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상병 시인 이야기 ]
시인 천상병은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시인이라고 했다. 서정주니 하는 시인은 유명한듯 하지만, 자신은 버스안내양도 알아줄 정도라고 했다. 그 사연은 이렇다.
1. 종로5가에서 시인의 집이 있는 의정부까지 운행하는 113번 버스 안내양들은 천상병 시인을 모를 수 없었다. 늘 술에 취해있어 대화가 어렵고 늘 주머니가 비어서 차비가 없고.... 해서 시인을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줘야 하는지를 입사 첫날부터 교육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 정류장에 도착해서 안내양이 시인을 깨울 때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아저씨나 외모에 걸맞는 할아버지 같은 호칭으로는 시인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시인아저씨라고 부르거나 최소한 시인할아버지 정도는 돼야 이 눈을 뜨고 안내양의 부축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하차를 승인하곤 했다.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 오거나 한바퀴 더 돌아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앞에서 시인이 소피보는 걸 기다리느니 정중히 모시는 게 문화대국의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버스회사는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버스안내양도 알아주는 시인 천상병은 버스 안내양들이 잘 모르는 서정주 정도의 시인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키가 작고 몸이 작은 만큼 막걸리가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2.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세금(?)으로 500원 에서 1,000원을 받아냈다. 80년대 이후로는 1,000원~2,000 원이 되었다. 그런데 징수의 기준이 특이했다.
꼭 지인한테만 받았고 지인이 아닌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라 생각하면 1,000원, 어른이 아니라 생각하면 500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준도 나이같은 게 아니라 결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1,000원, 결혼 안했으면 500원씩 받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천상병이 스스로 어지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현금지급기나 마찬가지인 김인 국수가 어느 날 천원을 못 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대한민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인 만큼 오늘부터 천원이 아니고, 이천원으로 올리면 주겠다고 으름짱을 놨다.
천상병이 김인을 한참 노려 보다가 하는 말 왈,
“어이, 김 인이! 까불지 마라! 넌 아직 천원짜리 밖에 안돼 !”
둘은 호쾌하게 까르르 웃었다.
그는 자신이 구차하게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형편을 봐줘서 받아 주는 것이고 그만큼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던것이다. 이렇게 천상병이 걷어간 돈은 대부분 술값으로 쓰였다고 한다.
3. 평소 친하게 지낸 김동길 교수가 매일 술을 마시니까 이왕이면 좋은 술을 마시라고 비싼 조니 워커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는데 다음에 만났더니
"교수님이 주신 그 비싼 양주에는 입도 대보지 못했다.
아내가 비싼 술이니까 팔아서 막걸리나 사서 마시라고 해서 팔아서 막걸리를 마셨다" 라고 천진난만하게 얘기했다.
4.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 답: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 ! "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중퇴 ! 그는 '서양문학사' 정도는 책한권을 다 외웠다. 그는 천재이고 부인이었던 목순옥씨는 천사였다!
하늘나라에서 둘은 행복할까
나이를 먹어가니 "귀천" 같은 시가 좋아진다!
귀 천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삶 **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 원, 이천 원씩 술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다.
"집과 자식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 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그도 한 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제주도 출신 쌍과부가 운영하는 술집 '추자네 집'에서였다. 건달이 천상병에게 시비를 걸자 "꺼져, 이 자식아!"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호기를 부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천상병이 어느 날 이 쌍과부집 아들 비룡이를 보고 수작을 건넸다. 마침 손님 한 명 없이 어린 비룡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장면을 대하자 그는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 가며 세뇌를 시켰다.
"자, 내 말을 따라서 해 봐. 나의 아버지는 천상병이다. 나는 천상병 씨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맛에 홀린 이 아이가 어느 정도 세뇌된 꼴을 뒤늦게 과부가 알고 질겁을 했다. 그 뒤로 아이에게 어떻게 새뇌했는지 다음에 천상병이 들어섰을 땐 비룡이가 그 얼굴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천상병은 X새끼다."
그렇게 X새끼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소망했던 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 가 호된 고문을 받았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길로 그는 종로구 관철동 등 그의 주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이 묘연해지자 주위 친지들은 그가 추운 날 어느 길목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 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전화가 걸려왔다.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려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할 만큼 폐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추운 겨울날 그는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그를 행려병자로 취급, 정신병원에 보냈다.
神은 이 순수한 시인을 살리고 싶었을까. 의사 감종해 박사가 천상병을 알아봤다.
문인들을 좋아해 두루 가깝게 사귀고 자기 문집도 한 권 펴낸 적이 있는 김 박사는 천상병을 보호하여 묵묵히 치료하고 있다가 그의 유고 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을 취했다. 천상병에게 수호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목순옥과 인연은 이 병원에서 깊어졌다.
천상병의 친구인 목순복의 여동생인 목순옥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겨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통조림을 사 들고 응암동 시립 정신병원으로 갔다.
김 박사는 그녀의 오빠 순복 씨가 큰형님으로 불렀던 박종우 선생의 부산고교 제자였고 또 천상병, 목순옥과 친했던 화가 하인두 씨 고교 동창이기도 해서 두 사람은 친히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이때 천상병의 병명은 '신경황폐증',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아 기계가 멈춰 서듯 정신마저 황폐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에게 병문안하러 다니는 횟수가 늘자 천상병은 유난히 목순옥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목, 언제 또 올래? 팥빵을 먹고 싶다."
이렇게 의지하는 그를 내칠 수 없어 마침내 두 사람은 서울 변두리 수락산 기슭에 사글셋방을 하나 얻고 소설가 김동리 주례로 72년 5월 14일 혼례식을 했다. 그때가 43살 노총각, 목순옥은 36살 노처녀였다.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내 덕분에 천 원권 적선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으나 그런 만큼 아내의 두 어깨는 더욱더 무거웠다. 결혼 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병풍 자수를 놓아 번 돈으로 쌀 한 말 연탄 열 장씩을 사서 살았다. 그러다가 친구 언니 지원으로 1977년 청계천 8가에서 친구와 함께 고가구점을 경영했으나 계속되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 3년 동안 쌀 한 되를 살 돈이 없어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으나 그들은 행복했었다.
그런 때 출판사 사장 시인 강태열이 "천 형, 막걸릿값이나 하면서 돈은 천천히 갚아라"고 선뜻 3백만 원을 빌려주며 가게 '귀천'을 추천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 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 병, 담배 한 갑이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붙일 방까지 해결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60 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 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났다.
22년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 이라는데도 질투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녀. 급성 간경화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를 친구가 후원해 주는 춘천의료원에 입원시킨 뒤 춘천에서 서울로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병간호에 매달렸던 그녀는 이제 천상병 기념관을 가꾸고 지키는 걸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또 기일이 되면 버스를 전세 내 의정부 송산 시립묘지까지 가서 추모 행사를 벌이고, 상경해서는 종로 인사동 골목의 '천상병 기념관'에서 해마다 추모 세미나도 한다.
- 웹사이트에서 정리.
■목순옥(1935-2010) : 목순복의 동생으로 자라다가 오빠 친구인 천상병 시인과 혼례식을 하고 22년을 살다가 2010. 8. 26. 남편인 천상병 시인을 만나러 이승을 떠났다.
- 枾園의 舍廊에서
행복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