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經世遺表) 12권 倉廩之儲1(3)
*그 악명 높은 환곡, 환자(還上)가 이렇게 생겼구나. 막연히 느낄 뿐이다. 창고에 곡식은 절반을 남겨놓고 배분해야 한다는 규정 외에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환곡, 사실 언제부터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채, 그냥 싫다는 데 강제로 묵은 곡식을 떠맡기고는 가을에 새 곡식으로 1.5배를 내라고 한다. 그것도 가져가고 가져오는 비용까지 떠안고. 임란 이후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 수단으로 환곡이 필요했다는 피상적인 사실안에, 이 환곡이 제도로서 굳어졌던 내막에, 조선이란 왕조가 유지되고 또 망한 이유가 숨어있지 않을까. 양반과 상민의 계급사회, 집권당의 이데올로기 외에 합리적인 잣대가 되지 못한 유학, 백성을 무한대로 착취해도 이를 막아낼 대체세력이 없었다는 것 등등, 이를 환하게 입체적으로 밝혀줄 이론가나 이론은 왜 안보이지? 있는데 나만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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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충선왕(忠宣王) 때의 상평·의창 제도를 복구하도록 명했다.
신우(辛禑) 4년(1378)에 헌사(憲司)에서 수령에게 그해의 풍·흉을 살피고 호(戶)의 대소(大小)를 요량한 다음 곡식을 차등이 있게 내도록 하여 그 주(州) 곳집에 갈무리했다가 다음해 흉년이 들면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신창(辛昌) 원년(1388)에 성석린(成石璘)이, 주·군에 의창을 설치하기를 청하므로 그 말을 좇았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5부(部)에 의창을 설치하였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호조(戶租)란 호(戶)로써 거두는 것이고, 정조(丁租)란 정(丁)으로써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창의 법은 때에 따라 거두어서 때에 따라 발산해주었다가 곧 또 폐지하였기 때문에 충렬왕 때에 또 창설했다고 말했고, 공민왕 때에 또다시 설치했다고 말했으며, 우왕 때에 또 곡식을 내었다고 말했고, 창왕 때에 또 창을 설치했다고 말했으니, 항구토록 변동이 없이, 이자를 그물질하고 액수를 증가해서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됨이 오늘날 환자(還上) 같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이두 문자(吏讀文字)에, 무릇 위에서 아랫사람에게 주는 것을 차하(上下)라 하는데,[上의 音은 次 또는 玆임] 환자(還上)란 환사(還賜)입니다. 백성에게 거두어서 백성의 급한 형편을 구제하므로 이것을 환사라 이르는 것입니다.
국조(國朝) 처음 제도도 다만 의창이 있을 뿐이고, 대략 고려의 법과 같았다.
〇세종 3년(1421)에 상(上)이 근신(近臣)에게 명하였다.
“근래에 흉년으로 인해서 먹을 것이 모자라는 백성이 혹 있는데, 민간에 대여한 의창 곡식을 너무 심하게 징수한다. 그 중에 상환할 수 없는 자에게 강제로 납부하지 않도록 하라.”
〇6년에, 강원도 의창 곡식은 절반 이상을 백성에게서 징수하지 못하고 회계 문서만 거짓으로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자, 관찰사 황희(黃喜)가 수령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므로, 상이 이르셨다.
“근래에 이 도(道) 백성은 생업을 잃어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 것을 끌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형편인데 어느 여가에 상환하겠는가? 만약 이것으로써 죄를 더한다면 우리 백성들을 거듭 곤란하게 하는 것이니, 논하지 말라.”
〇단종이 즉위하던 해(1452)에 큰 흉년이 들자 조신(朝臣)들을 나누어 보내 창(倉) 곡식을 내어서 진휼하고, 오는 가을에 도로 거두어서 의창에 충당하였다.
〇세조(世祖) 2년(1456)에 하교하였다.
“의창을 설치한 것은 본디 가난한 백성을 진휼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 들으니, 서울에 살고 있는 부강한 자가 남몰래 집사(執事)하는 아전에게 청해, 진대(賑貸)를 많이 얻어서 주육을 먹는 밑천으로 하고, 심한 자는 그것을 이용해서 재산을 저축하여 가난한 자가 끝내 굶주리기에 이른다고 하니 이것은 의창의 본뜻에 어긋난 것이므로 이와 같은 자는 엄중히 단속하라.”
〇3년에 삼도 진휼사(賑恤使) 한명회(韓明澮)가 다음과 같이 말하자 그 말대로 좇았다.
“근래 흉년으로 인해서 대여한 의창 곡식의 반 이상이 미수로 있으니, 매양 봄철을 당해도 백성에게 진대할 수가 없습니다. 민간에 여러 해 동안 대여한 수량이 매우 많은데 그 이식까지 아울러 징수하려면 반드시 상환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적에 상평의 법은 이회(李悝)가 위(魏)나라에서 시행했고 경수창(耿壽昌)은 한(漢)나라에서 시행하여 모두 성과가 있었고 백성이 그 이(利)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상평창 예에 의해서, 곡식이 귀한 봄에 곡식 값을 올려서 베를 사두었다가 곡식이 흔한 가을·겨울에 베값을 줄여서 쌀과 바꾼다면 관에서 그 징수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도 창 곡식은 해마다 증가할 터이니,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좋은 방책이 될 것입니다. 여러 도에 영을 내려서 우선 한두 고을씩 시험하기를 청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선조의 의창 곡식은 본디 관포(官布)로써 매입한 것이고 민호(民戶)에 배정하던 전조(前朝 : 고려조)의 법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또 창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백성을 진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한 톨의 곡식도 일찍이 나라 경비를 보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만력(萬曆) 왜란(倭亂) 이후부터 국고는 텅 비었고 군수(軍需)는 많고도 번잡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오직 상평·진휼 두 창고 이외에도 층층색색으로 더 설치한 것은 모두 호조 및 여러 영문(營門)과 아문(衙門)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창름을 설치한 것은 본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백성에게 거두기 위한 것이 되어서 세운 뜻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유폐의 물결이 널리 퍼져서, 지금은 다 따져 밝힐 수도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의 곡식 문부는 파도가 일 듯, 구름이 치솟듯 하는데 모두 중세(中世)에 일어난 것이어서 아문이 이미 다르니 곡식 명칭도 구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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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道)에 두루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도에만 홀로 있는 것도 그 명칭이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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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省)에는 성곡(省穀)이 있고, 군(郡)에는 군곡(郡穀)이 있다. 폐단을 구(救)한다는 것이 오히려 폐단이 생겨서 만연하여 한절(限節)이 없으니 그 명칭이 실로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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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도(道)·4도(都)의 곡식을 총계하니 쌀과 좁쌀이 거의 1천만 석에 가깝다.
《비국요람》에 “곡총(穀總)의 남고 모자람은 해마다 같지 않으니 한 해로써 표준할 수는 없다. 이제 가경(嘉慶) 정묘년에 마감한 곡총을 기록해서 대개의 숫자를 알아본다.” 하였습니다.
8도와 4도에 쌀과 각 곡식이 999만 5천 599석이다.
경기에 쌀과 각 곡식이 5l만 7천 499석.
화성부에 쌀과 각 곡식이 4만 8천 266석.
광주부에 쌀과 각 곡식이 7만 1천 177석.
개성부에 쌀과 각 곡식이 3만 9천 226석.
강화부에 쌀과 각 곡식이 4만 3천 122석.
공충도에 쌀과 각 곡식이 86만 6천 136석.
경상도에 쌀과 각 곡식이 230만 2천 277석.
전라도에 쌀과 각 곡식이 208만 9천 579석.
황해도에 쌀과 각 곡식이 75만 3천 24석.
강원도에 쌀과 각 곡식이 36만 7천 207석.
함경도에 쌀과 각 곡식이 160만 9천 397석.
평안도에 쌀과 각 곡식이 128만 8천 689석.
삼가 신이 살피건대, 8도 곡총이 대략 1천만 석입니다. 1천만 석은 만약 10두로 1석을 삼는다면 1천 500만 석입니다. 8도 민호(民戶) 대략 150만 호이니(경성 5부는 제외한 것임) 한 호에 꼭 10석이 배정되며, 만약 반을 남기고 반만 분배한다면 매호에 꼭 5석의 곡식을 받게 됩니다(50두). 만약 15두를 1석으로 한다면 호마다 꼭 받아야 할 곡식이 3석 5두이니 이것도 이미 견디어내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다 분배하는 곡식이 반만 분배하는 것보다 많으며, 간색미(看色米)·낙정미(落庭米) 따위의 허비가 모곡(耗穀)보다 많으며, 농간하는 피해가 간색·낙정보다 더한 것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