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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하나로 평가 하기는 어렵다.
그 중에 비석은 중간의 삶보다는 백성을 지키고 권력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시기에
관련 된 것이다.
그 비석은 백성의 고혈이지만 대부분 그렇지는 않다.
청백리에 오른 이도 선정비도 있으며, 영의정에 오른 이도 선정비도 있다.
그 중에 필자와 관계되는 경주이씨 불망비를 찾아보고 글을 써본다.
이광좌 불망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소론 완론[3]에 속했던 인물이다.[4]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현손이다.
2. 생애[편집]
1694년 문과에 장원[5]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정언, 지평, 교리, 이조좌랑등 삼사를 역임하고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나 숙종이 소론을 내친 병신처분으로 망했어요 노론의 편을 드는 것을 반대하자 파직된다.
경종이 즉위한 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경종 초기에는 노론의 세력이 강력해 경종은 노론의 뜻대로 하는 듯 연기하다가 환국을 일으켜 노론 4대신(이이명, 조태채,[6] 이건명, 김창집)을 사사하고 노론의 세력을 꺾었다. 그는 경종이 노론의 세력을 약하게 하는데 조태구, 조태억, 류봉휘, 최석항 등과 세제대리청정을 반대하였다. 노론이 쫒겨나는 신축환국이후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병조와 이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영조 즉위 직후 영의정에 올랐지만 이듬해 신임옥사의 책임을 묻는 노론의 공격으로 파직당한다.[7][8]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미환국을 단행하자 영의정이 되고 노론은 힘이 약해진다. 얼마 후 소론 준론과 남인이 난을 일으키자 침착하게 난의 중심 인물을 체포하고 진압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9]에 책록되었으며, 동시에 두 달 동안[10] 영조를 보좌하여 대리집정을 맡았다.
탕평책의 신봉자였으나 당시 노론 영수인 민진원과 정호가 노론 역사상 송시열 이후로 최고의 강경파인지라 노론들에게 광좌놈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영조가 직접 노론 신하들을 불러서 대신에게 무엄하게 무슨 짓이냐라고 야단을 쳐도 노론 신하들은 우리 집안에서는 어린애들도 광좌나 광좌놈이라고 부른다라고 지지않고 맞섰다.
다른 소론 대신들이 영조에게 납작 업드린 상황에서도 삼수의 옥은 역적이 맞다고 강변하였고 덕분에 노론의 공적 1호가 되어 무수한 탄핵을 받았다. 4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나 사직하여 시골로 내려간 기간이 더 길었다.
1740년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영조는 숙종의 사당을 찾아 비를 맞으면서 "신하 놈들이 탕평을 하래도 안하고 깽판치니 내가 못난 탓이다! 왕 안해!"라고 선포하자 신하들이 또 우리들이 당파 싸움이나 하면 우릴 벌하소서!라고 울고불며 말린 다음날로 상대적 강경파였던 이광좌의 죽음으로 조정은 그나마 좀 조용해진다. 하지만 영조 31년의 나주 괘서 사건으로 벼슬이 추탈된다. 정후겸의 요청으로 복권되었지만 정조 즉위후 또 추탈되었고 순종 때 다시 복권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출처 나무위키
이형좌
이형좌(李衡佐)
공의 자는 경윤(景尹) 호는 초천(椒泉)이다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嶺議政) 오성부원군(鰲成府原君) 백사문충공(白沙文忠公)
諱 항복(恒福)의 高孫이요
예빈시 정(禮賓時 正) 증 이조판서공(贈 吏曺判書公)
諱 정남(正男)의 曾孫이요
이조참판(吏曺參判) 증 의정부 좌찬성공(贈 議政府 左贊成公)
諱 시술(時術)의 孫子요
공조참판(工曺參판) 증 영의정(贈 嶺議政) 구천공(龜川公)
諱 세필(世弼)과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반남박씨(潘南朴氏)의 三男이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 左議政) 증 영의정(贈 嶺議政) 아곡공(鵝谷公)
諱 태좌(泰佐)의 同生이다
顯宗 武申年에 나시어 사마시 급제 하시어 우도관찰사(우道觀察史) 하시고
참판(參判)이 되시어 英祖 丙寅年에 下世 하시니 享年 79世라
公의 初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성평윤씨(城平尹氏)
이태좌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이며, 이정남(李井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시술(李時術)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세필(李世弼)이며, 어머니는 박세모(朴世模)의 딸이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재종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에 올랐다. 이 해 8월 새 예문관원으로 송정명(宋正明) 등 4인을 천거하자 김진구(金鎭龜)가 난색을 나타내 이들의 처리 문제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은 과거 송정명 등이 성균관에 있을 때 윤증(尹拯)의 소환을 청한 상소에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701년 지평으로서 이세석(李世奭)의 과거시험 부정을 탄핵했으나 왕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의 사사에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崔錫鼎)·이명세(李命世)를 신구하다가 도리어 삭탈관직되어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에 등용되고, 사서·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2월에는 문학으로서 필선 유태명(柳泰明)과 함께 경상좌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어 부교리·이조정랑·부수찬·집의·응교를 거쳐 1708년 12월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영서 3읍(춘천·횡성·홍천)과 영동 9읍에 대한 양전 개변을 실시해 원전대동(元田大同) 2두(斗)를 감해 1결(結) 1년 소납(所納)을 14두로 정하고, 속전대동(續田大同)·삼수량(三手粮)을 모두 감하도록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이듬 해 7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대사성·대사간·승지·강화유수를 역임하고, 1716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윤선거(尹宣擧) 문제를 논하다가 노론 일색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 강화부유수에 재임되고, 동지의금부사, 형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북방 소요에 대한 국력 강화책으로 공조판서 조태억(趙泰億)의 내수외양(內修外壤)을 공박하고, 자강지도(自强之道)로서 오로지 왕의 일심노력과 억사절재(抑奢節財: 사치를 줄이고 재물을 절약함)·근정수덕(勤政修德)·인재양성·민심단결 것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조세·한재·조창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로 삭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호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병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쳤다. 그리고 이듬 해 우의정, 1729년 좌의정·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1736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적의
이적의(李適意)
1652년(효종 3)∼1725년(영조 1).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이달(以達)이고, 호는 송사(松沙)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주(榮州) 장수면(長壽面)이다.
증조부는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조부는 이휘음(李徽音)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회양진병마첨절제사(淮陽鎭兵馬僉節制使) 이숭언(李崇彦)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이상백(李尙白)이고, 부인은 오경기(吳慶基)의 딸 고창오씨(高敞吳氏)이다.
형으로 이달의(李達意)‧이원의(李遠意)‧이수의(李遂意)‧이술의(李述意)가 있고, 동생으로 이첨의(李添意)가 있다. 서형으로 이철의(李哲意)가 있다. 부인은 오경기(吳慶基)의 딸 고창오씨(高敞吳氏)이다.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으로 집안 어른들로부터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등을 익혔다.
1682년(숙종 8) 임술 증광시에 생원 2등 20위로 합격하였고, 1690년(숙종 16) 경오 식년시 문과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직장(直長)‧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무장현감(茂長縣監)‧자인현감(慈人縣監)‧고산찰방(高山察訪) 등을 역임하였는데, 자인현감 시절 백성들을 아끼고 교화하는 데 힘쓴 공덕으로 고을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품계는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현재 유고로 『송사집(松沙集)』이 전한다고하나,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인조반정 공신인 이수일(李守一)이며, 어머니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귀년(李貴年)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한 뒤 당시 인조반정 공신의 한 사람으로서 군사권을 장악하던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처음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이듬해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해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는데,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해 복병을 이용해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옮기고, 이듬 해 7월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내직인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문신들의 반대가 많았다.
1640년 황해병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대장(舟師大將) 임경업(林慶業)의 부장(副將)으로 명나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명장에게 알려 종일토록 서로 싸웠으나 양쪽에 사상자가 나지 않았다 한다.
이듬해 8월에 돌아왔으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1643년 4월 양주목사로 부임했다가 5월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에 임명되어 수도 외곽의 방어에 전력하였다.
그 뒤 공청도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로 부임했으나 내상을 당해 칩거하였다. 인조 말년에 다시 어영대장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효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650년에 우포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형조와의 알력으로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옮겼다가 다시 호군(護軍)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한편 한성우윤으로 재직할 당시,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종이 금리(禁吏)를 구타한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효종은 그 해 8월 오히려 어영대장으로 기용하고 12월에는 김자점의 모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포도대장을 겸하게 하였다.
효종은 인조 때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대청강경책을 표방하면서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추진하던 때이므로 이완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으로 임명한 것 같다.
이에 어영군의 분번숙위제(分番宿衛制)를 확립하고 보인체제(保人體制)를 확립해 어영청이 군영의 체모를 갖추게 했으며, 안산(安山) 덕물도(德勿島)를 개간해 둔전을 두고 강화도의 문호 방비에 진력하였다. 이듬해 11월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653년(효종 4) 11월 종래 훈척(勳戚)으로만 임명되던 훈련대장이 되어, 현종 때까지 근 16년 동안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도 훈련대장만은 겸하였다.
즉, 이듬해 7월에는 한성판윤, 1654년에는 공조판서로 승진해 한 때 천안군수 서변(徐忭)의 무고로 모역죄를 뒤집어쓸 뻔했으나, 그 해 7월 형조판서로 옮겨 앉는 등 판윤·판서 등의 문관직에 있으면서도 대개 효종대는 훈련대장직을 겸했던 것 같다. 1659년 4월 효종이 죽었을 때에도 한성판윤이면서 훈련대장으로 도감병을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였다.
또한, 효종의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해 신무기 제조, 성곽 개수 및 신축 등으로 전쟁에 필요한 여러 대책을 강구하고 특히 포대(布袋) 사용을 주장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즉 당시 효종은 우리 군사들이 투구와 갑주가 없어 갑자기 적을 만나면 시석(矢石)을 막기 어려우므로 목순(木楯: 나무로 만든 방패)을 쓰자고 제안하였다. 이 때 이완은 목순은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군사들이 큰 포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여기에다 흙을 담아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주장한 것이다.
현종 때에는 군비 축소를 단행해 북벌 의지가 좌절되었으나, 판윤, 공조·형조의 판서로 중용되면서 훈련대장만은 겸했으며 때로 포도대장까지도 겸하였다.
1666년(현종 7) 8월에는 판의금(判義禁)에 올랐고, 그 해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고 또한 병조와 훈련도감을 겸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당시 사관은 이러한 사실을 “사존사영(辭尊謝榮)하기란 옛 사람도 어려운데 무부(武夫)로서 능히 판단하였다. 권력을 탐하고 자격이 없으면서도 좋은 자리로 나가려고 하는 문사(文士)들을 어떻게 보았겠는가?”라고 기록하였다.
그 뒤에도 두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가지 않고 훈련대장으로만 있었다. 1667년 정월 급료병으로 편제된 훈련도감을 없애고 어영군과 같이 호(戶)·보(保)로 된 군영을 신설하려는 논의가 있자, 완강히 반대해 훈련별대(訓練別隊: 금위영의 전신)의 설치에 그치고 훈련도감의 폐지는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 일각에서 강화도의 수군을 폐지하자는 의논이 있을 때에도 실계(失計)라고 해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해 3월에는 왕이 온양에 가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도성을 지켰으나 성기(省記: 궁성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 문제로 병조와 다투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다시 포도대장으로 복귀하고, 뒤에 판윤·형조판서·병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다고 번번이 벼슬을 사양하였다. 1671년 5월에 수어사(守禦使), 1674년 5월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 6월 군역 변통에 대한 유소(遺疏)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 이수일과 마찬가지로 무장으로서 입신해 효종 및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에 집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성품은 최명길의 말과 같이 강직하고 깨끗하며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어 매사에 시시비비가 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이 옳다고 생각할 때에는 국왕 앞에 병부를 풀어놓고 대들었으며 공사가 분명하였다. 반면, 매사에 신중한 일면도 있었으니 군교(軍校)나 서리들이 자기에게 품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동료와 같이 와서 의논하게 하여 남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했다 한다. 1685년(숙종 11) 8월 정익(貞翼)의 시호가 내려졌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수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주부(主簿) 이오(李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자침(李自琛)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이난(李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이완(李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 · 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다음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 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 · 원유제조(園囿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인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하숙(夏叔). 우의정 이완(李浣)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효종 초에 현감·도총부경력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 어영대장, 1656년 충청도수군절도사, 1660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과오를 범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되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덕원에서 거제도로 이배되던 송시열(宋時烈)을 중로에서 대접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삭출당하였다. 1680년 송시열이 풀려나자 다시 등용되어 1682년 병조참판, 이듬해 총융사에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석방, 복직되었다.--한국민족대백과 사전
이유원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쇄국 정책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과 반목·대립하였고, 김홍집 등과 함께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814년 조선에서 태어났다. 영의정 이항복의 9대손, 이조판서 이계조의 아들이다. 헌종 7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유원은 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에서 승정원등을 거치다가 고종때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곧 좌의정이 되었다. 1873년, 이유원은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 시절, 호조참판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추진하였다. 1875년, 주청사로 청나라로 갔다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유원은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없지 않다고 고종에게 고하였고, 이로 인해 수구파의 큰 반발을 얻었다. 1881년 만언척사소로 인해 사직하였다. 1882년에는 전권대신으로서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본래 이유원은 이수영이라는 외아들이 있었으는데 모 판서의 딸과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악성 종기로 인해 후사없이 죽고 말았다. 이에 같은 문중의 판서 이주영의 둘째 아들을 죽은 이수영의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온 양자는 효심이 깊어 이수영의 부인, 즉 양어머니의 잠자리 시중을 들곤 했는데 서로 또래이다 보니 결국 연애로 변해 불륜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륜사실을 이유원에게 고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놀란 이유원은 은밀히 상소를 올려 과부며느리와 그 양아들을 가문에서 끊어버렸고, 이유승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그가 이석영이다.[2]
당대 어마어마한 갑부로,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인 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3] 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양자 이석영은 이를 처분하여 형제들인 이회영, 이시영 등과 함께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나무위키
이만령
울산에 있는 경기참봉을 지낸 불망비
울산 태화강에 홍교를 세웠고 울산객사를 짔는데 많은 돈을 내었다.
빠진 인물도 있지만 이형좌의 비가 제일 많이 남았다.
앞으로 더 조사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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