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시군요. 지금 회사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우리 회사에 와서도 금방 나갈 수 있다는 얘긴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제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면접관과 입사 희망자 사이에 긴장이 팽팽했다. 지난 7일 오후 3시, 서울 강남역 인근 커피숍. 진짜 면접이 아니라 면접 스터디 회원 4명이 돌아가면서 면접관 역할을 맡는 '모의 면접'이 한창이었다. 연습인데도 질문은 날카로웠다. "끈기가 부족하다는 말 많이 듣죠?" "현실에 만족을 못하는 성격 아닌가요?"
이날 모인 이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또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이른바 '취업 반수생(半修生)'들이다. 이모(27·서울 서대문구)씨의 경우, 금융권 취업이 꿈이었지만 작년 하반기 은행·증권사·보험사 공채에서 20여 차례 낙방했다. 해외 어학연수와 취업 준비를 위해 휴학을 두 번이나 한 터라 더는 졸업을 미루기도 어려웠다. 그는 '청년 백수'가 되기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입시 동영상을 제작하는 중소기업에 들어갔지만, 지금도 회사 몰래 취업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이씨는 자신의 일상을 '고3 생활'이라고 했다.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금융권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한다. 출근길 전철에서 토익시험에 대비해 영어 단어를 외운다. 점심은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로 때우고, 남는 시간에 재무위험관리사(FRM) 시험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 퇴근 후에는 동네 독서실에서 밤 11시까지 못다 한 공부를 한다. 회식이 있으면 "제삿날이다", "급한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빠진다. 주말에는 영어회화 학원에 갔다가 토익·면접·재무위험관리사 스터디에 참가한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이달 초 4년차 미만 직장인 1017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0명 중 7명(74%)이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 다른 회사에 지원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유는 "다른 업·직종에서 일하려고"(32.9%), "일단 어디든 지원해보려고"(24.4%) 등이었다. 지난해 취업 포털 커리어가 입사 1년 미만 직장인 540명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도, 3명 중 1명(37%)이 "구직을 병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을 '징검다리'로 생각하는 직장인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눈높이'에 맞는 직업 구하기가 어려워진 까닭이다.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작은 무역회사에 다니는 이모(28·서울 성북구)씨는 학생 때부터 살던 30만원짜리 대학가 하숙방에 살고 있다. 저녁 7시쯤 퇴근하면 대학 도서관에 간다. 후배와 함께 쓰는 사물함에서 대기업 직무적성검사 문제집과 토익문제집을 꺼내 자정까지 공부한다.
이씨는 2007년 하반기 대기업 공채에 줄줄이 떨어졌다. 그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 생각에 차마 '청년 백수'가 될 수는 없었다"며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은 했지만 아무 애착이 없고, 하루빨리 남들이 알아주는 번듯한 회사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어요. 군대 내무반에서 눈 뜨는 기분이랄까…. 월급(200만원)도 적고 일도 재미없고 상사가 부르면 한숨부터 나와요. 번듯한데 취직한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괜히 기가 죽어서 '몸이 안 좋다'고 해요."
▲ 14일 서울 신촌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젊은 직장인들이 이직을 위한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문모(27·서울 구로구)씨는 작년 하반기 대기업 공채에서 고배를 마시고 올 2월 부동산 관련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동종업계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15분간 원어민과 전화로 '영어 회화'를 한다. 이어 출근 전까지 1시간 동안 집합투자자산운용사 시험 동영상 강의를 들은 뒤 아침을 거르고 집을 나선다.
그는 "퇴근 후 침대에 엎어져서 '오늘은 쉬자'고 생각하다가도 '이러다 여기서 주저앉는 게 아닐까' 불안해지고 한편으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고 했다.
2년 전 대기업 취업에 실패한 정모(여·25·서울 중구)씨는 서울 모 대학에 월급 120만원의 계약직 교직원으로 취직했다. 정씨는 요즘 출판사·대학교·기업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3~4통씩 계약직 이력서를 쓰고 있다. 지금 다니는 대학에서 오는 10월 2년 계약이 만료되면 재계약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부모님도 계약직이라 두 분 한 달 수입을 합쳐도 150만원 정도밖에 안 돼요. 고1 남동생의 학원비(30만원)도 제가 대고 있어요. 대기업에 가고 싶어 계속 구직활동을 했는데, 이제는 계약직 일자리마저 없어지게 생겼어요. 어디든 또 들어가서 돈 벌어야죠."
중소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취업 반수생들 때문에 애를 먹는다"고 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인사담당자 박모(32)씨는 "이들은 일에 대한 열의도 없고 동료와 어울리지도 않는다"며 "그래도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들이 '그만두겠다'고 하면 '휴가를 줄 테니 다시 생각해보라', '후임자 구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매달린다"고 했다.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김모(27·대전 유성구)씨는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가기 위한 발판쯤으로 생각하는 명문대 출신 취업 반수생들 탓에 나처럼 지방대를 나온 사람들은 중소기업 들어가기도 어려워진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49) 교수는 "이른바 '좋은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어 취업 반수 현상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자기들끼리는 물론, 이미 취업한 선배들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