 300승은 단순히 잘해서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라 대단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 겨우 이룰 수 있을까 말까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20년 가까이 꾸준히 활약할 수 있는 강철 같은 체력이 필요하고 부상도 없어야 한다. 커트 실링과 존 스몰츠는 부상으로 말미암아 300승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대표적 명투수들이다. 팀 경기다 보니 동료들의 도움도 절대 필요한데 만일 약팀에 속한다면 기록 달성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300승은 실력과 더불어 운도 함께 있어야 달성이 가능한 기록이다.
- 가장 최근인 지난 2009년에 300승을 달성한 랜디 존슨. 통산 300승은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는 증거로 쓰인다.
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해군에 입대하였는데, 이는 현역 메이저리거 중 최초였다. 사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서 병역 면제 대상이었지만 앞장서서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자원입대한 그는 중사의 계급장을 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 전함 앨라배마에서 40mm 대공포 사수로 활약하였다. 그가 바로 전설적인 강속구 투수인 밥 펠러(Robert William Andrew Feller, 1918~2010)다.
- 40mm 대공포 사수 당시의 펠러. 그는 4년 동안 태평양과 대서양의 전선을 넘나들며 최 일선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대에는 정확히 구속을 측정하는 도구가 없었지만 시속 100마일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지는 고등학교 선수가 있다는 소문이 프로야구단의 귀에 들어갔을 만큼 펠러는 어려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사실 그는 변화구도 곧잘 던졌지만 ‘Bullet Bob’ 혹은 ‘Rapid Robert’라는 별명처럼 불같은 강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공격적인 투수였다. 때문에 삼진왕도 많이 차지하였지만 4차례나 사사구왕에 오르는 특이한 기록도 남겼다.
엄청난 스카우트 경쟁을 거쳐 193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한 그는 불과 17세였던 바로 그해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8월에 있었던 첫 선발 등판에서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승리투수가 된 펠러는 첫 시즌 동안 불과 8경기에 나섰지만 이듬해 그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지역 라디오로 생중계되고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던 펠러의 역동적인 투구 폼.
그는 종전 이듬해 곧바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4년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1946, 1947년 시즌연속으로 20승 이상을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일조하였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우승한 마지막 기록이다. 그는 통산 266승을 달성하였는데, 만일 전성기에 4년의 공백이 없었다면 충분히 300승 이상은 달성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이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펠러는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구단에 먼저 연봉 삭감을 요구했을 만큼 자신에 대해 엄격했다. 그 정도로 선수로서의 투쟁심이 강했지만 자원하여 전선으로 달려갔을 만큼 국민으로써 지켜야 할 의무를 먼저 챙길 줄 알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가 300승이라는 거대한 고지에 오르지 못하였어도 사람들은 펠러가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300은 그를 논할 때 그저 무의미한 보통의 숫자 일 뿐이다.
- 동료 수병들의 환송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제대하는 펠러. 그는 즉시 팀에 복귀하여 여전히 녹슬지 않은 강속구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