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2인3각’으로
누가복음 9:57-6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 색동가족수양회 현장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 아침에 부지런히 주일예배에 참석하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한다. 오늘은 더욱 가족예배답다.
이번에 겨우 1박 2일 수양회인데 마치 이사하듯, 엑소더스하듯 우리가 함께 하였다. 이 정도 준비성과 기동력이면 다음에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두산도 두렵지 않다.
성경은 한결같은 걸음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쥐고 걷듯이 천천히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한걸음씩,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한걸음씩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1)
성경의 무대는 대부분 길을 배경으로 한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한 개척자들의 발걸음을 소개한다. 광야는 해방의 길이며 동시에 고난의 길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셨다. 사도행전 역시 바울의 다메섹으로 가는 길과 세계 선교여행 그리고 로마로 가는 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인생은 예외 없이 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표지판에 따라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푯대를 향해 나아간다. 요즘 CBS에서 제작해 홍보하는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존 번연)은 바로 ‘하늘가는 길’을 주제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순례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평생 정지된 삶을 사는 붙박이 인생은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순간순간 선택하고, 나날이 변화하며, 자의든 타의든 동행하게 마련이다. 누구나 고유한 속도가 있고, 색깔이 있다. 흔히 인생을 ‘길’로 표현한다. ‘인생은 나그네 길’, ‘학문의 길’, ‘믿음의 길’, ‘행복의 길’, 어떤 경우든 길을 붙여도 잘 어울린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는 당사자이다. 그런데 아무도 목적지를 자신 있게 이야기 하지 못한다. 인생의 길은 그만큼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또 저 마다 자신의 길은 항상 유별난 길이라고 여긴다.
2)
우리는 인생의 길에서 예수님의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걷는다. 특히 수많은 교회들과 뭇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색동가족공동체 안에서 함께 ‘즐함우함’(롬 12:15) 사이가 되었으니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가? 스치면 인연이고, 스미면 사랑이라더니, 우리는 한번 뿐인 인생에서 한 길을 가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길에 초대하신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스스로 자청하거나, 예수님이 초대할 때에 단서를 달거나, 자청하면서 단서를 단다. 여기에서 세 가지 경우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특별히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첫 번째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그는 자원한 경우이다. 스스로 따르겠다고 자원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따른다고 결단했다면, 그것에 뒤따르는 희생을 염두에 두라고 하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특별한 복(병 낫는다, 부자 된다, 아들 낳는다)을 약속하기는커녕, 오히려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는 자,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두 번째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59).
이번에 예수님은 먼저 초대하신다. 그런데 초대받은 그는 따르기는 하겠지만 단서를 단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사실 예수님의 초대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모든 일이 때가 있는 법인데, 개인 볼 일 다 볼 여유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은 만사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 순간을 놓치고 말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자비하게 들린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초대받은 그는 예수님을 따를 의사와 의지가 충분하다. 주님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그럴 기색도 없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은 만의 하나에 속하는 그런 단서들(은퇴 후에, 아들딸 혼인시키고 난 후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신다.
‘너는 젊고 아직 기회는 많다’는 말은 사탄의 목소리를 닮았다. 사실 즉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점점 행동하기 어렵게 된다. 감정이 행동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61).
세 번째 경우는 앞의 두 경우를 합한 것이다. 첫 사람처럼 먼저 따르겠다고 하면서 두 번째 사람처럼 단서를 단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이 경우 예수님의 충고는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쟁기질을 가는 사람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밭이랑이 곧게 갈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연습없이 자동차 후진은 항상 어렵다.
생각이 과거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뒤를 돌아보고 아름답던 지난날을 부럽게 생각하며 걸어간다. 과거라는 것은 인간의 ‘흐린 기억력, 선택적 회고’ 때문에 많이 미화된다. 성경에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속담은 인류의 고전적 격언이 되었다.
위 세 가지 경우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장 직업을 바꾸고, 남편을 버리고, 집을 떠나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출가’(出家)해야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고유한 삶, 가족,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만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집착하는 사람, 매사에 만일의 경우를 따지면서 앞가림하는 사람, 미적지근한 태도로 오락가락하는 그런 사람에게 전심을 다해야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일깨워 주신다.
결국 결단할 사람은 나다. 인생에서 가장 큰 고독은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기도해야 하고, 내가 판단해야 하고, 내가 결단할 일이다.
3)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하나로 쏠려있다. 늘 사분오열 상태처럼 보여도 적어도 일본문제에 있어서는 한 마음이 된다. 아베 일본 총리는 분열된 우리 민족을 모처럼 하나로 묶어주었다. 국민들은 어린 아이건, 나이든 분이건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일본 여행을 포기하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참여하는 일은 각각 결단이 필요하다.
작가 앤소니 도어가 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있다.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런 시대에도 짙은 구름을 뚫고 새어나오는 햇빛처럼 세상을 비추던 이들이 있었음을 증언한 이야기이다.
나치의 점령지였던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에 할머니 레지스탕스가 있었다. 그들은 늙었지만 자기들만이 할 수 있는 저항운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도로 표지판 바꾸어 놓기, 중요한 편지 빼돌리기, 독일군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 선물하기, 5프랑 지폐에 프랑스를 당장 해방하라고 쓰기 등’이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할머니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은 공포심에 질려있던 사람들에게 숨구멍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어둠 속에 비친 빛이다. 함께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요절한 김소진이란 소설가가 있다. 그가 쓴 단편소설 ‘마라토너’는 한 노장 마라토너 이야기이다. 이미 나이가 든 그는 마라토너로서는 우승할 욕심은 없다. 다만 팀에서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승권에 있는 히어로 선수가 잘 달릴 수 있도록 함께 달려주는 일이다. 초반에 노련한 보조로 이끌기도 하고, 상대 외국선수를 견제하기도 한다. 정작 본인은 완주를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다.
그런 선수를 ‘페이스 메이커’라고 한다. 늙은 마라토너는 자신이 페이스 메이커로서 역할을 잘 알고 있으며, 스스로 그렇게 부른다. 페이스 메이커는 쉬운 말로 ‘바람잡이’다. 내게도 페이스 메이커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생을 더 재미있게 살려면 바람잡이가 필요하다. 아내든 남편이든, 친구든, 일터의 동료든, 신앙의 벗이든 그런 존재가 있어야 인생이 즐겁고, 건강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결심한다. 운동을 해야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밥을 조금 먹어야지, 등산을 해야지, 성경을 읽어야지 등 그런데 실천을 못하는 것은 그 때마다 필요한 페이스 메이커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늘 내 곁에 내 삶을 리드 해주고, 코치하고, 멘토가 되어 준다면 내 인생은 한결 수월할 텐데 싶다.
언제까지 나와 함께 달려 주는 사람이 있으면 어떠한 곤경도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부모님이 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시듯, 우리는 기꺼이 내 자녀의 인생길에 페이스 메이커가 될 수 있다. 누군가 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사실 예수님은 내게 특별한 것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나를 따르라고, 내 곁에 머물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 삶의 길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할 때에 나와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나와 동행하면서 기꺼이 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신다. 주님과 ‘2인3각’으로 걷는 일이다. 누가 보조를 맞추어야 하겠는가?
예수님은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길은 곧 진리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은 매번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신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서 상수리 나무아래 쉬고 있을 때나, 유혹의 함정에 빠져 주저 앉아있을 때나 그리고 엉뚱한 반대방향인 엠마오나 여리고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 주신다.
그리고 격려하시고, 등을 두드려주시며, 밥을 나누신다. 우리가 서로에게 페이스 메이커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고, 함께 근심하고, 함께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함께 마음을 모은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싶다.
이제 우리도 그분이 우리의 길에 동반자이심을 깨닫자.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참된 신앙의 길을 힘차게 걷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