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손자국들이 가득 찍힌 나뭇잎들이 오솔길에 복잡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가끔 화살처럼 내리떨어지는 햇살이 오솔길 위를 달리는 마차의 지붕
과 말 위에 떨어져 그 전체를 빛의 얼룩을 가진 묘한 생명체처럼 보이
게 만들었다. 길을 땅땅 두드리는 말발굽은 경쾌했고 마차바퀴는 이제
여행이 끝나가기는커녕 방금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신나게 구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파킨슨 신부는 행복한 시선을 돌려 데스필드를 바라
보았다.
"데스필드! 이제 곧 펠라론이다."
"마치 신부님 당신이 펠라론 건설해 놓은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쇼."
퉁명스럽게 대꾸한 데스필드는 곧 날아올 주먹에 대비했다. 하지만
신성 펠라론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은 파킨슨 신부를 놀랍도록 변화
시켰다.
"내 말투가 그랬냐? 허허. 너무 즐거워서 그런다. 용서해라."
멍한 시선으로 신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던 데스필드는 이 가공
할 위화감을 참고 견딜 것인지, 아니면 신부를 길길이 날뛰게 만들 말
을 구상해볼 것인지를 놓고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 때 그들 앞쪽에
앉아있던 핸솔 추기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제 다 온 것 같군요. 그럼 우리 내려서 걸어볼까요,
신부님?"
"걸어간다고요?"
"마차 여행의 사소한 안락 대신 순례자의 기쁨을 누려보지 않겠느냐
고 묻는 겁니다. 눈앞으로 기적의 도시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기념할만한 일일 겁니다. 사실 이 도시를 찾는 순례자들에겐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지요. 마차 안에서야 그걸 볼 순 없잖습니까."
"오오, 각하! 맞습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요. 감사합니다!"
파킨슨 신부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지만 데스필드는 심드렁한 표정으
로 마차 안에 앉아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에 의해 마차 밖으로 끌려나와야 했다. 데스필드는 투덜거리고 불
평하고 화를 내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 거룩한 광경은 일광욕이 절
실한 네놈의 영혼에 한 줄기 빛이 되리라'고 주장하여 핸솔 추기경을
웃기고 데스필드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너무 예리하게 말하지 마! 짜식이 가끔 섬뜩하게 예리하단 말이
야. 그리고 나 이 복된 순간을 망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으니 더 이
상 구시렁거리지 마라. 알겠냐?"
"알겠냐로 충분하니 홀스터에서 손 치우시지요."
데스필드는 입을 다물었다. 마차를 먼저 달려가게 한 다음 세 사람은
순례자처럼 단단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펠라론까지의 남은 오솔길을 걷
기 시작했다.
여름은 초록빛 물감이 되어 잎사귀와 나뭇가지에서 흘러 떨어지고 있
었다.
펠라론으로 들어가는 카티막 언덕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킨슨 신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연 신부는 추기경과 패스파인더를
훨씬 앞질러 걸어갔고 핸솔 추기경과 데스필드는 그 미워할 수 없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가 갑자기 멈
춰섰을 때 그들은 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필드가
신부의 등을 향해 외쳤다.
"펠라론입니까?"
신부는 한참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기적의 도시다."
데스필드는 신부의 옆에 섰다.
도시 중의 도시가 그들의 발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펠라론 강의 수면에서는 태양의 박편들이 군무를 춤추며 강물을 황금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그늘빛 해오라기들이 수면 위로 조용히 날개
치고 있었다. 강가에 자리잡고 서 펠라론 강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있
는 웅장한 건물들은 여름 한 가운데서도 서늘한 설광으로 빛나고 있었
다. 열주와 하얀 발코니들. 광장을 수놓은 페퍼민트 블루의 포석들은
그 자체로 성화(聖畵)라 할 만하다. 멀리, 구름보다 더 먼 곳이 아닌
가 생각될 정도로 멀리 북쪽의 자케산 기슭으로는 은빛 펠라론 파인들
의 군림이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너울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신심 깊은 신도들 중에서도 꽤 많은 수의 신도가 오펠 2세가 은혈을
흘린 자리에서 저 펠라론 파인이 자라났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과 다르다. 오펠 2세 자신도 법황으로 즉위하기 전 저 펠라론 파인에
대한 시를 몇 수 남겼고 그 이전의 법황들도 펠라론 파인의 은빛을 신
심 깊은 신도에 비견하는 칙령들을 남겼으니까.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은혈의 법황과 은빛 펠라론 파인은 잘 어울리는 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저명한 예는 아니다.
파킨슨 신부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펠라론의 1700 년 역사를 보는 기
분이었다. 저기 펠라론 강에서 자케산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통해 역류
의 법황 로키는 강물을 거꾸로 끌어올렸다. 대로 중턱에 비껴서 있는
아름다운 교회는 세 개의 종탑을 가진 것으로 보아 마누비스 3세가 건
설한 삼종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언덕
은 혼 족에 의해 살해된 성 페이루스의 유해가 스스로 나타난 페이루
스 언덕일 것이다. 페이루스 언덕 아래 잔디밭에는 초승달 모양의 연
못이 하늘을 담고 있었고 그 주위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푸른 꽃은
절대 제비꽃 같은 것이 아니다. 저것은 펠라론 파인과 더불어 전 대륙
에서 오로지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식물의 하나인 라우스 3세의
푸른 장미다… 문득 파키슨 신부는 자신이 펠라론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그 작은 부분에 오밀조밀 담겨있는 전설들과 기
적의 숫자에 전율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늙은 나무 한 그루조차 기적이다, 17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당신들이 오는군요."
데스필드의 말은 1700년의 역사 속에 머리 끝까지 빠져있던 파킨슨
신부를 가까스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역사 속의 표류자였던 파킨슨
신부는 현재의 공기를 찾아 코를 벌름거린 다음 데스필드를 돌아보았
다.
"뭐라고?"
"어떤 당신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파킨슨 신부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저 앞쪽에는 그들이 먼저 보낸
마차가 굴러가고 있었고 데스필드가 말하던 '당신들'은 그 때 마차와
헤어져 그들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부에게 탑승자들의 소재를 묻
고나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약간 늦게 언덕 정상에
올라선 핸솔 추기경이 데스필드의 말을 받았다.
"아, 자몬 경이군. 법황청의 의전관이자 또다른 기적의 역사의 증인
이지. 약간 뭣한 기적이지만."
추기경의 말끝에는 재미있어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핸솔 추기경을 돌아보았고 추기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몬 경은 좋은 교양과 탁월한 승마술의 소유자이지만, 그보다는 펠
라론 최강의 카드꾼이라는 사실로 더 유명하지요. 벨타온 자작이거
든."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벨타온 자작이라는 이름에서 자기 저택에
서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카드꾼 가문의 전설을 떠올릴 수 있
었다. 신부는 탄식처럼 말했다.
"아아. 로헤이든 성하께서…"
"그렇소. 법황 로헤이든의 유령이 벨타온 가의 가장들에게 훈수한다
는 이야기가 있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벨타온 가에서만 유용한 일
종의 블러핑인 것 같소. 상대의 블러핑을 견제하고 싶을 때 어떤 도박
사는 피식 웃고 어떤 도박사는 무표정을 유지하지요. 하지만 자몬 경
은 허공을 흘끔 쳐다보곤, 뭔가를 듣는 시늉을 하고나서, 상대를 향해
꺼림칙한 웃지요."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효과가 있습니까?"
"그의 말을 보면 알 거요. 저 윈디어는 백만 데리우스에도 팔지 않는
다는 전설이 따라다녔지만 자몬 경은 카드 두 장으로 저 명마를 차지
했지."
그들이 기적의 도시 펠라론의 약간은 덜 성스러운 기적에 대한 잡담
을 나누고 있는 동안 법황청 의전관과 그의 부하들이 가까이 다가왔
다. 파킨슨 신부는 그러려니 했지만 데스필드는 자몬 경의 말을 보고
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전관은 말에서 뛰어내린 다음 핸솔 추
기경을 향해 목례했다.
"주님을 찬양할진저.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각하."
"주님을 찬양할진저. 반갑구료, 자몬 경. 이곳까지 나와서 반겨주다
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하께선 각하가 겪어야 했던 고초들에 대해 진
심으로 우려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파덴트로 모시러 가지 못한
점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 사트로니아인은 각하께서 이미 파덴트
시를 떠났다는 전갈을 보내어와서 저희들을 꽤 곤란하게 만들었습니
다."
데스필드는 이 대화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핸솔 추
기경이 '작은 법황'이라는 소문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진 소문이었
던 모양이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동행의 높은 신분에 대해 익숙해질
즈음 자몬 경이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테리얼레이드의 파킨슨 신부님이십니까?"
"주님을 찬양할진저. 그렇습니다."
"주님을 찬양할진저. 법황청의 의전 업무를 맡고 있는 자몬 벨타온이
라고 합니다. 법황청을 대신하여 기적의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물론 공식적인 환영은 신부님께서 체재하실 법황청에서
있을 것입니다만."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로서는 의외였지만 별로 감격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듯한 냉정함으로 대답했다.
"한낱 시골 신부를 이토록 환영해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추기경 각하와 동행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저 기적의 성도를 찾아온
순례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나 여기 있는 이 자에게는 성려를 베풀
어주시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저희들은 주제넘게 법황청에서 체재할
생각은 없으며 저 도시에서는 순례자로서 숙식을 해결할 것입니다."
대답하는 신부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기적의 도시를 바라보았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자몬 경은 빈틈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펠라론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법
황청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게다가 성하께선 적지않은 기대감으로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곤란하게 하시지 마
시고 법황청까지 두 분을 안내하는 영광을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면서, 데스필드는 이 대화의 내면에 숨겨진 의미
를 해석해 보았다. 법황이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신부를 기다린 것
은 결국 율리아나 공주 암살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점잖
기 짝이 없는 자몬 경의 초청은 결국 구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가 엉뚱한 말을 흘리기 전에 법황청에서 단속하고 나서겠
다는. 데스필드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스완 대거와 신부의 허리에
있는 핸드건을 번갈아 떠올렸지만 폭력의 증후를 느끼지는 못했다. 법
황청이 어떤 우려를 하건 간에 파킨슨 신부는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
할 목적을 가지고 펠라론을 찾은 것이므로.
데스필드의 예상대로 파킨슨 신부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군요."
데스필드는 마음 속으로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파킨슨 신부는 이
런 경우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
리고 파킨슨 신부가 법황청의 암살 기도라는 특급 스캔들을 이용하여
법황이 신음을 흘릴 정도의 거금을 울궈낼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분명 존경받을만한 태도겠지만, 동시에 그를 단속하기 위
해 허둥대는 이들의 면전을 가볍게 후려치는 태도이기도 했다.
킬리 선장은 말고삐를 내려놓고는 성을 돌아보았다.
"저 성은 점점 더 제방이 되어가는 것 같아, 벨로린."
"피탄각도 때문이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저렇게 비스듬하게 만들어놨다간 보병들이
뛰어오르겠는데."
킬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돌탄 선장의 지휘하에 건설되고 있는
다림 외성은 포격에 대비하여 60도 정도의 각도를 이루며 제방처럼 만
들어지고 있었다. 성벽 안쪽도 비슷한 각도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벽의 두께는 가장 두꺼운 곳의 경우 5, 60 피트나 된다. 강철의 레
이디가 아니고서야 포격으로 저 성을 파괴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만한 각도는 보병들로 하여금 그 위로 뛰어오
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포격과 화살을 피해 저 넓은 초원을 죽 가
로지른 다음 60도나 되는 성벽을 단숨에 뛰어올라가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걸."
"하긴 그렇겠지. 내가 투덜거리는 건 사실-"
"성이 너무 못생겼다는 것 때문이지."
"흐음. 내가 말할 걸 다 알겠지만, 일일이 말을 가로챌 필요는 없잖
아? 왜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들려줘야 하니까."
킬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벨로린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훠이, 훠
이." 파리 쫓아버리는 손동작이었지만 벨로린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시원하다. 부채질 좀 더 해봐."
킬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탄 말은 다림 교외로 향하는 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하
지만 두 사람 모두 긴 여행에 대비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어떤 사람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킬리가 세
마리의 기수 없는 말을 이끌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두 사람은 마치 산
책이라도 하고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킬리는 벨로린이 말을 탈 줄 안
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놀랐지만 벨로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망아지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뭐든 다 안다는 건 뭐든 할 줄 안다는 거야?"
"그렇진 않아. 예를 들어, 난 너를 유혹해서 네 아기를 가질 수는 없
지."
"그 이야기 좀 그만해. 요 꼬마야."
"바보구나. 그렇게 당황해하면 계속하는 법이야. 재미있거든."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너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다는 거 몰라?"
"어쨌든 난 뭐든 다 할 수야 없지.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시도할 때
퍽 유리한 건 사실이야. 왜 그런지는 알겠지?"
"음. 필요한 정보는 전부 다 아니까."
"그러니, 최소한 말을 어떻게 멈춰세우는가 정도는 알고 있는 거지."
벨로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망아지를 멈춰세웠다. 킬리는 역시
말을 정지시킨 다음 자신이 끌고오던 말들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주
위를 둘러본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가도와 그 주위를 둘러싼
숲 뿐이었다.
"여기야?"
"응. 저기 있어. 이리 나오라고 해."
벨로린은 눈으로 한쪽 숲을 가리켜보였다. 킬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
인 다음 관목과 나무들을 향해 말했다.
"안심하시고 이리 나오십시오."
벨로린의 모습은, 그녀의 공포를 모르는 사람에겐 어쨌든 분위기를
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수풀 속
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안심한 채 걸어나왔다. 그리고 이번엔 거꾸로
킬리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장한 채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수풀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중 한 명이 킬리를 쳐다보았다. 오랜
여행, 그것도 몹시 괴로운 여행을 마친 자의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있
는 기사였다. 몸 곳곳에 생긴 상처에는 망토를 찢어 만든 붕대가 감겨
있었고 다리는 약간 절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침착하고 빈틈없는
얼굴로 킬리를 올려다보았다.
"숨어있는다고 숨어있었는데, 그래도 알아차린 모양이군. 게다가 그
태도를 보니 우리가 누군지도 아시는 모양이오?"
"예. 그래서 이렇게 마중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짐작하기로, 아
마도 록소나의 자랑인 서 하빈저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서 하빈저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라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록소나의 자랑이니 하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쨌든 나는 하
빈저가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킬리 스타드입니다. 폴라리스를 대신하여 여러분들을 맞이하러 나왔
습니다. 원로에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킬리 스타드? 그랜드머더호의 킬리 선장이시오?"
"그렇습니다."
킬리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하빈저는
엉겁결에 그 손을 받아쥐면서도 당황을 가누지 못했다. 킬리는 친밀감
을 담아 하빈저의 손을 흔든 다음 말했다.
"정식 환영단을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긴장하고 계실 여러분들
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두 사람만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니… 그럼 당신네들은 비자 록소나의 낙성과 우리들의 도주를 모
두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거요? 우리들은 전속력
으로 도망쳐왔고 우리들보다 소식이 앞서기는 어려웠을 텐데."
"수다스러운 바람은 다른 바람보다 더 빠르다던가요. 하하. 거기에
대해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을 겁니다. 빌레스 전하께선 어
디 계십니까?"
하빈저는 짧은 갈등을 느꼈다. 하지만 킬리의 말마따나 두 사람만이
찾아온 것은 굉장히 부드러운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서
하빈저는 몸을 돌려 한 노기사를 쳐다보았다.
마왕 빌레스는 도피행 중인지라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킬리는 벨로린을 흘끔 쳐다보았고 그녀
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킬
리 선장은 빌레스의 앞쪽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록소나 국왕 빌레스 커리돈 전하 만세. 저는 킬리 스타드라고 합니
다. 폴라리스를 대신하여 전하를 영접하게 된 점, 무한한 영광으로 생
각합니다. 아울러 근자에 당하신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심심한 위로
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마왕은 그만 감동해버렸다. 그 스스로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면 말
구유에 몸을 던지는 성격인 빌레스 국왕은 화려한 환영단보다 이런 진
솔한 영접에 더 감동했다. - 어차피 도망자 신세의 군주에게 많은 구
경꾼은 그 숫자만큼의 수치이기도 했지만. - 마왕은 킬리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세운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럼 폴라리스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군?"
"물론입니다, 전하."
"휘리 노이에스의 적이 될 텐데?"
"아직 모르시겠지만, 저희들은 이미 다벨군을 맞이했고 그들에게 남
해의 기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니, 나는 이미 들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왕 빌레스가 폴라리스를 찾은 것은, 폴라리스가 사트로니아의 동맹
국이라는 점 이외에도 그 소문, 즉 신생국 폴라리스가 다벨 8군단을
맞이하여 2분만에 그들을 패퇴시켰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왕은 이곳으로 도주할 것을 결심할 수 있었다. 킬리
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 말에 오르시겠습니까?"
마왕은 폴라리스 영내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감동했다.
록소나 대사관에는 폴라리스 평의회가 주관하는 환영 파티가 준비되
어 있었다. 폴라리스는 이런 경우 흔히 취하기 쉬운 애매모호한 태도
를 전혀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다벨
이 화를 내건 말건 우리는 록소나 국왕을 진심으로 환영함'을 매우 분
명한 태도로 보여주었다. 마치 다벨을 향해 볼 테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자신감 있는 태도는 휘리 노이에스에 대한 적의로서 그 공통
점을 찾을 수 있는 파티 손님들, 그러니까 록소나, 팔라레온, 다케온
의 피난민들에게서 열렬한 호평을 받았다. 위험한 도피가 끝나서 긴장
이 풀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 동정을 나누게 된
마왕은 결국 대취하게 되었다. 한 때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던 다케온
의 피난민들조차 공동의 적인 휘리 노이에스 앞에서 마왕과 악수할 정
도였다. 결국 마왕과 피난민들은 서 브라도의 복수를 위해 제국이 움
직일 거라는 둥, 그렇게 된다면 옛 다벨의 영토는 팔라레온과 록소나,
그리고 다케온이 공동분할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만취하여 잠들게 되었다.
하지만 서 하빈저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 한밤중에 하리야 선장을 만
나게 되었다.
"먼저, 이렇듯 환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리야 의장님. 전
하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희들로서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밤중에 서 하빈저의 방문을 받게 된 하리야는 책상 위의 램프에 불
을 붙이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찾아오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요."
서 하빈저는 두 눈을 비비며 웃음지었다.
"사실 침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관이라도 그 속에 들어
가 사흘쯤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비자 록소나의 낙성은
끔찍했습니다. 저로서는 중과부족이었지요."
서 하빈저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
사 중 그 동생이 폴라리스에서 벼락을 맞고 있을 때 그 형은 비자 록
소나에 벼락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서 소팔라와 서 켈커는 이미 몇 번
이나 전투를 거듭한 덕분에 거의 이름밖에 남지 않은 록소나군을 풀잎
베듯 밀어버리고 비자 록소나를 포격했다. 서 하빈저는 직접 검을 들
어 포위망을 뚫고는 간신히 마왕을 빼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기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놀랍도록 중첩된 행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건 경의 기량입니다. 이렇게 주군을 구출해내신 것만으로
도 대단한 일입니다. 볼지악 요새전에서 경이 록소나 중장기병들을 구
해낸 이야기는 바스톨 장군님께 잘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군
까지 구출해내셨습니다. 빌레스 전하께선 경이 대단히 자랑스러울 듯
합니다."
"말씀하시는 것 들으니 더욱 서글퍼집니다. 어쩐지 저는 패전처리 전
문인 것 같군요. 다케온, 알레미지우스 회전, 볼지악 요새전, 그리고
비자 록소나 낙성…"
서 하빈저는 올 봄 이후로 자신이 참여했던 전쟁들을 주욱 열거했다.
하리야는 이 젊은 기사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전쟁에 참
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다. 게다가 그 중엔 가벼운 전투 같
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하리야는 그 많은 전쟁들에서 전부 도망치는
쪽에 있어야 했던 젊은 기사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빈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리야를 쳐다
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이기는 편에 서고 싶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렇게 보이진 않겠지만 저도 록소나 기사입니다. 록소나 기사에 대
한 험담을 많이 들으셨을 테지요? 오만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잔인한.
예. 제 속에도 그가 있습니다. 저 역시 성 엑시아의 채찍 아래 온몸의
혈관이 터질 때까지 달리고 싶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떠는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욕설과 비웃음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제 몸에 뿌려진 상
대방의 피 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죽은 서 브라도나 바탈리언 남작, 혹은 록소나 대사관에서 만취하여
있는 빌레스 국왕이 지금의 서 하빈저를 보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아
니, 서 브라도라면 하늘에서 웃으며 박수를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침착함을 높이 사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과 빌레스 국왕은 당혹을 감추
지 못할 것이다. 하리야 역시 이 온화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이가 조용
히 꺼내놓은 속마음에 잠깐 동안은 당황했다.
하지만 서 하빈저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실례될지도 모를 질문입니다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리야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록소나 기사답게, 오만하게 질문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저는 이기는 편에 선 것입니까? 당신
들이 휘리 노이에스라는 저 불세출의 정복 기술자 앞에서 이렇듯 당당
한 것은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서입니까, 당당한 표정을 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먼저 질문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만일
후자라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전하를 모시고 배를 탈 생각입니다. 현재로서는 사트로니아를 생각
하고 있습니다만 여의치 못할 경우 페리나스 해협 또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리야는 다시 당황했다.
"발도 로네스 경을 육지로 끌어들이신다고요?"
"제 결심은 이미 충분히 말씀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알겠-습니다. 예.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마
십시오. 법황 성하께서도 그들이 육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벨에 성무금지 처분 이외에 다른 것은 내리지 않고 계심을 알
고 있을 텐데요."
서 하빈저는 투명한 표정으로 하리야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저는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악마라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그
리고 고백하자면 저는 지금 어떤 요구조건에도 납득해 줄 수 있는 기
분입니다."
하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주전자의 물이 끓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하리야는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기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자를 다루기는 쉽지만 침착하게 분노한 자를 다루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 때 서 하빈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씀하십시오."
"예?"
"저를 어떻게 다룰지 생각하고 계실 테지요. 사실을 말씀해주시면 됩
니다."
하리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좋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지요. 우리에겐 당장은 다벨을 어떻게 할
힘이 없습니다."
"저는 시간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 나이입니다. '당장'이라는 것은
필요없습니다. '확실히'가 필요합니다."
젊은이는 침착하질 못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늙은이는 시간이 없어서
침착함을 잃는다. 그래서 젊은이가 침착함을 가졌을 경우 이토록 등골
서늘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리야는 찻잔에 차를 부으며 말했
다.
"어떻게 미래의 일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카드점보다 나은 전망이면 제겐 충분히 확실한 겁니다."
"그렇다면 확실합니다."
"…먼저 제가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듣고 싶군요."
"폴라리스는 신생국입니다. 자기보전이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일 것이
며 영토확장 같은 것을 감행할만한 내적 충실함을 쌓을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반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이낙스 이후 제국이 처음
만나게 된 정복 기술자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최악의 상대라고
하겠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이 상황의 어떤 국면에서 자신감을 느끼시
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가 진정한 정복 기술자라는 데서 자신감을 느낍니다."
서 하빈저는 차분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하리야의 설명을 강요
했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하리야는 손가락을 가볍게 꺾으며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폴라리스는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이런
폴라리스를 치는 것은 시간 낭비고 자원 낭비입니다. 당분간 그는 폴
라리스를 내버려둔 채 정복지 재편에 신경쓸 것입니다." 하리야는 이
전망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벨로린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적 충실함을 쌓을 시간을 가지게 될 겁니다."
"말씀하신 것은 옳다고 여겨집니다만 그 시간은 휘리 노이에스에게도
똑같이 유리하게 작용할 텐데요. 폴라리스가 힘을 기르는 동안 다벨은
더 많은 힘을 기를 겁니다. 더군다나 그가 재편하고 있는 그 땅은 아
달탄 대왕께서도 지적하신 '왕자의 땅'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식량과
군마와 강철과 자금을 거침없이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더 많은 적을 끌어들일 겁니다. 따라서 그는 더 많
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그 힘을 쓰지 못
할 겁니다. 휘리 노이에스는 그 힘을 페인 제국이나 사트로니아, 혹은
부활한 중부동맹에 사용해야 할 테니까요."
"중부동맹?"
"비밀입니다만 이젠 말씀드려도 될 것 같군요. 바이스라, 레모, 라트
랑의 3국은 비밀협정을 맺었습니다. 록소나가 다케온을 침략했을 때
록소나의 배후에서 압력을 구사하기 위해서였지요."
서 하빈저는 놀란 눈으로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하리야는 고개를 끄
덕였다.
"결국 마왕께서 회군을 결정하셨기에 그 협정은 제대로 가동되기도
전에 시들해져버렸고 더구나 레모의… 그, 아십니까? 예. 라트랑 내
쿠데타 획책 때문에 현재는 완전히 파기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라트랑
후작 에름 라트랑이 라트랑으로 복귀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그
3국 동맹의 부활을 부탁할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직접 하지는 않
을 겁니다. 사트로니아에 그 3국 동맹의 정보를 알려주고 요청해볼 생
각입니다. 그들의 협정을 다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벨의 동
쪽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북쪽은 페인 제국에 맡기면
되겠지요. 우리들은 농담 삼아 이것을 반-" 반왕사냥이라고 할 뻔했던
하리야는 가까스로 말을 바꿨다. "덫사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놀랍군요. 하지만 그 3국이 충분한 힘을 낼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케온이나 팔라레온, 록소나는 각개격
파당한 겁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국과 다케온은 이이제이의 수법으
로 이간질당했기에 8군단 앞에 쓰러진 거지요. 특별히 빌레스 전하나
귀국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하지는 않을 테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바이스라, 레모, 라트랑의 3국
은 상당한 저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입니다."
차분히 듣고 있던 서 하빈저는 그만 얼빠진 얼굴로 하리야를 바라보
았다. 하리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들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아실 듯한데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던, 게다가 실행되기도 전에 깨진 3국 협정에 대해 알고 있다
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오늘 오전 킬리 선장이 여
러분들을 맞이하러 나갔던 일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서 하빈저는 그제서야 놀라움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비밀협정이 얼마나 비밀스러운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
런데 하리야 의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
늘 오전 킬리 선장은 그들이 어디쯤 왔는지 뻔히 안다는 듯이 마중하
러 나왔었다. 국왕의 도피행이었기에 서 하빈저가 비밀 유지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런데 폴라리스는
파티준비까지 마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트로니아의 정보력입니까?"
"아니오. 우리들의 독자적인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필요한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알려드릴 수야 없지
만 우리는 지금 휘리 노이에스가 어떤 형태의 재편 작업을 하고 있는
지, 그 총책임자가 누구며 기한은 얼마로 잡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
다. 심지어 우리는 법황 성하께서 다벨에 대해 준비하고 계신 대응책
이 뭔지도 알고 있습니다."
"예? 법황 성하께서 무슨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카드점보다는 확실하다고 말씀드렸던 것입
니다."
하리야는 자신이 상대방의 오해를 일으켰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이니까. 물론 그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벨로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서 하빈저는 폴라리스가 신성 펠라
론과도 모종의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그래서 이 자는 필마온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일에 그토록 난색을 표했
던 것인가.' 서 하빈저는 자신이 이끌어낸 결론에 감탄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결론 속에서 이 신생국은 소제국 사트로니아에 이어 신
성 펠라론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 하빈저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여전히 투명했다.
"카드점보다는 확실하군요."
"그럼 한번 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궁금하신 것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궁금해졌습니다. 왜 폴라리스를 선택하셨습
니까? 페인 제국이 더 확실한 선택이었을 텐데요. 그렇게 확신이 없으
셨다면 왜 페인 제국이 아닌 폴라리스로의 도주를 선택하신 건지요?"
"제 질문이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페인 제국으
로 전하를 도피시켰다면 확실히 안전했겠지요. 하지만 그랬다간 록소
나를 되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졌을 겁니다. 제국은 레프토리아 회
전 이후 제후국들간의 분쟁에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원칙
으로 삼아왔습니다. 제국을 움직이게 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확실한 안전보다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당
장 그들과 적대하고 있는 나라를 선택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제가 조금
전 사트로니아나 필마온 기사단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습니
다."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이고, 게다가 마왕다우신 결정이군요."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무슨 이유지요?"
"전하께서는 키 드레이번을 만나셨습니다."
이번엔 하리야가 놀랄 차례였다. 그리고 서 하빈저와는 달리 하리야
는 자신의 충격을 그대로 표현했다.
"어, 어디서 말입니까? 혹시 마왕께서 키 드레이번을 체포했다는 말
입니까? 아니, 키 선장님은 분명히 에름 후작과 레갈루스에-"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전하께서 키 드레이번에게 체포되셨었지
요."
"예?"
서 하빈저는 조용조용한 말투로 다케온 공격 당시 마왕과 키 드레이
번의 조우에 대해 설명했다. 하리야는 대단한 집중력 - 약간 도가 지
나쳐서 말하고 있는 서 하빈저를 거북하게 할 만큼의 - 을 보이며 하
빈저의 말을 청취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하리야는 탄성을 질렀다.
"아아. 그리고 회군하신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만방의 찬사를 받았던 그 회군은 사실 키 드레이번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비자 록소나 탈출 이후 이렇게 말
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 남자의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 자는 내게서 다케온을 빼
앗아갔으니, 그 부하들은 내게 록소나를 돌려줘야 할 것이다."
말을 끝낸 하빈저는 하리야의 얼굴을 보며 약간 당혹했다. 하리야는
싱긋 웃으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웃음 속엔 진한 그리움이 담
겨 있었다. 하리야는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잘못 아신 겁니다."
"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확신합니다. 키 선장님은 빌레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돌려줬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스 전하가 그 때 가장 원
하고 있었던 것은 록소나로 회군할 수 있는 빌미였을 테지요. 나는 압
니다."
서 하빈저는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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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또 이상한 챕터 제목이군요.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7. Wedding march…2
"펠라론 게이트에 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라오코네스가 나타났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신부님께서는 왜 펠라론 게이트에-"
"정말 라오코네스였습니까? 그러니까, 드래곤 라오코네스?"
"…예. 그는 자신이 라오코네스라고 주장했고 저나 다른 목격자들은
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종탑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미노만의 그 라오코네스 말씀이죠? 800년 전의?"
플로라는 질문을 중단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름다운 피조
물의 허탈해하는 모습은 상대방이 꼭 열정적인 기사가 아니더라도 많
은 동정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지만, 아쉽게도 파킨슨 신부와 데스
필드는 그런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혼란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종의 취조실로 사용되고 있는 듯했지만 어쨌든 법황청의 훌륭한 방
안에서, 일종의 취조관으로 나선 듯하지만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신
비로운 피조물의 말을 들으며 파킨슨 신부는 격심한 당황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결국 파킨슨 신부는 대드래곤이 한 일을 이웃집의 주책
바가지 노인이 한 일처럼 표현하고 말았다.
"라오코네스가 왜 그랬을까."
그리고 데스필드는 그만 신부의 화법에 휘말려버렸다.
"뭐 돈 떼먹은 거라도 있으쇼?"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평소에 좀 화목하게 지내지 그러셨수."
"…우리 그만하는 게 좋겠지? 이 분이 우릴 미치광이 쳐다보듯 하시
니. 죄송합니다. 어, 레이디 플로라."
플로라는 살폿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건 여느 때의 아침과 점심 사이에 일어나는 일
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점심과 저녁 사이에 일어나곤 하는 일도 아
니니까요."
"일상적인 일은 아니죠. 예. 흐음. 라오코네스가 생존해 있었군요.
그런데- 왜 라오코네스는 누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
겠다는 거지? 아니, 잠깐. 그에겐 그럴 권한이 없어. 이유가 어쨌건
그 드래곤에게는 교회나 그 신도의 일에 간섭할 권한이 없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파킨슨 신부는 결국 노기 어린 외침을 토하며
동쪽을 쏘아보았다. 데스필드는 그에게 '미노만을 노려보고 싶은 거라
면 남서쪽은 저쪽이오.' 라고 가르쳐주고는 플로라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당신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려 한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소?"
플로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들어가다니오?"
"아니, 파킨슨 신부님 당신 말이오."
플로라는 눈 앞에 앉아 있는 패스파인더의 이상한 어법에 고개를 갸
웃거리다가 말했다.
"핸솔 추기경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성하께 보고드리던 도
중 신부님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언급되었고,
그래서 성하께선 신부님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이유를 아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럼- 아무래도 라오코네스 당신의 말은 당신을 겨냥한 말이겠군."
플로라는 다시 혼란을 일으켰지만 가까스로 데스필드의 말을 이해했
다.
"예. 신부님을 지적한 말일 가능성이 높지요. 솔직히 법황 성하께서
는 추기경 각하의 보고를 듣고 매우 놀라셨습니다. 라오코네스가 그런
말을 하자마자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분이 나타났으니."
데스필드는 그 말에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
는 그가 가르쳐준 방향, 즉 북쪽을 노려보며 으르릉거리고 있을 뿐 플
로라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백하지만 당신이 노려보고 있는 건 북쪽이오. 그만 씩씩거리고 대
화에 참여하쇼."
"…이 악마의 결과물 같은 놈. 재미있냐? 잠깐! 재미있다고 말할 거
지? 알았으니 관둬. 뭐라고 하셨습니까, 플로라 양?"
플로라는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순순히 다섯 번째로 질
문했다.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괜찮으시
다면, 분명 신부님을 지적한 것이 분명한 라오코네스의 말이 무슨 의
미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두번째 질문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놈이 나를 지적한 것
일까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코네스는 '아무도' 들여보
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
은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신부님을 겨냥한 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
는군요."
파킨슨 신부는 이번에는 정확히 남서쪽을 노려보며 짧게 으르릉거렸
다. 퍽이나 흉칙한 언사가 동원되었지만 모두 테리얼레이드 속어인지
라 다행히 플로라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싱긋 웃었
다. 잠시 후 조금 진정하게 된 신부는 무례를 사과하며 말했다.
"그럼 첫번째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요. 나를 이끄는 것이 나인지 주
님인지 알기 위해서요."
"물론 세례를 받은 적도 없는 저 같은 존재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이 엄청난 실례가 될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신부님을 이끄
는 것은 당연히 신부님 자신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강제로 이끌지
않고 스스로 오길 한없이 기다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플로라의 나직한 대답에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내 표현이 좀 이상했나 보군. 이렇게 말하겠소. 내가 자
기 기만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진리의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요."
"펠라론 게이트가 답을 주는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아니라는 말도 없잖소?"
플로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시겠지만 펠라론 게이트에 관련된 속된 농담이 있기는 합니다. 그
리고 그 농담은 펠라론 게이트에 대한 설명들 중 유일하게 반론을 당
하지 않는 설명이지요. 사실이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그냥 저질스러운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펠라론 게이트에 대한 정설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정의를 내려보려는 시도는 항상 먼젓번의 시도보다 더 많은 반론을
이끌어내었을 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
습니까?"
"성 나자리의 이론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라면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펠라론 게이트
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따라서 그 '문'은 펠라론으로 통한다."
"눈 감고 돌을 던지면 열에 아홉 번은 신학자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
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대드래곤 라오
코네스와 거의 마찬가지로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
다. 이건 그냥 주워들은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론이 근본주의자
들에게 상당한 지탄을 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나는 성 나자리의 이론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
다. 주님이 천국으로의 문을 따로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 세계 전체를
인간에게 창조하신 그 뜻과 상치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내가 묻고자
하는 것도 그것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잠깐 주저했지만 곧 마음 속에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나는 속에 성기 몇 구가 차려진 벽돌 건물이 사람을 구원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 속의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묻고 싶
습니다. 그 대답을 알게 된다면 나는 펠라론 게이트만이 천국으로 통
하는 문인지 모든 사람들이 이미 천국으로 통하는 문인지 알 수 있겠
지요."
그녀 스스로 신앙인이 아님을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라는
이 대담한 - 신부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욱 대담한 말에 얼굴을 약간
굳혔다.
플로라가 파킨슨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작, 법황청의 다른
장소에서는 부활의 법황이 오래간만에 만나는 추기경과 더불어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수주의자군?"
"예. 그래서 그에게 핸드건을 주는 것에도 별 무리가 없었던 거지요.
그는 그것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잘 쓰고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
도에서는 그냥 재미있는 장난감을 대하는 정도입니다. 그 강력한 무기
를 무기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는 율리아나 공주의 일을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무기는 투쟁하는 자의 선택이고 투쟁하는 자의 9할은 겁쟁이지. 용
감한 자로군, 그 신부." 퓨아리스 4세는 이렇게 파킨슨 신부를 우대하
고는 곧 그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그리고 난 용감한 자들이 싫어.
다벨의 그 미친 녀석도 그렇고."
"휘리 노이에스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어떻던가, 핸솔 추기경? 다림에서부
터 이곳까지라면 대륙을 거의 가로지른 정도의 여정이었잖아. 그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만 별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드리
고 싶은 말은, 여행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드러나지
않은 것의 드러난 흔적도 찾고자 한다면 패스파인더를 고용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패스파인더는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데려
다주지만, 그 때문에 패스 바깥에 있는 것과는 제대로 접촉도 할 수
없더군요. 어쨌든 유력자들과 만나볼 기회는 전혀 없었습니다."
"흐음. 나도 장소가 아닌 패스 위에서만 사는 패스파인더에 대해서는
좀 들어봤네.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좋아. 피곤할 테니 가서 쉬
게."
"저, 그런데 파킨슨 신부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말씀드렸듯이 그는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만."
"곤란한 질문이야. 사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대드래곤은
아무런 협박도 하지 않았어. 이러이러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이 없
다는 거지. 그리고 그것은, 내 판단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아예 처음부터 '그렇지 않
으면'이 없다는 거지."
"아예 없다고요?"
"그래. 나는 그가 사용한 권고라는 단어가 매우 마음에 걸려. 보통의
인간 외교관 나부랭이가 그런 말을 사용할 때면 어렵지 않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 하지만 라오코네스는,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에
게 인식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구하고 있네. 참 어렵군."
핸솔 추기경은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그는 파킨슨 신부를 그 안에
들어가게 해주고 싶었다. 그 자신이라면 그런 생각은 떠올릴 수도 없
었을 테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추기경은 더욱 그의 의도를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부채감일 수도 있고 의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감정이었다. 10
년 동안 오지에서 고생해온 신부에 대해 고위성직자가 가지는 동정심
이라면 가장 단순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학자였
고, 그 자신을 관찰대상으로 삼는 일에도 익숙했다. 그래서 핸솔 추기
경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짚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그
다지 고상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진실인 소망이다. 주여. 저는 파킨슨
신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추기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만, 성하께선 신도가 그곳으로 들어가길 원할
때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법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지들 중 누가 그러겠다면 당연히 말릴 테고. 이것은 대드
래곤의 말이네. 이 말도 퍽 마음에 걸리는군… 일단 플로라의 말을 듣
고 나서 결정하겠네. 플로라가 그를 만나고 있지. 그리고 그래도 판단
이 서지 않는다면 그를 직접 상대해봐야 할 테고. 젠장. 난 그런 작자
들이 준비해오게 마련인 선물들이 싫은데."
핸솔 추기경은 빙긋 웃었다. 그가 누구라도 신앙의 주인이자 신의 사
도인 법황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신학적 수수께끼
들을 한 보따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법황이 그것을 싫어
하는 까닭은 그 질문들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눌러보겠다는 불
손한 의도로 준비된 것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
만 추기경이 알기로 파킨슨 신부에겐 그런 의도가 없다.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가 질문할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
건 성하를 핏빛 토론장으로 끌어들여 난도질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준비한 질문일 겁니다."
퓨아리스 4세는 신음을 흘렸다. "그건 더 무서운데."
누워있던 세실리아는 시트를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인데도
불구하고 단숨에 승강구 계단을 뛰어오른 세실은 입구의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어둠이 가득 깔린 뒷갑판을 향해 상체를 내밀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잠이 안 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라구. 도대체 어떻게 해가 두
번 뜨냐!?"
세실의 고함소리는 고요한 밤바다 위에서 꽤나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잠시 후 어둠 저편으로부터 한숨소리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리아."
"응? 왜, 말해줄 거야? 응?"
"자."
그냥 '자.'뿐이었다면 세실은 코방귀를 뀌거나 더 큰 고함소리를 내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는 차가운 번득임이 동반된 것이었고
세실은 그것이 칼집에서 뽑혀나온 복수의 칼날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목소리는 이물 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므로 세실은 복
수의 칼날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법장이 극도로 억제되는 느낌은
정확히 그녀를 찾아들었고, 그래서 세실은 신음소리를 내며 문을 도로
닫아야 했다.
선수에 앉아있던 키는 달빛에 복수를 비춰보고는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기 시작했다.
돛은 펼치지 않았지만 라이트버드호는 꾸준한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
었다. 배 아래에서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살아있는 물 스팻 때문이다.
하지만 키로서는 약간 기분 나쁜 항해였다. 분명 전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의 롤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경험에 위배되는 움직
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뒷갑판에 앉아있는 에름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
작은 조정 막대에 손을 얹은 채 앉아있었지만 사실 조정할 필요는 전
혀 없었다. 스팻이 알아서 배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작은 그
저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게 앉아있는 것일 뿐이었다.
에름 후작은 배 맞은편, 그러니까 선수에 앉아있는 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좀 웃기는 말이지만, 키 선장. 나는 흔들리지 않아서 멀미가 날 지
경이오."
고요한 밤바다 위였기 때문에 말소리를 높일 필요는 별로 없었다. 키
역시 조용히 말했지만 그 대답은 배를 가로질러 후작에게 잘 들려왔
다.
"불편하군."
"어쩔 거요? 이 축축한 친구를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이오?"
출입문 뒤쪽에서 숨죽인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고, 그래서 에름
후작은 세실이 문 뒤에서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키
는 별 웃음기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다. 떠나지 않는군. 열린 바다로 나오면 도망칠 거라 생각했
는데."
"흐음. 야생동물이라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으니, 지성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러니 국왕과 국왕이 아닌 자를 구별하면서 보물의 파수꾼 노릇을
하는 거지."
"제국은 당신 때문에 더 골치 아파지겠군요. 이제 당신은 바람 없이
도 움직일 수 있는 배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 스팻이 자유호를 움직이
게 된다면 그거 정말 무시무시하겠는데."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름 후작은 이대로 침묵을 지킬 것
인지, 아니면 이왕 던져본 미끼를 이용해볼 것인지를 놓고 잠깐 고민
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는 비합리적인 이유에
서였다. '뭐, 라이온의 말대로라면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지야 않겠지.'
"이런 막강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어떻소. 키 드레이번. 다시
폴라리스로 돌아갈 거요?"
그의 예상대로 키는 복수를 휘두르며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 등으
로 외치지는 않았다. 다만 밤바람을 닮은 목소리로 나직이 대답했을
뿐이다.
"오스발을 죽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에름 후작은 한숨을 쉬었고 승강구 쪽에서도 그 비슷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은 고개를 들어올리다가 아예 뱃전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곤 두 팔을 뱃전에 걸치고는 밤하늘을 향해 말하듯이 말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 노예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율리아나 공주를 빼돌렸지."
"글쎄. 내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대답에는 이런 비고가 붙어있
는 것 같군요.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알아두라는 의미
에서 하는 대답임.' 내 느낌이 맞습니까?"
키 드레이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난 에름 후작은 갑자
기 키를 확 꺾어 키를 바다에 빠트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시도
할 용기는 별로 나지 않았다. 키가 바다에 빠져죽을 사람도 아니거니
와 만일 헤엄쳐 올라온 키가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한다면 그것은 그
로서는 퍽 달갑잖은 상황인 것이다. 라이온의 말대로라면 키는 똑같이
복수하는… 싱거운 상상을 계속하던 에름 후작은 문득 어떤 생각 하나
를 포착했다.
후작은 뱃전을 베고 있던 머리를 앞으로 들어 선수쪽을 향해 말했다.
"그가 당신을 위협하는 거요?"
"뭐?"
"오스발이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를 죽이려드
는 겁니까?"
"터무니 없는 소릴 하는군."
이번에도 후작은 키의 대답에서 조금 전과 같은 비고가 달려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후작은 자신의 생각을 그 스스로 지지하
기 어려웠다. 노잡이 노예였던 오스발이 어떻게, 왜 제국의 공적 제 1
호인 키 드레이번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후작은 짧은 기간이
나마 오스발을 알고 있었고 그가 아는 오스발은 그런 추리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키 드레이번이 카밀궁을 급습한 밤, 오스발
은 그 스스로 본관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라이온의 말에 의하면 키 드레이번은 똑같이 돌려주는, 말
그대로의 복수자다. 사랑에 사랑을 돌려주고 죽음에 죽음을 돌려주는.
왕위에 왕위를 돌려주고 왕국에 왕국을 돌려주는… 폴라리스? 그렇다
면 그의 주위의 누군가가 새로운 나라를 원했던 것일까?'
마음 속의 또다른 자신으로부터 '농담도 적당한 품격은 유지해야지,
그렇잖으면 광언이잖은가' 어쩌고 하는 내용의 야유를 들으면서도 에
름 후작은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라이트버드호를 조종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고요하고 무료한 밤바다 위인 것이다. 공상에 잠
기기엔 딱 적합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후작은 마음껏
공상했다.
파킨슨 신부는 방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침대에 몸을 누인 채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드는 결국 넌더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젠장, 가만 앉아서 생각 못하쇼? 보는 본인 정신 시끄럽잖아."
"눈 감아."
"뭐요? 드디어 법황 성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
요?"
파킨슨 신부는 두 손을 머리 옆까지 들어올려 강하게 두 번 휘저었
다. 그리곤 의자 위에 몸을 던지듯이 주저앉았다. 다리를 꼬아올린 신
부는 그 위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면서 말했다.
"라오코네스."
"라오코네스?"
"그 대드래곤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왜 펠라론 게이트에 아무
도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일까?"
"미노만까지의 패스파인딩이면 돈 많이 들 거요."
"가서 물어볼 생각은 없다. 어쨌든 당장은 말이야.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게 된 다음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추리를 할 때다. 대
드래곤이 왜, 왜, 왜 그랬을까?"
"본인이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수, 수 있겠소?"
"내 추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이놈아. 잠자코 네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자라!"
"아까도 나왔던 말이지만, 아무래도 당신을 겨냥한 말인 것 같지 않
소?"
"뭐?"
데스필드는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사실 그 역시 라오코네스의 이야
기를 들은 직후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의뢰주인 벌
쳐는 파킨슨 신부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도록 도우라고 했고, 라오
코네스는 아무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데
스필드는 이런 기상천외한 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성 없는 사건들이
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라오코네스 당신 말이오. 어떤 당신이 거기 들어가는 것을 라오코네
스 당신이 싫어한다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그만이었을 거
요. 거기 들어가고 싶어하는 당신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당신
은 일부러 이곳까지 날아와서는 법황 당신에게 말했소. 그렇다면 당신
은 당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당신은 다른 당신이
아닌 바로 당신이 거기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어서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 것 아닐까요?"
데스필드가 말한 마지막 문장은 그의 괴상한 화법의 극치라 할 만한
것이었지만 오랜 단련을 거친 파킨슨 신부는 별 무리없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합당한 추리야. 하지만 녀석이 왜 나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거지? 아
니, 잠깐. 그럼 그냥 내 앞에 나타나서 말하면 되잖아?"
"응? 그야 간단히 설명될 수 있지. 당신이 말한 것에 따르면 당신은
800년 전의 약속 때문에 제국의 땅을 밟지 않으려 한 것이오."
"아, 그렇군. 그때쯤이면 나는 페인 제국에 있었고 나에게 뭘 말하려
면 라오코네스는 제국 땅을 밟아야 했단 말이지."
"그렇소. 그리고 대드래곤 당신의 자존심도 있었을 테고. 당신 같은
일개 신부보다는 법황 당신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근사하잖소."
"흐음. 이해되는군. 그것이 일몰의 제왕다운 처신이란 말이지? 제왕
이니까 법황 성하를 상대로 말한다 이거로군. 하지만, 제길,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자기가 뭐라고 교회나 신부의 일에 간섭한단 말이
냐!"
파킨슨 신부는 이렇게 존대와 하대를 동시에 사용해가며 듣고 있던
데스필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데스필드는 혀를 빼물어 보인 다음 말
했다.
"대드래곤 당신에겐 간섭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나 보지. 어쨌든
800년만에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미노만을 벗어날 정도니까 꽤 중
요한 이유일 거요. 젠장.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당신이 살아있었
다는 것도 몰랐겠지."
"그렇지?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런데 그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로 하
여금 800년의 시간과 이 넓은 대륙을 가로지르게 만들었을까?"
"이유야 알 수 없고, 상관 없잖소?"
"상관 없다니?"
"어쨌든 본인이 보기에 상관은 없는 것 같은데. 라오코네스 당신은
당신더러 답을 찾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어. 아무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당신이 원하는 건 답을 찾는 거지. 펠
라론 게이트는 답을 찾을 수 있는 한 가능성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었
어. 맞소?"
"그래. 그렇다."
"그럼 당신은 적극적인 방해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만 끓이고 뚜껑 열고 김 빼쇼."
"하지만 내가 거기에 들어가야 된다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면 안돼오? 그만 하고 주무쇼. 내일 성하 당
신을 만나봐야 되잖아. 이런, 젠장. 본인이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
만, 그래도 법황 당신을 알현하게된 신부가 도대체 뭐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요?"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 내일 성하를 알현하지? 네 말이 맞다. 이런 경우라면 알
현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로 머리가 꽉 차 있어야 돼지. …그런데
그 자식이 왜 그랬을까?"
"으윽. 신부님 당신!"
데스필드는 야유 삼아 베개를 집어던졌고 파킨슨 신부는 껄껄거리며
그것을 피하고는 말했다. "주여. 나의 대적이 어찌 이리 많은지요. 일
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 위
를 한 바퀴 굴러 방바닥에 섰다.
"기도하고 주무시오. 본인은 가보려오."
"알았다. 잘 자라."
데스필드는 신부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닫고
나온 데스필드는, 그러나 어딘가로 걸어가는 대신 복도 옆의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유숙하고 있는 곳은 벨타온 저택이었다. 추기경의 저택이나
교회, 혹은 수도원이 아닌 법황청 의전관의 저택에 그들을 묵게 한 것
은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
만 파킨슨 신부는 천장과 바닥만 있으면 만족이라는 태도를 보임으로
써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그 의미를 짚어낼 수 있었다. 법황청 의전관 자몬 벨타온은, 법황청의
일을 맡고 있지만 성직자는 아니며 따라서 완전한 교회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교회는 파킨슨 신부를 억류할 생각이 없
음'을 나타내는 예의바른 제스춰일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파킨슨
신부는 교회 내에 속하지 않음'이라는 좀 더 강렬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데스필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경우엔 천장과
바닥이 있으면 만족이라는 파킨슨 신부의 태도가 차라리 속 편하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 배낭을 뒤진 다음 서재 쪽으로 몸
을 돌렸다. 약속 시간이 가깝다.
서재에서는 자몬 경과 몇 명의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
몬 경은 데스필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고 데스필드는
눈인사를 보낸 다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몬 경은 주위에 앉아있
는 사람들을 주욱 소개했고 데스필드는 웃으며 그 이름들을 모두 잊어
먹었다.
"피곤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소?"
하인이 다가와서 데스필드의 옆에 섰다. 데스필드는 술 이름을 하나
말한 다음 가볍게 손을 풀었다.
"거덜나는 흔적이 보이거든, 본인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알아서 쫓
아보내주시길 바라오."
테이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가볍게 웃었다. 서 자몬은 게임의 이
름을 말했고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자몬은
다시 한번 웃은 다음 날렵한 솜씨로 셔플한 다음 카드를 돌렸다.
데스필드는 차분한 눈으로 카드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는, 엉뚱한 것에 정신을 팔고 있는 파킨슨 신부와는 달리 내일
있을 법황과 신부의 회견을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유념하셔야 될 것은, 사실을 말씀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았어. 사랑해."
"성하. 제발. 저는 지금 파킨슨 신부님과 이야기할 때의 주의점을 말
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래?"
"파킨슨 신부님에게는 위험이 없지만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 분은 공
주 암살건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신 듯합니다. 교회의 종으로서
그 암살을 도왔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것을 저지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거지요. 어느 것이 더 성사에
가까이 가는 일인가, 즉 아주 오래된 사효적효력과 인효적효력의 대결
이, 혹은 더 넓게 형식주의와 실질주의의 대결이 그 분의 안에서 일어
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 대결의 짝을 가리키는 말들은 그 외에도 많겠
지요."
"그렇군. 그런데 위험이 없어서 위험하다는 것은?"
"그 분은 답을 얻고자 할 뿐 그 답을 얻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목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질문이 원론적인 것이다 보니 당연한지도 모르겠
습니다만. 따라서 성하께서 그 분을 책략가나 음모가로 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최악
의 경우 그 분의 속에는 있지도 않은 책략이나 음모가 성하의 자극에
의해 생겨나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결국 서로의 믿음에 대해 가슴을 열고 이야기
해야 된다는 말이지?"
"예, 성하."
퓨아리스 4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옷차림을 가볍게 가다듬었다.
"준비됐어. 아, 그러길 바란다는 말이지만."
플로라는 목례한 다음 온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법황은 천
천히 걸어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바깥의 대기실에서는 그레이엄과 대화 중인 늙은 신부의 모습이 보였
다.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주고 받았던 것인지 껄껄거리며 웃던
늙은 신부는 법황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레이엄은
법황을 소개하려 했지만 법황이 먼저 파킨슨 신부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파킨슨 신부는 한쪽 무릎을 살짝 꿇으며 법황의 반지에 접구했다.
"이 만남을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할진저.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
입니다. 성하."
"주님을 찬양할진저. 일어나게, 파킨슨 신부."
신부가 다시 일어나자 법황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집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레이엄이 그들의 등 뒤에서 집무실 문을 살짝
닫았다.
퓨아리스 4세는 발코니 쪽으로 파킨슨 신부를 안내했다. 발코니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파킨슨 신부를 의자에 앉힌 법황은
그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눈 아래로는 기적의 도시가 여름 햇
살 속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이런 자리 배치에 약간 당
황했지만 퓨아리스 4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자네가 편한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어, 파킨슨 신부.
책상을 가운데 두고 자네를 세워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
가 될 것 같군."
"실례라니오, 성하."
"아니. 나는 테리얼레이드에서의 그대의 활동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네. 내 주위의 약간 강직한 추기경들 중에는 자네의 활동을 폄하하
는 이도 있지만, 그런 자들조차 스스로 그 일을 맡게 되면 머리를 내
두르며 도망치고 말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지. 테리얼레이드
교구 신부라니, 정말 대단한 일이야."
파킨슨 신부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퓨아리스 4세 역시 웃
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네가 조력을 구하고자 이 먼곳까지 와주었으니 나는
당연히 교회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사도의 맏형이 되어 그대를 대해야
겠지. 자, 들려주게. 형제여. 내가 자네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하지?"
파킨슨 신부는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어렵게 말머리를 뗐다.
"아무래도 그 테리얼레이드에서의 일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
군요."
법황은 차분히 기다렸다.
"법황청으로 매년 보고서를 올렸습니다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가 테리얼레이드에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전도나 봉사나 미사 집전이
아니라 교회 건설이었습니다. 물론 횟수가 가장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시간과 활동을 투입해야 했던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알고 있네. 아울러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니오. 제대로 건사하질 못해서 계속 다시 지었어야 했으니, 그건
제 잘못입니다. 물론 테리얼레이드라는 곳이 방화를 일종의 사교 수단
으로 삼는 험악한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연례행사처
럼 교회를 재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교회라는 건물에 대
해 어떤 절실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계속해서 다시 건축했다는 것은 자네가 교회를 꼭 필
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졌기에 그런 것 아닌가?"
"아니오. 죄송합니다. 제대로 표현하질 못했군요. 그러니까- 교회라
는 것이 저에게 어떤 위안이 되질 못했습니다. 농부의 예를 들겠습니
다. 농부에게 밀밭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집은 그의 휴식처입니다.
계속해서 재건해야 했던 테리얼레이드 교회는, 제게 농부의 밀밭처럼
어떤 결실있는 노동의 대상이긴 했습니다만 마음의 고향이나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질 못했습니다. 절대로 그 일이 힘들거나 고되어서
싫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것은 노동의 대상이라기보
다는 마음의 안식이 되고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는 곳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곳은 주님의 집이잖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자넨 사도
가 아닌 건축가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는 말
이군? 사도인 자네를 이끌어주었어야 할 교회를 거꾸로 건축가인 자네
가 계속 이끌었다는 사실이 자네를 당혹시켰다는 것인가?"
"예… 그런 것 같- 아니,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점, 바로 그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손이 바로 이 손밖에 없었기에 저는 교회나 성자의 조력, 혹은,
용서하소서. 주님의 도움보다는 파킨슨의 도움을 더 필요로 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저 자신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런데 자네의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주는 이유
가 뭔지 궁금하군."
퓨아리스 4세는 내심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 핸솔 추기경에게도
밝혔듯이 법황은 이런 종류의 회견에서 말 첫머리부터 구원이니 신의
뜻이니 성전의 기자가 간과한 - 것이라고 그 자신이 믿고 있는 - 사실
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놓곤 하는 내방자들에게 질린 상태였다. 하
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대신 자기 검열을 시작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검열은 이미 다음에 파킨슨 신부가 어떤
말을 꺼내어 놓을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혼란을 느낍니다. 성하. 제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저 스스로가
수행하는 일들의 반복 속에 10년의 세월을 보낸 후, 저는 저 자신이
교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뚜렷하지는 않을지 몰
라도 내심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믿음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은 다림 교회에서였습니다. 율리아나 공주
암살건 말입니다."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강렬했다. 퓨아리스 4세는 어떤
형태로든 이 이야기가 거론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토록이나
직설적으로 날아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하고 싶은 것을 힘들게 억누르며, 부활의 법황은 차분히 신부의 다
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성전의 말씀 중 가장 많이 어겨졌던 것인지도 모르는 어떤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 아무런 조건이 없는 말임에
도 불구하고 이교도에겐 적용되지 않으며 이단심판관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전장에 서있는 신심 깊은 병사에게는 말 할 것도 없겠
지요. 그리고… 예. 저 자신도 저 계율을 어겼던 적이 없다고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파킨슨 신부."
"저를 파문에 처하신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람의 도시에서 10년 동안이나 살아있었다는 것에서 그 목숨에 제 것
아닌 핏자국이 묻어있음은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
게도 테리얼레이드에는 제 고해를 받아주실 신부님이 없었습니다. 어
쨌든, 이제 성하께서는 안심하실 수 있겠지요. 저는 성전원리주의자의
화법으로 성하를 괴롭혀드리고자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
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리고 저는 성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성스러운 도시에서 시선을 옮겨 무릎 앞에 있는 테이
블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아시겠지요. 위협받았던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키 드레이번을
이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위협받았다는 말을 변명으로 삼지는 않겠습
니다. 만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스스로가 다림 교회로 쳐들어
갔을 테니까요. 키 드레이번은 단지 제 의지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어
줬을 뿐입니다."
"그런가."
"예. 저는 제 의지로 성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테리얼레이드에
서 10년 동안 그랬듯이, 저는 제 속에 있는 교회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게 남아있는 마지막 원칙의 파괴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할 말을 다했다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속마음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마치 그 자신을 피고인 삼아 죄상을
설명하는 검사처럼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판결을
듣기 위해 재판장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활의 법황을 돌아보았
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고 싶어 이렇게 10년만에 찾아왔
습니다.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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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가 좋아하는 팬터지요? 데프 쓰리 드래곤Deaf three dragon을 좋
아합니다… 퍼버버벅!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7. Wedding march…3
데스필드는 법황청 앞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간은 제
9 시 무렵, 여름의 태양이 지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시간이었다. 손수건
을 둘둘 말아 땀받이 삼아 이마에 묶던 데스필드는 법황청의 정문을
나오는 파킨슨 신부를 보고는 손인사를 보내었다.
"이제 나오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필드가 앉아있던 분수대로 걸어
왔다. 데스필드의 옆에는 하얀 갈기를 가진 흑마가 조용히 서있었다.
손수건을 질끈 묶은 데스필드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신부를 바라보았
다.
"잘 안됐소?"
"아아."
"하이야압!"
파킨슨 신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스필드는 솟구쳐 올랐다.
파킨슨 신부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데스필드는 분수대의 난
간을 밟고 다시 뛰어올라서는 말 안장 위에 올라탔다. 파킨슨 신부 뿐
만 아니라 흑마도 꽤나 당황한 듯했지만 데스필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부를 향해 손을 던졌다. "잡으쇼!" 묘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지
만, 파킨슨 신부는 눈을 몇 번 껌뻑거리다가 말했다.
"뭐냐?"
"튀어야지?"
"튀긴 뭘 튀냐, 자식아."
"안전한 거요?"
"그럼 안전하지 않을 건 뭐냐?"
데스필드는 투덜거리며 안장에서 내려왔다. 땅에 내려선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하얀 갈기를 쓰다듬어주었고 윈디어는 머리를 몇 번 뒤채며
푸르릉거렸다.
오늘 새벽까지 이어진 도박판에서, 그 때까지 따지도 잃지도 않으며
노련한 솜씨로 판을 키우던 데스필드는 마지막으로 스완 대거를 테이
블 위에 던졌다. 카드꾼들은 그제서야 그들이 몇 년에 한번 참석하기
어려운, 어쩌면 평생 한번이나 참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진짜 판
에 끼게 된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들이 포기한 것은 참으로 경탄
받을 만한 훌륭한 도박꾼의 자세였다. 남은 것은 자몬 경뿐이었고, 그
래서 데스필드는 히죽 웃으며 벨타온 자작을 쳐다보았다. 벨타온 자작
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스치기만 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명검
인데다 고고학적 가치도 엄청난 보물인 스완 대거에 걸맞는 보물을 가
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자몬 경의 명마 윈디어를 걸 것
을 제안했고 자몬 경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데스필드는 다분히 악의적인 휘파람을 불며 윈디
어를 타고 나왔다. 그가 벨타온 저택의 정문을 나올 무렵 자몬 경의
침실 쪽에서는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고 그래서 데스
필드는 퍽 행복했다.
"재미있는 재주다. 이곳에 오자마자 펠라론 최고의 카드꾼을 격파했
으니 네놈 명성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그런데 그 말은 왜 탐낸 거냐?"
"조금 전 봤잖소. 도망치려고."
"도망치려고?"
"당신이 법황 당신의 비위를 건드릴 경우 그렇잖아도 입막음이 필요
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 아니오."
파킨슨 신부는 멍한 눈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라오코네스의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만, 파킨슨 신부
는 교회가 감추고 싶은 비밀의 증인이다. 따라서 법황청은 신부를 행
방이 묘연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데스필드는 바로 그 점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윈디어를 확
보해둔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따스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를 펠라론 밖으로 도피시키겠다고?"
데스필드 역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본인에게까지 불똥 튀기 전에 도망치려고."
신부의 얼굴에 떠올랐던 온화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파킨
슨 신부는 으르릉거리며 데스필드를 노려보았지만 데스필드는 피식 웃
으며 윈디어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적당히 하고 털 눕히쇼. 안전한 거면 갑시다. 혹 말에 타고 싶으
쇼?"
"아니, 걷자. 이야기도 좀 하고 싶고."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펠라론의 시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시내의 정경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위풍당당하다에 가까웠다. 1700년이
나 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법황들이 항상 알뜰하게 관리를 해왔기에
고도(古都) 펠라론은 아직도 훌륭한 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고 그
시내를 오가는 사람들 역시 활기찼다. 그리고 그 활기찬 시민들의 8할
이상이 흥미로운 듯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곤 했다.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고 데스필드는 턱을 돌려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윈디어를
가리켜보였다.
"바람 사슴 당신을 보는 거요."
"바람 사슴?"
"윈디어windeer. 바람 사슴. 당신의 이름이자 동시에 품명이지. 말
볼 줄 아는 당신이라면 침을 질질 흘릴 말이오. 본인의 도피 수단으로
선택된 것만 봐도 아실 수 있잖소? 당신은 사무이다크의 고원 출신이
오. 그리고 당신의 가계는 어쩌면 말에 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
야기도 따르지. 가끔 뿔이 돋는 당신도 있거든."
"뿔이? 허, 희한하군."
파킨슨 신부는 감탄하는 눈으로 윈디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데스필
드는 윈디어를 바라보는 신부의 눈빛이 곧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앞을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쩐지 이 놈이 내 신세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 같다. 나도 교회의
품종에 속하지 않는, 뿔 돋은 신부가 된 기분이거든."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앞을 보며 말했다.
"말 무리 중에 섞여들어간 사슴 당신은 따돌림 당하겠지. 그래, 저기
법황청 목장의 종마 당신들은 테리얼레이드에서 온 야생 사슴 당신을
따돌리던가요?"
파킨슨 신부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따돌린 건 아니다만 말이 통하지가 않으니 따돌림 당한 거나 마찬가
지다."
"성하 당신이 대답을 안해주던가요?"
"아냐. 주님께 맹세코 그 분께서는 성의를 다하셨다. 확신할 수 있
어. 그 분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이 부하 성직자를 전혀 꾸중하시지
않으셨고 내 의문과 갈등에 모든 열의를 다해 참여해주셨다. 난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독실한 신앙심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이적
이 함께 한 것도 아닌 로데인 백작이 어떻게 교회의 정상에 서게 되었
는지 의아하게 여기곤 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왕이 될만한 분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법황이 계시기나 하겠느
냐. 1700년 동안 펠라론과 교회를 다스렸던 모든 법황께서 부활하신다
하더라도 대답하실 수 있을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분께서도 고백하
셨지."
"고백?"
퓨아리스 4세는 시무룩한 얼굴을 술잔을 들어올렸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 자의 질문에 어떤 답을 준다
면, 그것이 어떤 대답이든간에 교회 체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대답
이 될 거라고."
플로라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동정어린 눈빛으로 법황을 바라보았
다. 법황은 술잔 속에 담긴 주홍색 액체, 혹은 그 위를 어른거리는 자
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교회의 체제에 순응하라는 것이지. 단순해.
주님이 성전을 만드시고 성전이 교회의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교회는
주님의 뜻이자 바로 주님이지. 교회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만 없다면
더할 수 없이 단순하지."
"교회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이라 하셨습니까?"
"지붕이 있어야 성가대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비가 올 때 특
히 잘 드러나지."
플로라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법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법
황은 취한 것이 아니었다.
"혹은 벽이 있어야 신부가 성전을 읽을 수 있는 점. 바람을 막아줄
벽이 없으면 초가 꺼지거든. 아, 물론 바닥이 있어야 되지. 꼭 고려해
야 되는 중요한 문제야. 실수로 바닥을 준비하지 않으면 기도 중인 신
도들이 판데모니엄까지 한없이 떨어질 테니까."
플로라는 이제 고개를 똑바로 세워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술잔
을 내려놓고는 팔걸이에 두 팔을 던진 채 맥없이 위를 바라보았다.
"순종과 헌신의 서원은 복잡한 자기기만이지."
"성하."
"파킨슨 신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 10년의 세월 동안 바람의 도시
에 있었으니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결정을 내리는 쓸데없는 시간의 낭
비도 필요 없었을 거야. 모든 구조, 생명이든 건축물이든 사회구조든
모든 구조물에는 너무 당연해서 별로 언급되지 않는 공통점이 있지.
그것이, 최소한 순간은 넘어서는 시간 동안은 버티고 있을 것. 항상성
을 가질 것."
법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종? 좋아. 혼 족의 대족장이 어느날 나에게 교회를 해산하고 신앙
을 버리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 순종해야 되나? 글쎄. 나는 정중히
펜을 들어 답장을 보내겠지. '짖어댈 시간 있으면 이리 와. 화끈하게
세례해줄 테니까.'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겠지.
아마 손이 있는 모든 추기경들은 박수를 보낼 거라 생각되는군."
플로라는 생긋 웃었다. "실로 그러하겠지요."
"모든 구조에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지. 내부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바깥의 영향을 어느 수준에서 차단하는 장치. 생물이라면 그 피부일
테고 건축물이라면 그 설계일 테고 사회구조면 그 규범이지. 이제 이
런 것을 생각해 볼까. 교회의 규범은 뭐지? 신앙이야. 순교는 용납되
지만 배교는 용납되지 않아. 교회는 목숨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
긴다는 말이지. 그래서 순교자들은 이교도들의 칼날에 반항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내놓는 거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순교는 신앙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범죄야."
"예?"
"살인방조야. 알겠나? 자기를 죽게 내버려뒀으니까. 살인방조는 살인
과 똑같은 거지. 자, 신앙을 위해 자신에게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면,
타인에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자신과 남을 똑같이 대해야
되니까.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단검으로 상대방을 찌르지. 난 겉으로
보기엔 궁색해 보이는 그 신부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칼잡이들의
종부성사를 해치웠는지 정말 궁금해. 어쨌든, 그렇다면 보통의 순교자
와 파킨슨 신부의 차이는 뭐지? 자신에게 저지르는 죄와 남에게 저지
르는 죄의 차이인가? 하지만 모두가 주님의 자식인 것을."
"하지만 그것은…"
"그래. 궤변이지. 그리고 왜 궤변이 되는지에 접근하는 순간 교회 체
제는 위기를 맞게 되는 거야. 안타깝게도 파킨슨 신부가 건드리고 있
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고."
퓨아리스 4세는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찡그린 표정으로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가만이 그 모습을 보던 플로라는 조심스럽게
술병을 들어 빈 술잔을 채웠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까?"
"그거라니?"
"펠라론 게이트 말입니다."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돌려서 말했지만 뜻은 명확하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생각
해. 난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해보였지. 즉
그것을 허락해줄 수도 없고 허락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나로서는, 아흔
아홉 눈이 모두 감길 때까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는 거지. 아마 쉽게
이해했을 거야. 그러니 무의미한 요청을 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하지
는 않은 것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응?"
플로라는 약간 수심이 깃든 얼굴로 발코니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
에는 펠라론 시내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법황의 허락 같은 것은 아예 신경쓰지 않겠다고 결
심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본인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군. 어쨌든 당신이 찾던 답은
물 건너 간 거요?"
데스필드는 질문했고, 그리고 잠시 후에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걸어
오고 있던 파킨슨 신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데스필드는 그들이
걸어오고 있던 뒤쪽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대로 가운데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 속에 깊이 잠겨있
는 신부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데스필드는 신부에
게 걸어가서는 그 앞에 섰다.
"제기랄. 그 사슴의 비유 마음에 든다. 좋아. 말(馬)은 할 수 없지만
사슴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그게 뭔데요?"
"뿔로 들이박는 거지."
데스필드는 핏 웃으면서 질문했다.
"그래, 뭘 들이박으려오?"
"펠라론 게이트. 안내해."
"뭐요?"
"다시 말할까? 여기서 펠라론 게이트까지의 패스를 그으란 말이다.
난 그게 자케산에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있는지 몰라."
데스필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데스필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허락 받으셨소?"
"아니."
"그럼 또 거역하겠다는 거요?"
"허락은 하지 않으셨지만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라오코네스
출현이라는 사실에 당황하신 것 같아.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도 하지 않음으로써 신도의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지도, 하지만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로 몰아가실 생각인 게야. 주여, 사도 중의 사도
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성하께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들어가봐야겠
다."
"법황 당신이야 그렇다 치고, 그럼 라오코네스 당신은? 애초에 아무
도 거기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은 라오코네스 당신-"
파킨슨 신부는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그 쓸데없이 용적 많이 차지하는 비효율적 피조물 녀석이야 나 알
바 아냐! 아니, 그 놈 괘씸해서라도 난 기어코 들어가볼 테다."
"…당신 지금 일몰의 제왕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맞지요?"
"거어럼."
데스필드는 갑자기 이 용맹무쌍한 신부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라는 것
이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는 침착을 되찾으려 애쓰며 말했다.
"당신의 시도가 펠라론에 불벼락을 이끌어올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해
봤소?"
"뭐?"
"당신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갔을 경우 라오코네스 당신이 나타나서
는 '아무도 들어가지 말랬잖아!'라고 노기등등하게 외치며 1700년 묵
은 포도주병을 깨버릴 거라는 것을 생각 못해봤냐고."
"…데스필드?"
"아?"
"몰래 들어가자."
데스필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한참 동안 왈왈거렸고 그 동
안 파킨슨 신부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는 찬송가를 불렀다. 네번째인가 다섯번째 찬송가를 부를 때 쯤 파킨
슨 신부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스필드를 발견했
다. 신부는 푸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안 듣고 있었군?"
"그렇게 물었었냐?"
데스필드는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른 다음 발로는 복잡한 스텝을 구
사하기 시작했다. 데스필드가 3연속 스핀을 시도할 때 쯤 파킨슨 신부
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적당히 해둬. 법황청에겐 피해가 안 돌아갈 방법으로 할 테니까."
"어떻게!"
"안내나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데스필드는 당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더 불안해 등으로 말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 진실이 있었
다. 첫째, 이 막무가내를 평생의 신조로 삼고 있는 듯한 신부를 설득
하는 것은 잊혀진 탑의 이름을 맞추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며, 둘째,
그가 받아들인 벌쳐의 의뢰는 파킨슨 신부를 펠라론 게이트까지 - 펠
라론이 아니라 - 안내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런 의뢰를 한 벌쳐에 대해 소리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속으로는
절망적인 추측을 해보았다. '설마 이 알량한 스완 대거로 맞서싸워야
되는 당신이 라오코네스 당신은 아니겠지?'
바람이 나무를 빗질하는 싸르륵거리는 소리가 펠라론의 낮은 오후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높은 오후는 황금의 태양의 영토였다.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펠라론 강의 강변을 따라 걸어가다가 역류의 법
황 로키가 자케산의 산불을 끄기 위해 강물을 역류시킨 로키 대로에
접어들었다. 발길 돌리는 곳마다 남아있는, 혹은 증거하고 있는 법황
들의 기적들을 보며 파킨슨 신부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
다.
법황은 신의 이름을 가지며 기적으로써 그 이름을 증거한다. 그리고
1700년의 펠라론 역사에서 그 기적의 고리가 끊어진 적은 한번도 없
다. 창조자의 이름은 유릴란드였고 오펠이었고 라우스였고 로키였고
지금은 퓨아리스다. 따라서, 이성의 나침반이 비록 인간을 가리키고
있더라도 파킨슨 신부는 퓨아리스 4세를 창조자 주님 그 자신으로 받
아들여야 한다. 언젠가 핸솔 추기경이 지적했듯이 너무도 단순하다.
법황이 곧 신이며 따라서 배교는 법황의 기준에 맞는가 틀리는가로 결
정된다. 그리고 이 단순명쾌한 진실은 파킨슨 신부에게 배교자의 낙인
을 찍는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도시에서 눈 닿는 곳
마다 보이는 것은 법황과 신의 일치를 나타내는 증거들뿐이다. 파킨슨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결국 펠라론 파인의 은빛
물결 속에 들어섰을 때야 파킨슨 신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좀 편하
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저게 진짜 은이면 얼마나 멋질까."
데스필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은빛 바늘처럼 보
이는 펠라론 파인의 침엽이었다. 햇살 속에 그 침엽들은 하얗게 불타
고 있었고 그래서 그 아래를 걷는 두 사람을 몽환적인 기분에 젖게 만
들었다. 파킨슨 신부가 웃으며 대답해주려 할 때 데스필드가 말했다.
"다 왔소. 이 앞이오."
눈 앞에서 대로는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계곡 쪽
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그 안쪽으로는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이
이어져 있었고 저 멀리 얕은 담장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파킨슨 신
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길쪽으로 들어섰다. 데스필드가 당황하여
말했다.
"어? 잠깐만. 여기서 멈춘 것은 계획 같은 것이 있으면 들어보자는
의미였다고요."
"아, 계획? 있지. 너는 이대로 돌아가거라."
"뭐요?"
"돌아가라고. 이제 됐으니까."
"아- 그건 안되겠는데. 본인은 끝까지 봐야겠소. 젠장. 그리고 본인
에겐 본인 나름대로의 계획도 있단 말이오."
"뭔 말이냐?"
"그건 있다가 말해주지. 본인이 지금 알고 싶은 건 당신이 아직까지
도 거기 들어가볼 생각이 있느냐 하는 거요."
"있다. 확실해."
"이런, 썩을. 좋소. 경비병은 어쩌고? 멍청한 순례자 당신이나 광신
도 당신, 혹은 실연당한 철부지 청년 당신이 뛰어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칼솜씨 좋은 경비병 당신들이 배치되어 있소."
"그래.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단숨에 그 의미를 알아들은 데
스필드는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알았소. 젠장." 그리고 그
들은 산길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 펠라론의 하늘 아래로 강력한 포성이 울려퍼졌다.
포성의 메아리가 길게 꼬리를 끄는 가운데 퓨아리스 4세는 맹렬한 속
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법황은 단숨에 발코니로 달려가 사방을 둘러
보았고 플로라 역시 당황하여 가운을 들어올렸다. 그 때 포성의 여음
치고는 너무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법황은 문쪽을 돌아보며 외
쳤다.
"어이가 없군. 그냥 뛰어들어와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 노크를 하다
니? 어쨌든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핸솔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약간 난처한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좀 안 맞군요.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짐작했어야 하겠
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 네. 저 포성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왔습니다."
"응?"
핸솔 추기경은 플로라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법황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자케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킨슨 신부의 핸드건일 겁니다. 아마도 펠라론 게이트 경비병을 쫓
아내기 위한 위협사격일 테지요."
"잠깐. 자네, 신부의 계획을 알고 있었나?"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가 법황청을 나서자마자 일을
벌일 거라는 건 짐작하지 못했군요. 일단 펠라론 게이트 경비병들에게
반항하지 말라고 일러두긴 했습니다."
"말이 거꾸로 된 것 아닌가?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줄 알았다면 미리
막았어야지."
"그는 신도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오코네스는-" "그가 들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었지요."
퓨아리스 4세는 날카로운 눈으로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핸솔 추
기경은 신비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는 술병을 들어올렸다.
"라오코네스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놓고 본다면 그가 파킨슨 신부를 겨
냥해서 말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핸솔 추기경은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가 신부를 겨냥해서 말한 것이라면 그의 말은 거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만일 라오코네스가 정말로 파킨슨 신부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
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면 바로 어제나 오늘 쯤 나타나서 파킨슨 신
부를 밟아버리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미리 나타났지요."
퓨아리스 4세와 플로라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핸솔 추
기경은 다음 잔에 술을 따랐다.
"라오코네스가 저보다 더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그렇
다면 대드래곤은 파킨슨 신부가 용수철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지
요. 저도 알아볼 정도였으니까요. 따라서, 만약 그를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게 하고 싶다면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대드래곤
은 그렇게 했습니다."
"아니- 내버려두었어도 들어갔을 텐데?"
"그건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저는 이런 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혹
시 그와의 회견이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퓨아리스 4세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핸솔 추기경은 두 개의 술잔을
들어올려 하나를 법황에게, 그리고 하나는 플로라에게 내밀었다. 둘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마 라오코네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파킨슨 신부는 펠라론 게이트
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성하와의
회담은 대충 끝내버린 거죠. 정말 순진한 악동 같은 사람입니다… 그
리고 라오코네스가 원했던 것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말이 되는 것 같군. 좋아. 그런데 이 술잔의 의미는 뭐지?"
"그의 귀환을 미리 축하하고 싶어서입니다. 파킨슨 신부는 지금껏 펠
라론 게이트에 몸을 던졌던 모험가나 낭만가와는 다릅니다. 그에게는
대드래곤의 후원이 있지요. 그래서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쪽에 대한 최초의 보고자가 될 수 있겠지
요."
핸솔 추기경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혹 우리 시대에는 못 돌아올지도 모릅니다만, 뭐 어떻겠습니까. 그
럼, 건배할까요?"
데스필드는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었다. 그리고 밧줄을 두 겹으로 해
서는 그 한쪽 끝을 파킨슨 신부의 허리에 묶었다. 그 동안 파킨슨 신
부는 핸드건으로 담을 겨냥하고 있었다.
얕은 담에는 경비병들이 벽에 붙어서있었다. 그들은 예상외로 고분고
분했고 파킨슨 신부는 그들이 핸드건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들이 고분고분한 이유는 핸솔 추기경의 지시가 있었
기 때문이지만, 파킨슨 신부의 판단이 꼭 틀리다고는 볼 수 없다. 벽
에 붙어선 경비병들은 신부가 오발이라도 일으킬까봐 공포에 떨고 있
었다.
밧줄을 신부의 허리에 묶은 데스필드는 그 반대쪽 끝을 집어들어 윈
디어의 안장에 단단히 묶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신부와 윈디어를 연결
시켜놓은 데스필드는 한숨을 돌리고는 약간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펠라
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얕은 담장이 둘러친 공터 가운데 그것이 서있었다. 문이라
기보다는 거울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의 테두리가 보였고 그 안쪽으로는
암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크기는 꽤 커서 말에 탄 채로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체의 모습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촛점
이 맞지 않았고 불분명해 보였다.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뜰수록
더욱 보기 어려웠다. 가운데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암흑 역시 뭔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단지 착시현상인지 실제로 움직이고 있
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데스필드는 테두리의 위쪽, 그러니까
보통의 문에서라면 상인방이 있을 부분에 무슨 글씨나 무늬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
다. 그 때 그를 흘끔 돌아본 파킨슨 신부가 말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뭐요?"
"엘핀으로 그렇게 적혀있다.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에 의지하여.'라
는 뜻이지."
"글쎄. 본인은 아무리 봐도 저게 글씨인지 그림인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그냥 짐작으로 그렇게 말하곤 하는 거 아니오? 말씀하신 내용도
그렇고."
"곁눈으로 보면 조금씩 보인다더구나. 꽤 많은 수의 학자들이 도전해
서 가까스로 알아낸 거야. 그리고 덕택에 무수한 학자들의 눈이 돌아
갔다더군."
데스필드는 피식 웃고는 매듭을 한번 더 점검했다.
"좋소. 혹시나 못 돌아올 사정이 있으면 밧줄을 당겨 신호하쇼. 본인
이 밧줄을 잡아당기리다. 그리고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으면
역시 당기겠소. 얼마쯤이면 되겠소?"
"글쎄. 짐작할 방법이 없잖냐. 굶어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당겨
라."
"이런! 그건 너무 길잖아요. 포성 때문에 곧 당신들이 몰려올 텐데."
"아, 그렇군. 알았다. 네가 더 버티기 힘들면 잡아당겨라."
"그렇게 하지. 핸드건 이리 주쇼."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핸드건을 건네고는 데스필드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쏠 수 없게 해놨다. 네가 이것을 똑바로 쓸 수 있을지도 모
르겠고 사고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윈
디어에 올라탔다. 그리고 경비병들의 등을 향해 핸드건을 겨냥했다.
파킨슨 신부는 그와 윈디어를 연결하고 있는 밧줄들을 엉키지 않게
바닥에 잘 펴놓은 다음 심호흡을 하고는 펠라론 게이트 앞에 섰다. 데
스필드 역시 잔뜩 긴장한 채 신부의 등을 바라보며 손만 돌려 경비병
들을 겨냥했다. (그래서 경비병들은 너무 무서웠다.)
잠시 후 파킨슨 신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라, 있다가 보자!"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펠라론 게이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파킨슨 신부가 맨처음 느낀 것은 냄새였다.
어떤 희한한 것을 보거나 듣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결심이었지만,
신부는 냄새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상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리고 어두웠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빛도 없었기에 팔다리의 희미한 윤곽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파킨
슨 신부는 손을 얼굴 앞까지 끌어올려 흔들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
다. 그러다가 신부는 자신의 이마를 때리게 되었다.
몸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파킨슨 신부는 허리를 더듬
어보았고 밧줄이 그대로 묶여 있음을 확인했다. 밧줄은 그의 등 뒤에
서 뒤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파킨
슨 신부는 장님이 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밧
줄 이외에 손에 닿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아무 것도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맥이 풀리는 기분을 느
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의 생각대로 거기에
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바닥조차도.
그는 자신이 어딘가에 떠있다고 생각했다. 빛도, 바닥도, 아무 것도
없다니. 격하게 호흡하던 파킨슨 신부는 냄새는 있었다고 다짐해보았
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
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호
흡할 수 있는 공기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는 없
었다.
파킨슨 신부는 소름이 돋은 팔을 서로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걸어갈 수도 없었다. 문득 그 사실이 그
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걸을 수가 없으므로 뒤로 돌아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려던 파킨슨 신부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
쨌든 밧줄은 연결되어 있고 여차하면 데스필드가 끌어당겨줄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깨달았다.
소리,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그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자신의 격한 호흡소리, 그리고 비
명을 지르기 위해 움직이던 턱과 치아에서 나던 소리, 그리고 이제 파
킨슨 신부는 자신의 맥박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다른 소리도 낼 수 있다. 당연하다. 왜 말을 할 수 없단 말인
가. 나는 말을 할 수 있다. 파킨슨 신부가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아무런 자극도 없었기 때문이다.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
"누가 있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다시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물론, 완전히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바닥이 없으므로 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쨌든
파킨슨 신부는 다시 격한 호흡소리와 맥박소리를 내며 전방을 주시했
다.
대답이 있었다. 질문보다 먼저.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
신할 수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어떠했더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
이인지 어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제국어로 말했는지조
차 알 수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부는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
"누가 대답했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헐떡거렸다. 아무래도 대답이 있는 것 같다. 파킨슨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다."
"그럼 혹시 당신은 악마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당혹했다. 그는 팔짱을 끼려다가 주춤했다. 그것이 옳
은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자신이 신도 악마도 아니라
고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무래도 대답이 질문
을 앞서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질문하기 전
에 대답을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뭐가
'전'이고 뭐가 '후'인지도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다."
"혹시 당신은 제 자신입니까?"
"그렇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인 것입니까?"
그냥 당신이란 말이지. 파킨슨 신부는 질문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
다. 이 상황은 왠지 데스필드에게 설명시키면 잘 할 것 같은데. 녀석
을 여기로 끌어당길까? 그러나 파킨슨 신부는 그 경우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아니다."
"좋습니다.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저 자신도 아니고 그냥 당신
일 뿐이라는 것이군요?"
"네가 가진 개념들을 포기하면 나는 네 속에 구현되지 않는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다시 질문을 던지기 전에 꽤 열심히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
"당신이 누군지 알려면 개념의 소거 대신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라는
겁니까?"
"지금은 그렇지."
"어렵습니다. 저는 우주나 신보다 더 큰 개념을 그릴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것들조차 말을 할 수 있을 뿐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좋습니다… 당신이 누구든간에, 제 질문에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
까?"
먼 곳,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부드러운 흔들림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파킨슨 신부는 그것이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 파킨슨 신부는 한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제 이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소름끼치는 공간은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편안한 곳으로 바뀌
고 있었다.
"듣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옳다."
"저는 율리아나 카밀카르의 암살을 저지했습니다. 교회가 그것을 원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제 행동이 옳은 것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옳다."
"교회가 제국의 평화를 위해 타율적 순교자로 율리아나 카밀카르를
지적한 것은 옳은 일입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윤간범들을 사살한 너 또한 옳다."
"모두가 신의 뜻이므로 옳다는 것이군요. 밤하늘에 별이 뜨는 것이,
구름이 비가 되는 것이, 손가락을 모두 구부리면 주먹이 되는 것이,
잠잠하던 산이 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것이, 초경도 치르지 않은 소녀
가 윤간당한 후 살해당하는 것이 신의 뜻인 것처럼, 모든 신의 창조물
들이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라는 말씀이군요."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상대를 향해
사죄를 표했다.
"예. 저도 스튜 속에 든 감자와 당근이 누가 더 요리에 도움되고 있
는지를 다툰다면 요리사를 웃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부드러운 흔들림이 다가왔다. 파킨슨 신부는 보이지 않는 두 손
을 조심스럽게 마주쥐었다. 메마르고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들이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감자나 당근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신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너는 왜 인간은 선을 창조할 수 없는지를 묻고 있느냐?"
"자유의지라는 것이 어쩐지 신께서 주신 어음에 배서할 것인지 말 것
인지 결정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결국
제 문제는 그것인 것 같습니다. 그 어음의 액수가 성전이라는 훌륭한
회계장부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점. 왜 신은 우리에게 공수표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배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 뿐입니까? 액수를 적어넣을 수는 없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나다."
"오오, 주여. 당신은 주님이십니까?"
"너는 답을 만들 수 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인간
은 선을 창조할 수 없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부는 눈물을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둔 채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답을 만들 수 있다고요?"
"가거라."
"어떻게 말입니까?"
눈 앞의 어떤 암흑이 다른 암흑들의 앞으로 돌출되고 있었다. 혹은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암흑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패스파인더가 네 길을 안내할 것이다. 그는 네 안내자이지만 동
시에 동행자다. 그를 따르고 그로 하여금 너를 따르게 하라."
빛은 점점 더 뚜렷한 형체로 되태어나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주위
를 둘러보았지만 그 빛 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자신의 모습 뿐이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점점 움직이고 있다는, 혹은 그 빛이 점
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부는 다급하게 질문했
다.
"말하라."
"한 가지 더 알고 싶습니다. 꼭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신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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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스타더스트의 한국 제목은 마음에 들지가
않는군요. 저걸 동화적 아름다움의 구현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건지.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7. Wedding march…4
파킨슨 신부는 똑바로 섰다.
주위는 다시 빛나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신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
큼 추운 듯도 하고 몸이 뜨겁게 불타고 있는 듯도 한 이상한 느낌 속
에서 신부는 자신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젠장! 당신을 믿다니, 본인이 얼이 빠져도 한참 빠졌지!"
데스필드의 목소리였다. 파킨슨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윈디어에 타고 있던 데스필드는 엉뚱한 방향을 보며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있었다.
"뭐요? 펠라론일 거라고? 여기가 펠라론이야? 엉? 여기가 펠라론이냐
고!
파킨슨 신부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케산이 아니었다. 은빛 펠라론 파인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돌밖에 없었다. 뒤도 돌이고 아래도 돌
이고 양쪽 벽도 돌이었다. 그들은 큼직한 돌로 만들어진 어떤 통로 같
은 곳에 서있었다. 신부의 오른쪽 벽으로는 커다란 창문이 통로를 따
라 달리고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돌기둥들이 세워
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과 멀리 떨어진 수평선이
보였다. 하늘과 수평선의 각도는 아무래도 그들이 서있는 곳이 엄청나
게 높은 건축물 안의 통로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윈디어에서 내린
데스필드는 창문 쪽으로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고는 더 큰 비명을 질렀
다.
"으아악! 미치겠어.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맙소사, 수백 피트는 되
겠네! 얼씨구? 바다가 새카맣게 보이네? 말씀 좀 해보쇼! 여기가 어디
요?"
신부를 향해 몸을 돌리던 데스필드는 그제서야 말을 멈췄다. 파킨슨
신부 역시 황당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마주보았다. 파킨슨 신부를 바라
보던 데스필드의 얼굴에 갑자기 동정심이 떠올랐다.
"쯧쯧. 나잇값도 못하고 삐지셨소? 그렇다고 울 건 또 뭐야. 본인이
잘못했소. 맘 상해하지 마쇼. 에이, 또 늙은이 변덕으로 꽁해 있을 건
아니죠? 코 한번 풀고 잊으쇼."
"…데스필드?"
"예?"
"주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본인 생각에도 그럴만해."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겠다!"
잠시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고나서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자신
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연구해볼 만한 침착과 여유를 되찾았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여기가 어디지?"
"허! 본인이 어떻게 알겠소? 어, 아마도 벽에 붙은 경비병들 당신의
엉덩이 품평해주고 있던 중이었을 거요. 어느 당신에게 짝궁뎅이라고
말해주었는데 당신이 결사적으로 아니라고 주장하더군. 마치 평소에
당신 엉덩이 보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약간의 언쟁을 일으
키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뭔가 슬쩍 당겨지는 느낌이 들더라고. 본인
은 당신이 밧줄 당기는 줄 알았소.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갑자기 이
런 희한한 곳이던데. 그럼 당신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거쇼?"
"그래. 모르겠다. 난 그냥 펠라론 게이트 밖으로 도로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데스필드는 이맛살을 퍽이나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다가 다시 창문쪽으
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도 그 뒤를 따랐다.
창밖을 내다본 순간 파킨슨 신부는 현기증을 일으켰다.
건물 외벽이 휘어져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데스필드
의 말대로 수백 피트는 될만한 높이였고 저 아래쪽으로 까마득히 해안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보였다. 두서없이 쌓여있는 바위들을 덮치는
파도들은 아무래도 수십 피트는 될 것 같은 크기였고 그래서 신부는
그들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
의 눈 아래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이었다. 이제 파킨슨
신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날고 있는 갈매기의 등이 어떤 모습인지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꾹 감았다가 위를 돌아본 파킨슨 신부는 더
이상 놀랄 기분도 들지 않았다. 건물의 위쪽은 구름 속으로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어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데스필드는 머리를 휘휘 내젓
다가 신부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알만하오."
"흐음."
"바닷가에 서있는 이 정도 높이의 탑이라면, 아니 바닷가가 아니더라
도 이 정도 높이의 탑은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지 뭐."
파킨슨 신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륙의 동쪽, 그리고 카밀카르의
서쪽에 있는 이 유명한 -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
탑은 카밀카르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카밀카르에 다가가는 배들
은 모두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히 솟
아오른 이 탑을 보며 카밀카르의 방향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카밀카르 자신은 이 탑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키고 싶어하지 않
으며 심지어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뱃
사람들은, 특히나 폭풍이 불어올 것처럼 수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불타
오르는 석양 무렵 햇살을 받아 버밀리언으로 고요히 타오르고 있는 이
탑의 모습을 보는 뱃사람들은 카밀카르의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
각하곤 한다.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그 초절적이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며.
"잊혀진 탑?"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데스필드는 찡그린 눈으로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칫하면 본인이나 당신도 잊혀질 수 있소. 본인이 알기로
잊혀진 탑에는 입구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설명 좀 해주시겠수? 본인
이 도대체 어떻게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 잊혀진 탑 섬에 나타나게
된 거지?"
파킨슨 신부는 어떤 대답으로도 데스필드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
은 기분 속에 암담함을 느꼈다.
파도가 스스로에 복상하는 해협, 페리나스.
페리나스 해협의 바닷물은 검푸르다. 대륙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하
늘을 뒤덮는 이 해협에는 갈매기도 없기 때문에 해협의 양안에 늘어선
검은 바위들에 파도가 부딪힐 때만 가끔 이 쓸쓸한 해원에서도 흰빛을
찾아볼 수 있다.
페리나스 해협의 검은 해안에 흰 빛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은, 먹구름
사이로 마치 잘못 찾아든 것 같은 햇살이 내려떨어졌을 때였다.
흰 머릿결의 남자가 해안가 바위 위로 오르고 있었다. 셔츠와 바지의
단순한 차림새고 신발은 신지 않았다. 사내는 맨발로도 익숙하게 바위
들 위를 건너 뛰고 있었다.
높은 바위 위에 선 사내는 열린 바다를 노려보았다. 사내의 발 아래
에서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쏴…루루루룽.
별 특색 없는 사내에게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면 왼쪽 귀 아래에서
입술 근처까지 달리고 있는 흉터가 그것이다. 그 외에는 벗은 맨발이
나 드러난 팔다리 모두 보통 선원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흰 머리카락은 노쇠의 증거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색깔인 듯했다. 사내
는 꿈틀거리는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쏴… 루루루룽.
파도가 다시 솟구쳤다. 그리고 그 파도소리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
려왔다.
"왜왔는가."
목소리는 명확했지만 해안가에는 사내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대신 사내는 파도를 향해 말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리 나와라."
바닷물이 거세게 물러났다.
거꾸로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파도가 벽을 형성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다 밑바닥이 드러났다. 흰 머리의 사내는 드러난 수십 피트
아래의 해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그것'이 누워있었다.
죽음을 죽이는 죽음, 그림자를 감추는 그림자. 하지만 지금은 끔찍한
열기로 이루어진 암흑이었다. 그의 주위의 땅은 이미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고 바다 동물들의 시체와 뼛조각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멋모
르고 다가왔던 물고기들은 채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타죽었을 것이
다. 바다 속에서.
그것은 바다 속에서도 끊임없이 해저를 불태우고 있었고 이곳을 항상
뒤덮고 있는 거친 파도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끓여올리고 있는 물거품
이 이 해원을 요란하게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열기에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일 것이다. 형체에서 일탈하
고 모습을 드러낼 빛조차 가지지 못한 그것은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
온 열기에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구울의 왕자는 해저에 누워 있었다.
파도가 모두 물러나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수증기가 왈칵 피어
올랐다. 4, 50 피트 높이에 있는 백발 사내에게까지 열기가 치솟아올
랐기에 사내는 눈살을 찡그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울의 왕자가 노성을 지른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어둠이 해안을
내리덮었다. 그것을 밤처럼 어둡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눈 밝은 밤새라 하더라도 이런 어둠 속을 비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 어둠 그 자체인 어둠이었다. 그
것은 생명 그 자체를 습격하여 그것을 옭아매는 암흑, 판데모니엄의
암흑이다.
하지만 발도 로네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언짢은 듯이 말했다.
"어둡군."
다시, 쓸쓸한 해변.
구울의 왕자는 여전히 시체처럼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다. 다시금 파
도는 해협을 가로지르며 으르릉거렸고 바람은 그 위를 질주하며 포효
했다. 발도 로네스는 문득 조금 전엔 그런 소리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울의 왕자가 일으킨 암흑은 소리마저도 덮고 있었다.
벽을 이룬 채 구울의 왕자를 둘러싸고 있던 파도 속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내가정확히찾았다는사실이저주스럽군공포를모르는자여."
필마온 기사단장은 무심한 태도로 흐트러진 머릿결을 쓸어올렸다.
"글쎄."
"네놈이나의선택이아니었던들너에게우주그자체를얼어붙게할공포를가
르쳐주었을것이다."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너를 찾아온 것은 아니다, 직스
라드."
"그이름으로나를부르지마!"
구울의 왕자는 눈을 부릅떠 발도 로네스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벽을
이루고 있던 파도는 끓어오를 틈도 없이 수증기가 되어 솟구쳐올랐고
필마온 섬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우르릉거렸다. 먹구름들
이 갑자기 찢어질 듯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름 속에서 뇌전이 번
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천둥이 울려퍼졌다.
꽈르르르-릉!
다시 뇌전의 번득임, 공기가 빠르게 움직였다가 강하게 죄어든다는
느낌, 이윽고 벼락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런
식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하늘과 바다가 흰 화염으로 이었졌다. 다시,
우레, 꽈광쾅쾅쾅! 수십 개나 되는 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자랐
고 망막에 그 모습을 남기자마자 시들어가는 가운데 먼바다에서는 빗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도 로네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면 너도 서 발도라고 불러라. 직스라드."
해저에 드러누운 - 이제는 수증기가 수의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
구울의 왕자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잠시 이어진 침묵은 마치 어이없
어하는 구울의 왕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쏴아아-.
먼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시원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천둥과 번개
는 사그라들었다. 필마온 섬 전체를 흔들었던 진동 때문에 바다가 사
납게 으르릉거리고 있었지만 이곳의 바다는 원래 사납기 때문에 그것
조차 별로 눈길을 잡아둘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발도 로네스는
처음 바위 위에 올라섰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구울의 왕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발도 로네스의 질문은 그가 두려움
이라는 감정과 무관하다는 구울의 왕자의 증언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귀들은 약화된 그들의 지배자를 습격할 것이다. 발도 로
네스는 구울의 왕자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판데모니엄의 마귀
들이 그의 섬으로 찾아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고 생각했다. 발도
로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곳에서는 안전하니 숨겨달라고 한 것은 너였
다."
"안전하다그러나이름은안돼!"
"알았어. 그렇게 알아두지. 프린스."
"찾아온용건을말하고빨리꺼져라나는더쉬어야한다."
"휘리 노이에스의 정벌이 중단되고 있다. 최근 그는 폴라리스에서도
물러났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점령했던 그 휘리와 조그마한 폴라리
스조차 어떻게 못하고 물러난 휘리 사이에는 너무 큰 간격이 있다. 이
것이 네가 말하던 그 기회인가?"
발도 로네스는 비꼬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담담한 어조
로 대답했다. 구울의 왕자는 다시 침묵한 다음 거친 방식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무슨 신호도 없이, 물러났던 파도들이 다시 돌아와 구
울의 왕자를 덮고 드러난 해저를 감추었다.
발도 로네스는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스리우드 선장은 망원경을 불끈 움켜쥐
었다. 이루미나 후작부인은 초조해하는 얼굴로 스리우드 선장과 수평
선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맨눈으로는 라트라인 항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스쿠너를 정확히 식별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루미나는 입을 열
었다.
"스리우드 선장님?"
"라이트버드호입니다. 마님."
"그래요? 어디, 후작님도 보이나요? 예?"
"예. 보입니다."
이루미나 후작부인은 탄성을 질렀다.
"아아! 그럼 안전하신가요? 후작님은 아무 이상 없으세요?"
"아무 일 없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미간을 찡그리며 스리우드 선장을 바라보던 이루미나는 그제서야 선
장이 매우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했다. 스리우드 선장은 마
치 못 볼 것을 본다는 듯한 얼굴로 망원경을 뗐다가 다시 눈에 붙였
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원경을 눈에 붙인 채 그런 동작을
취하자 바라보고 있던 이루미나는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그 때 스리우
드 선장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망원경을 내밀었다.
"저, 직접 보십시오. 도저히 말로는 뭐라 못하겠습니다."
이루미나는 냉큼 망원경을 받아들고는 수평선에 있는 스쿠너를 향해
돌려대었다. 그리곤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리저리 휘두르던 망원경
에 에름 후작의 얼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에름-!"
망원경 속에 떠오른 후작의 얼굴은 일단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기에
이루미나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루미나는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후작은 아
무래도 갑판 위에 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어쩐지
맥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고,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은 뭔
가에 대해 한심스러워하는 듯한 자세이기도 했다. 이루미나는 망원경
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렌즈를 아래로 내리자 이루미나는 후작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액체를 발견했다. 이루미나는 당혹한 얼굴로 망원경의 배율을 조정했
고, 잠시 후 수면에서 솟아오른 물기둥이 후작의 몸을 휘어감고 있는
황당한 광경을 발견했다. 이루미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망원경을 눈
앞에서 치웠다.
그리고 그 때 라트라인의 앞바다에 떠있던 라트랑 군함들에서 비명소
리가 터져나왔다.
"크, 크라켄? 아냐, 바닷물인데?"
"마법이다! 저 마녀가!"
"잠깐! 모두들 닥쳐, 저건- 스팻이다. 살아있는 물이야!"
라트라인의 해안선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라트라인 시민들도
모두 비명과 감탄, 의문성 등 다채로운 소음을 뿜어올렸다. 라이트버
드호는 항구 앞쪽에 전열을 갖추고 있는 선단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고 에름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그 유명한
스쿠너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름 후작은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스팻의 손(그렇지 않으면 발? 아니면 뭐라고 불
러야 할까.)에 의해 사로잡힌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라
이트버드호의 이물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선수에 발을 올린 채
선단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때 키 드레이번이 확성기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라이트버드호와 후작은 정지했다. 군함들에 타고 있던 수병들과 항구
쪽에서 바라보던 시민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속에서 키 드
레이번은 확성기를 입 쪽으로 가져와서는 외쳤다.
"포환이나 화살이 날아오면 에름 후작은 익사한다. 스팻이 그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갈 테니까."
스팻에게 붙잡혀 허공에 들려져있던 후작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어
쨌든 수영을 못해서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팻이 익사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약점이 재확인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는 다시
선단을 향해 외쳤다.
"책임자 나와라."
스리우드 선장은 후작부인에게 짧게 목례한 다음 확성기를 들어올렸
다.
"이루미나호의 선장 스리우드다."
"꽁무니를 따라오던 그 친구군."
"…그렇다, 이 자식아! 그게 네 재주가 좋아서 그랬다는 식으로 말하
지는 마! 이런 전함이 아니었다면 네 녀석이 내게서 그렇게 쉽게 도망
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엉? 게다가 네놈이 타고 있는 배는 3L의 배
였단 말이다! 결국 그 추적이 실패한 것은 네놈의 배와 내 배의 구조
적 차이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잘난 체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갑작스럽게 토해진 불 같은 노성에 라트라인 앞바다가 고요해졌다.
이루미나 후작부인은 황당한 얼굴로 스리우드 선장의 옆얼굴을 바라보
았고 도노반 일항사는 서글픈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는 자신
의 선장을 좀 덜 약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안타깝게도 약올리지 말아
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씩씩거리고 있는 스리우드 선장을 향
해 키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잡담이 너무 길다. 스리우드 선장. 그 옆의 여자는 후작부인인가?"
이루미나 후작부인은 다시 고함을 내지르려는 스리우드 선장에게서
확성기를 나꿔챘다. 그리고는 이루미나호의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며
외쳤다.
"그래요! 후작님은 안전한 거죠,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번은 그 질문에 왼쪽을 흘끔 쳐다보았고 스팻에 붙잡혀있던
에름 후작은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이루미나는 기쁜 마음에 열렬히 손
을 마주 흔들었고, 그래서 하마터면 확성기를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그것을 다시 움켜쥔 이루미나는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말했
다.
"요, 요구 조건이 뭐지요?"
"오스발과의 교환을 원한다."
오스발이라는 이름은 이미 라트랑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키
드레이번의 카밀궁 습격 당시의 이야기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따라
서 라트라인의 시민들과 선단의 수병들은 라트랑 후작과 노예 한 명을
교환하자는, 이 인질범의 요구치고는 퍽이나 검소한(?) 요구에 상당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루미나 후작부인이 대답했을 때 그들은 아예 까무라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 그거 말고 다른 건 안되나요?"
키 드레이번조차도 잠깐 동안 말을 잊은 채 이루미나호를 바라보았
다. 고물 쪽의 뱃전에서 조종 막대를 쥐고 있던 세실은 딸꾹질 비슷한
소리를 내었고 스팻에 의해 허공에 들려져 있던 에름 후작은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러니까- 이루미나. 예, 좋아요. 모름지기 생명이란 그 신분에 상
관없이 모두 소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거라면 난 찬성하겠어요.
그래도 나 역시 특별히 고상한 인간은 못되는지라 좀 서운하기도 하다
는 거 고백해야겠군요-?"
"아니, 이런. 그런 게 아니예요, 에름! 전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 목
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는 거 모르나요?"
"사랑하는 이루미나. 미안해요. 그리고 그런 것을 받을 수는 없지요.
뭔가 불가능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없어요!"
키 드레이번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그는 다시 확성기를 들어올리며
빠르게 물었다.
"무슨 말인가?"
"당신이 레갈루스를 떠났다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유리는 곧장 떠났
어요. 당신이 틀림없이 돌아올 거라고, 그래서 도망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스발은 유리를 따라갔고요."
"어디로!"
"몰라요, 정말 모른다고요. 유리는 나에게 말하지도 않고 떠났어요.
목적지를 말하면 내가 갈등을 겪을까봐,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내가
후작님과 그 애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까봐 아예 말하지도 않고 떠났어
요!"
"배냐, 육지냐?"
"배예요! 배를 타고 갔어요. 스쿠너죠. 서 슈마허와 오스발, 그리고
몇몇 선원들을 고용해서 떠났어요. 하지만 그 애가 카밀카르로 갔는지
페리나스 해협으로 갔는지,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갔는지는 정말 모른다
고요!"
"염병할…"
키 드레이번은 이를 잔뜩 드러낸 채 이루미나호를 노려보았다. 그는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에름 후작을 노려보았고 에름 후작은 그 희번득
거리는 시선에 질려서는 창백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스팻은 여전
히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에름 후작을 묶어두고 있었고 그 물기둥의 표
면 위로 흐르는 물은 마치 에름 후작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땀처럼 보
였다. 키 드레이번은 이를 갈면서 다시 눈 앞에 떠있는 라트랑 선단을
노려보았다.
이루미나호에서는 후작부인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건 뭐든지 드리겠어요. 무엇이든지! 키 드레이번? 키 드레이
번!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키 드레이번?"
"닥쳐."
"그건 에름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유리가 멋대로 떠난 거예요. 저도
그 애가 떠난 후에야 알게 된 거예요! 제발, 키 드레이번. 동정심을,
제발!"
키는 이제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떨구어 수면을 노
려보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
이루미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외쳤지만 키는 라이트버드호의 선수상
이나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키- 드레이버-언? 키… 드레이번…?"
키는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키는 고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버드호는 아무런 바
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병들과 선
장들, 그리고 구경꾼들은 모두 당황한 모습으로 그 불가사의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라이트버드호는 돛대를 중심으로 천천히 반전했고 잠시
후 그 스쿠너는 이물을 먼바다쪽으로, 그리고 고물을 항구쪽으로 향하
게 되었다. 고물을 향해 걸어가던 키는 결국 다시 이루미나를 향해 돌
아온 셈이었고 그 광경을 보던 이루미나는 최면에라도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흥분과 공포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물기둥은 제자리를 지켰기에 에름 후작은 이제 배의 우현쪽에 있게
되었다. 바다속의 스팻이 이런 마법 같은 일을 실현시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작은 그 신비한 광경에 짧게 매혹
되었다. 키는 세실이 쥐고 있던 조종 막대를 받아쥐며 말했다.
"세실, 바람!"
세실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강력한
바람이 라트라인 시내쪽에서 외항쪽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
운 돌퐁에 구경꾼들은 비틀거렸고 부두에 정박해있던 라트랑 군함들도
크게 흔들렸다. 이루미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뱃전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그리고 라이트버드호는 바람을 받아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에름 후작은 제자리에 있었다.
후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이트버드호의 고물을 바라보았다. 키
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뒤돌아보지 않았고 라이트버드호는 빠르게 멀
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스팻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때 키가 다시 일어났다.
키는 세실을 불러 조정막대를 건네주고는 몸을 돌렸다. 짧은 순간 에
름 후작과 키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지만 키는 곧 시선을 내려 그를 붙
잡아놓고 있는 물기둥을 향해 말했다.
"바다의 공주에게로, 가라."
스팻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기둥은 에름 후작을 붙잡은 채 이루미나호를 향해 미끄러져갔다.
이루미나호에서는 그 모습을 보던 후작부인이 기쁨의 비명을 올렸다.
"에름!"
다음 순간 이루미나는 옷을 벗어던지며 뱃전에 뛰어올랐다.
스리우드 선장과 도노반 일항사, 그리고 이루미나호의 수병들 전부가
턱이 쑥 빠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미나는 뱃전을 차며 날아
올랐다.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바다에 뛰어든 이루미나는 잠시 후 물
위로 떠올라서는 맹렬한 속도로 헤엄쳤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물보라
와 함께 아름다운 은빛 꼬리가 번득였다. 이루미나는 눈깜빡할 사이에
에름 후작에게 도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루미나가 놀랄 차례였다.
"에름?"
에름 후작은 수면 위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작 자신도 스스로의 상태에 꽤나 놀랐는지 얼이 빠진 얼굴
로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이루미나?"
"에름!"
이루미나가 먼저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에름 후작은 엉겁결에 마주
손을 내밀었다. 아내와 남편은 곧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자신
들의 그런 모습에 크게 놀랐다. 이루미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에름
후작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당신, 빠지지 않나요?"
에름 후작은 물 속에 '서'있었다. 모습은 그렇게 보였지만 분명히
'떠'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름은 마치 땅 위에 서있는 것처럼 꼿꼿이
서서는 물 속에 떠 있는 그의 아내를 껴안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아
내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고 이루미나의 긴 꼬리는 그의 다리를 살짝
휘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물 속에 서있었고 한
머메이드는 물 속에 떠있었다. 에름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예, 이루미나. 이 스팻이 나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음?"
에름이 먼저 깨달았고, 곧이어 이루미나도 깨달았다. 이루미나는 얼
굴에 홍조를 띄운 채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물 속
에 꼿꼿이 서있을 수 있었던 에름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이루미나
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 에, 에름. 저를-?"
"안을 수 있어요… 바다 속인데… 바다 속에서!"
에름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에름 후작은 이루미나를 확 끌
어당겼다. 그리곤 아내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희열에 차서 외쳤다.
"이루미나! 오, 주여. 이루미나!"
"에름, 에름, 에름!"
이루미나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혼란 속에서 남편의 이름만 되
풀이 부르며 그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에름 후작은 곧 고개
를 돌려 라이트버드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미나도 그를 따라 멀
어져가는 배를 바라보았다.
라이트버드호의 모습은 이미 꽤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그 고물에 서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사내와 여마법사를
볼 수 있었다. 항구쪽에서는 멀어지는 제국의 공적을 추적하기 위해
군함들이 돛을 펼친다, 닻을 끌어올린다 하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지
만 에름 후작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목
소리만이 귀 안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공주에게 돌려주겠다.'
그 때 키 드레이번이 다시 몸을 돌렸다.
키는 돛대를 향해 걸어갔고 그 자리엔 이제 세실만이 남게 되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세실은 부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세실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그것을 힘차게 흔들었다.
에름 후작은 오른팔로 그의 아내를 껴안은 채 왼팔을 들어올렸다. 물
론 빠지지 않았고, 그런 자신에 다시 희열을 느끼며 에름 후작은 왼팔
을 힘껏 흔들었다. 그의 팔을 따라 물방울이 크게 비산했다. 세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에름 후작과 이루미나는 그것이 바람
소리거나 갈매기 울음소리였는지 확신할 수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에도 라이트버드호는 하늘과 바다의 틈 사이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3년간의 길고 긴 결혼식이 마침내 끝나고 에름과 이루미나는
부부가 되었다. 항구에 선 무수한 구경꾼들이 보내는 박수 소리와 환
호, 그리고 파도소리가 그들의 결혼행진곡이 되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