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절망의 날 참고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푸시킨(Pushkin, 1799~1837) 의 말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그대를 속이는 것은 삶이 아니다.
강가에 매인 빈 배를 생각해 보자.
그대가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와 부딪쳤다고 하자.
그 빈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그가 그대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대도 그를 탓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배가 사람이 타지 않은 빈 배라면
그대는 누구를 탓할 것일까?
문제는 그대다.
그대가 그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빈 배와 빈 배가 충돌하면
비난할 대상도 비난하는 자도 없다.
충돌은 반응에서 일어난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충돌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거기에 내가 없는 것이다.
내가 비어 있으면 탓할 일이 없다.
내가 비어 있으면 삶을 탓할 수도,
탓할 대상도 아니다.
삶의 문제는
그대의 행위가 선(善)한 행동이냐,
악(惡)한 일이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고의(故意)냐 과실(過失)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대가 거기 있고
그대가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비어 있다면
삶은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삶은 그대를 속이지도 않았고 속일 수도 없다.
행(幸), 불행(不幸)은 그대가 느끼는 무지에 따른 것이다.
강을 건너는 배안에 그대가 있다는 것이다.
삶은 담연(澹然)하다. 무엇에도 변명하지 않는다.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대지, 삶이 아니다.
그대가 비우면 행(幸)도,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 자신만을 오로지 선한 자로 여긴다면,
아무리 정당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런 선한 자는 아주 미묘한 이기주의자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