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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율기(律己) 제5조 절용(節用)
3. 의복과 음식은 검소함을 법식으로 삼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법식을 넘어서면 지출에 절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의복은 수수하고 검소하게 입도록 힘써야 한다.
아침저녁의 밥상은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치〔虀〕 한 접시, 장 한 접시 - 제(虀)란 침채(沈菜)요, 장(醬)이란 시청(豉淸)이다. - 이 네 접시로 한해야 한다. 네 접시란 옛날의 이른바 이두(二豆)ㆍ이변(二籩)이다. 곧 구운 고기 한 접시, 어포(魚脯) 고기 한 접시, 절인 나물 한 접시, 육장(肉醬) 한 접시이니 여기에서 더해서는 안 된다.
요즈음 관장(官長)들은 모든 일에는 체면을 세우지 못하면서 오직 음식에 있어서만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여 옛 법을 따른다고 일컬으며 크고 작은 두 개의 반상에 홍반(紅飯) - 적두(赤豆)(주1)로 물들인 것이 홍반(紅飯)이 된다. - 과 백반(白飯)을 함께 차려 놓고, 내외의 두 군데 반찬은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갖추어 차려놓고서 - 내사(內舍)나 외주(外廚)에 각각 성찬(盛饌)을 내놓는다. - 관장의 체면은 본디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남은 것은 노복과 기녀들에게 돌아간다.
내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변변찮은 음식일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벼슬자리만 차지하고 녹만 받아먹는 것임을 모르고, 제 직책은 힘쓰지 않고 먹을 것만 찾으니 어찌 우습지 않은가.
경비를 남용하면 재정이 딸리게 되고 재정이 딸리면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게 된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노복과 기녀 뿐이라 소만 보고 양은 잊어버린 셈이다.〔見牛而忘羊〕(주2) 백성에게서 약탈해다가 기생들을 살찌게 하니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처음 도임했을 때는 어리석은 기개를 마음껏 부리다가 몇 달이 못 가서 처음처럼 계속하지 못하고 점차 박하게 줄이는 자가 많다. 그렇게 되면 아전과 백성들이 그 일정하지 못함을 서로 비웃을 것이니 수령 역시 부끄러운 빛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진서산(眞西山)(주3)이 채(菜)를 논하기를, “백성은 하루라도 채색(菜色)을 띠어서는 안 되고 사대부(士大夫)는 하루라도 채미(菜味)를 몰라서는 안 된다.(주4)” 하였다.
정선(鄭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성이 채색(菜色)을 띠게 됨은 바로 사대부가 채미(菜味)를 모르는 데서 연유한다. 만약 말직(末職)에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직분의 소재를 알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채색을 걱정하랴.”
후한(後漢)의 유우(劉虞)(주5)가 유주 자사(幽州刺史)로 있을 적에 해진 옷에 미투리를 신고 식사에는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후한의 범단(范丹)(주6)은 자가 사운(史雲)이었는데, 내무(萊蕪)의 수령으로 있었다. 백성들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시루 속에 먼지 나는 범 사운이요, / 증중생진범사운甑中生塵范史雲
가마 속에 물고기 사는 범 내무로다 / 부중생어범내무釜中生魚范萊蕪
송(宋)나라 하수(何須)(주7)가 안한령(安漢令)으로 있다가 거관(去官)(주8)하게 되었다. 그때 파(巴) 지방에 기근(饑饉)이 들었다. 아전을 보내어 백성들의 토란을 가져다가 자급(自給)하고는 실〔線〕을 그 자리에 걸어 두어 그 값을 보상하였다.
제(齊)나라 유회위(劉懷慰)(주9)가 제군 태수(齊郡太守)로 있었는데 햅쌀 한 곡(斛)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유회위는 보리밥을 그 사람에게 보이면서, “식생활이 넉넉하니 이런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후주(後周)(주10) 배협(裵俠)이 하북 군수(河北郡守)로 있을 적에 몸소 검소하게 처신하고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콩ㆍ보리ㆍ소금ㆍ나물뿐이었다. 배협이 한번은 여러 수령들과 주 문제(周文帝)를 알현하였는데, 문제는 배협을 따로 세워놓고 여러 수령들에게, “배협은 청렴하고 곧기가 천하에 제일이다. 여러 사람 중에 배협과 같은 자가 있으면 그와 함께 나란히 서라.” 하니, 여러 사람은 모두 아무 말 못 하였고, 배협을 가리켜 독립사군(獨立使君)이라 불렀다.
당나라 풍원숙(馮元淑)(주11)은 시평현(始平縣)의 수령을 지냈는데 그가 타는 말에는 꼴과 콩을 주지 않고, 재마(齋馬)(주12)로 만들게 하였다.
동사의(董士毅)는 촉주 태수(蜀州太守)로 있은 지 십수 년 동안 겨우 베 도포 한 벌에 가죽신 한 켤레로 지냈다.
서창령(瑞昌令)(주13) 유공인(劉公仁)(주14)이 고안령(高安令) 엄모(嚴某)와 함께 대궐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謁見)하였다. 그때에 양부(楊溥)(주15)가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을 시켜 몰래 그들의 행적을 엿보아오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복명하기를, “엄(嚴)은 부귀를 누리는 것이 그 관직에 알맞고, 유(劉)는 짚자리, 무명이불, 옹기 그릇에 매연(煤煙) 낀 부엌 등이 그대로 가난뱅이였습니다.” 하였다. 양부는 마음속에 기억해 두었다. 엄이 먼저 와서 보는데 금과 비단을 예물로 바쳤으나 양부는 이를 물리쳤으며, 뒤이어 유공인이 들어와 보는데, 차 한 푸대와 꿀 한 단지의 예물이었지만 양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뒤에 그를 발탁하여 어사(御史)로 삼았다.
헌예(軒輗)(주16)는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로 있을 적에 봉급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사철을 단벌의 푸른 베 도포로 지내면서 찢어지면 기워 입었고 나물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동료들과 사흘 만에 쌀로 고기 한 근을 바꾸어먹기로 약속하였는데, 요속(僚屬)들도 견디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그 이튿날 떠났는데 소속 하관(下官)들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어염운사(魚鹽運使)가 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크게 떨쳤다. 일찍이 강가에 앉아 있었더니 한 동자(童子)가, “물의 맑음이 사군(使君)의 맑음만 못하다.” 하였다.
첨사(僉事)(주17) 왕기(王奇)(주18)는 벼슬에 있을 때 청백해서 옷이 해어지면 종이로 그것을 기웠다.
왕서(王恕)(주19)가 운남(雲南)을 순무(巡撫)할 때 동복(童僕)을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행조(行竈)(주20) 하나, 죽식라(竹食籮)(주21) 하나, 하루에 유두(乳豆) - 유두란 두부(豆腐)이다. - 한 모, 채소와 장ㆍ초만 가지고 갈 뿐이고 물은 주인집에서 얻어 썼다.
방극근(方克勤)(주22)은 순리(循吏)였다. 생활이 간소하여 베 도포 하나로 10년을 지내면서도 바꾸지 않았고, 하루에 고기를 두 번 먹지 않았다.
요희득(姚希得)(주23)이 정강(靜江)을 맡아 다스렸는데 전에는 관청의 장막을 비단으로 만들었다. 요희득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서생(書生)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런 비단을 쓰겠는가.” 하고 포목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날마다 채소만 먹었다.
고려 기건(奇虔)(주24)이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가 되었는데 성격이 고집이 있고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제주에서는 전복이 생산되었는데, 백성들은 전복을 채취하는 것을 매우 괴로워하였다. 기건은, “백성들이 이처럼 괴로워하는데 내가 차마 먹겠는가.” 하고 드디어 먹지 않으니, 사람마다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정 충정공(丁忠靖公)(주25) - 이름은 응두(應斗) - 이 7도(道)의 감사(監司)를 지내고 평안감사에 재임(再任)되었는데, 관내를 순시할 적에 화문석(花紋席)에 앉는 일이 없었으니, 복(福)을 아끼고 검소를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감사 정옥(鄭玉)(주26)은 약포 상공(藥圃相公)(주27)의 후손이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읍을 순행할 때에 반찬은 두 접시만을 차리게 하였고,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었다.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주28) 보니 한 고을의 수령이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내외(內外)(주29)의 두 상을 차리게 하였는데, 그가 떠나게 되어서는 가하전(加下錢)(주30)이 40만 전이나 되어 수리(首吏)가 파산하게 되었다.
유정원(柳正源)(주31)이 여러 번 군현의 수령을 지냈는데 매양 그만두고 돌아올 때는 채찍 하나로 길을 나섰고 의복과 기용(器用)도 늘지 않았다. 자인(慈仁)에서 휴가로 돌아와 집에 있는데, 현아(縣衙)에 있던 자제들이 쓰던 헌 농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되 속이 비면 쉽게 찌그러질까 염려하여 그 안을 짚으로 채웠다. 동네 부녀자들은 그것이 관(官)에서 온 것이라 하여 다투어 모여서 보았는데, 농짝 속에 든 것이 짚단임을 알고는 모두 한바탕 웃고 갔다. - 《대산집(大山集)(주32)》에 보인다. -
[역주]
[주-D001] 적두(赤豆) : 붉은 팥.
[주-D002] 소만 …… 셈이다〔見牛而忘羊〕 :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에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하였다.〔見牛未見羊〕”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인데, 즉 눈앞에 보이는 종이나 기생만 알고 백성은 모른다는 뜻이다.
[주-D003] 진서산(眞西山) : 송(宋)나라 영종(寧宗)ㆍ이종(理宗) 때의 사람으로 이름은 덕수(德秀), 자는 경원(景元), 뒤에 경희(景希)로 고쳤다. 호가 서산(西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학문은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았다. 저서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ㆍ《당서고의(唐書考疑)》ㆍ《독서기(讀書記)》ㆍ《문장정종(文章正宗)》ㆍ《서산갑을고(西山甲乙稿)》ㆍ《서산집(西山集)》ㆍ《서산집찬(西山集纂)》 등이 있다. 《宋史 卷437 儒林列傳 眞德秀》 《宋元學案 卷81 西山眞氏學案 詹氏門人 眞德秀》
[주-D004] 백성은 …… 된다 : 백성은 하루라도 채색(菜色) 즉, 굶주린 기색이 있어서는 안 되고 사대부는 채미(菜味) 즉, 나물맛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주-D005] 유우(劉虞) : 후한(後漢) 영제(靈帝)ㆍ헌제(獻帝) 때 사람으로 자는 백안(伯安)이다. 벼슬은 유주 자사(幽州刺史)를 지냈는데 민심을 얻어서 황건적(黄巾賊)을 피해 모여 든 백성이 백여 만이었다. 유주 자사로 있으면서 태위(太尉)가 되었고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後漢書 卷73 劉虞列傳》
[주-D006] 범단(范丹) : 후한(後漢) 환제(桓帝)ㆍ영제(靈帝) 때 사람이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범염(范冉)으로 되어 있다. 자는 사운(史雲)이다. 환제(桓帝) 때 내무(萊蕪)의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시어사(侍御史)로 삼으려 하자, 은둔해 버리고 점을 쳐서 먹고살았다. 당고(黨錮)의 화로 유리(流離)하면서 끼니거리가 없어도 태연자약하였다. 아래 기사는 유리할 때 여리(閭里)에서 그를 찬양한 노래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冉》
[주-D007] 하수(何須) : 미상이다.
[주-D008] 거관(去官) : 전직을 버리고 다른 관직으로 임용되는 것이다.
[주-D009] 유회위(劉懷慰) : 남제 무제(南齊武帝) 때 사람으로 본명은 문위(聞慰), 자는 언태(彥泰)이다. 벼슬은 보국장군(輔國將軍)ㆍ제군 태수(齊郡太守) 등을 지냈다. 《염리론(廉吏論)》ㆍ《황덕론(皇德論)》을 지었다. 원문의 ‘劉懷惠’는 ‘劉懷慰’의 잘못이므로 《남제서(南齊書)》에 의해 고쳤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劉懷慰》
[주-D010] 후주(後周) : 남북조(南北朝) 때 북조(北朝)의 국명이다. 우문태(宇文泰)가 세웠는데 북주(北周)라고도 한다. 556~581. 6대 26년.
[주-D011] 풍원숙(馮元淑) : 원문의 마원숙(馬元叔)은 《구당서(舊唐書)》 〈양리열전(良吏列傳)〉에 의하여 ‘馮元淑’으로 바로잡았다. 풍원숙은 청장령(淸漳令)ㆍ준의현령(浚儀縣令)ㆍ시평현령(始平縣令) 등을 지냈는데 자신이 타는 말에게 오후에는 꼴을 주지 않고 자신은 매일 한 끼씩을 먹어서 그 남은 것으로 빈민을 구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주-D012] 재마(齋馬) : 조용하게 서 있는 말이다.
[주-D013] 서창령(瑞昌令) : 서창은 현(縣) 이름이다. 영(令)은 현의 장관으로 1만 호 이상은 영(令), 1만 호 이하는 장(長)이라 하였다.
[주-D014] 유공인(劉公仁) : 미상이다.
[주-D015] 양부(楊溥) : 명(明)나라 성조(成祖)ㆍ인종(仁宗)ㆍ선종(宣宗)ㆍ영종(英宗) 때 사람으로 자는 홍제(弘濟),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벼슬은 한림학사(翰林學士)ㆍ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내고 내각(內閣)에 들어가 기무(機務)를 장악하여, 양사기(楊士奇)ㆍ양영(楊榮)과 함께 삼양(三楊)으로 불리었다. 《明史 卷148 楊溥列傳》
[주-D016] 헌예(軒輗) : 명(明)나라 성조(成祖)ㆍ선종(宣宗)ㆍ영종(英宗) 때 사람으로 자는 유행(惟行)이다. 벼슬은 절강안찰사(浙江按察使)ㆍ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ㆍ형부 상서(刑部尙書)ㆍ남좌도어사(南左都御史)를 지냈다. 청렴개결하였다. 《尙友錄5》 《明史 卷158》
[주-D017] 첨사(僉事) : 안찰사(按察使)의 속관으로 검찰사무를 맡았다. 명(明)나라 때에는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와 포정사(布政司)에 첨사(僉事)가 있었다.
[주-D018] 왕기(王奇) : 명(明)나라 천태(天台) 사람으로 자는 세영(世英)이다.
[주-D019] 왕서(王恕) : 명(明)나라 헌종(憲宗) 때 사람으로 자는 종관(宗貫)이다. 벼슬은 운남순무(雲南巡撫)ㆍ남경 병부 상서(南京兵部尙書)ㆍ이부 상서(吏部尙書)ㆍ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청렴 강직하였다. 《明史 卷182 王恕列傳》 운남순무(雲南巡撫)로 나갈 적에 하인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서 “하인을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백성들의 원망을 살까 두려워 늙은 몸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온 것이다.” 하였다.
[주-D020] 행조(行竈) : 휴대용 취사도구.
[주-D021] 죽식라(竹食籮) : 대로 만든 도시락.
[주-D022] 방극근(方克勤) : 명(明)나라 태조(太祖) 때 사람으로 자는 현긍(玄矜)이다. 벼슬은 제녕지부(濟寧知府)를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明史 卷281 循吏列傳 方克勤》
[주-D023] 요희득(姚希得) : 송(宋)나라 영종(寧宗)ㆍ이종(理宗) 때 사람으로 자는 봉원(逢源), 또는 숙강(叔剛)이다. 벼슬은 정강지부(靜江知府)ㆍ병부 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속언행록(續言行錄)》ㆍ《주고(奏稿)》ㆍ《귤주문집(橘洲文集)》이 있다. 《宋史 卷421 姚希得列傳》 아래의 기사는 요희득이 광서전운판관(廣西轉運判官)으로 정강지부(靜江知府)의 일을 임시 겸임할 때의 일이다.
[주-D024] 기건(奇虔) : ?~1460. 호는 청파(靑坡), 시호는 정무(貞武),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벼슬은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ㆍ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 원문의 고려(高麗)라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주-D025] 정 충정공(丁忠靖公) : 1508~1572. 조선 문신. 자는 추경(樞卿), 본관은 나주(羅州), 시호가 충정(忠靖)이다. 벼슬은 관찰사ㆍ병조 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주-D026] 정옥(鄭玉) : 1694~1760. 조선 문신.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이고,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5대손이다. 좌승지(左承旨)ㆍ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청렴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주-D027] 약포 상공(藥圃相公) : 조선 문신 정탁(鄭琢, 1526~1605)을 말한다.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柏谷),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임진왜란 때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주-D028] 서읍(西邑)에 있을 때 : 정약용(丁若鏞)이 정조 21년(1797) 윤 6월부터 정조 23년(1799) 4월까지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었다.
[주-D029] 내외(內外) : 안채인 내사(內舍)와 아사(衙舍)의 주방인 외주(外廚)를 말한다.
[주-D030] 가하전(加下錢) : 지정된 액수보다 초과 지출한 돈.
[주-D031] 유정원(柳正源) : 1703~1761. 조선 문신.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인 현감(慈仁縣監)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삼산집(三山集)》ㆍ《하락지요(河洛指要)》 등이 있다.
[주-D032] 대산집(大山集) : 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 이상정(李象靖)의 문집. 이상정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衣服飮食。以儉爲式。輕踰其式。斯用無節矣。
衣服。務在麤儉。
〇朝夕之食。一飯一羹一齏一醬之外。齏。沈菜也。醬。鼓淸也。 宜止四楪。四楪者。古之所謂二豆二籩也。燒肉一楪。脯鱐一楪。菹一楪。醢一楪。不可加也。
〇近來官長。百事皆失體貌。唯於飮食。妄自尊大。稱用古法。大小二盤。具設紅白之飯。染以赤豆者。爲紅飯。 內外二膳。備陳水陸之珍。內舍外廚。各進盛饌也。 自以爲官長體貌。本當如此。食而有餘。惠及奴妓。
不知我職旣溺。薄餐猶素。不務其職。但索其食。豈不可笑。
費濫則財屈。財屈則割民。爾所見者奴妓耳。見牛而忘羊。割民以肥妓。將何益矣。
然且初到之時。逞其愚氣。未過數月。權輿不承。減之爲薄小者多矣。則吏民傳笑。譏其不恒。又得無愧色乎。
眞西山論菜云。百姓不可一日有此色。士大夫不可一日不知此味。
〇鄭瑄云。百姓有此色。正緣士大夫不知此味。若自一命至公卿。皆得咬菜根之人。則必知職分所在。百姓何愁菜色。
後漢劉虞爲幽州刺史。敝衣繩屢。食不兼肉。
後漢范丹字史雲。爲萊蕪長。歌曰。甑中生塵范史雲。釜中生魚范萊蕪。
宋何須爲安漢令。去官時。巴土饑。送吏取民芋以自給。隨卽以線擊其處。償直。
齊劉懷惠爲齊郡太守。有餉新米一斛者。劉出麥飯示之曰。食有餘。幸不煩此。
後周裵俠爲河北郡守。躬履儉素。所食唯菽麥鹽菜而已。俠常與諸牧。謁周文帝。帝命俠別立。謂諸守曰。裵俠淸貞。爲天下最。衆中有如俠者。可與之俱立。衆皆默然。號爲獨立使君。
唐馬元叔歷始平縣。所乘馬不與芻豆。令作齋馬。
董士毅爲蜀州守十數年。僅一布袍一革靴。
瑞昌令劉公仁與高安令嚴某同入覲。時楊溥當國。遣一价往瞯。還白曰。嚴富貴。雅稱官也。劉藁席布被。瓦盆煤竈。猶然窮人耳。公心識之。嚴先見。贄以金幣。公麾之。劉嗣見具茗一帒蜜一缶而已。公嘉納。尋擢爲御史。
軒輗爲浙江按察使。俸資之外。一毫不取。四時著一靑布袍。破則補之。蔬食不厭。與同僚約。三日。以米易肉一斤。多不能堪。忽聞親喪。次日遂行。屬僚尙有未及知者。初爲漁鹽運使。廉名大著。嘗坐水傍。一童子曰。水之淸。不如使君之淸。
僉事王奇。居官淸白。衣敝。以紙補隙。
王恕撫雲南。不挈童僕。唯行竈一。竹食籮一。日給乳豆一塊。菜束醬醋。水則取主家。乳豆者。豆腐也。
方克勤。循吏也。自奉簡素。一布袍。十年不易。日不再肉食。
〇姚希得知靜江。官署舊以錦爲幕。希得曰。吾起家書生。安用此。命以布易之。日唯啖菜而已。
高麗奇虔爲濟州安撫使。性執而廉謹。州產鰒魚。其採民甚病之。虔曰民之受病如是。吾忍食諸。遂不食。人皆服其廉。
丁忠靖公。諱應斗。 七道按節。再任關西。而行部之日。未嘗坐花紋席。其惜福好儉如此。
鄭監司玉。藥圃相公之孫也。爲黃海觀察使。律身淸苦。巡行列邑。只饌二楪。有違令者。罪之。
〇余在西邑。見一邑宰。朝夕必具內外二饌。及其去也。加下錢四十萬。首吏破家。
柳正源屢爲郡縣。每解紱歸鄕。以一鞭就道。衣服器用。無所增飾。自慈仁由還在家。子弟在縣衙。還送弊籠于家。慮中虛易陷。實藁草其中。里婦爲其自官來。爭聚觀之。知其爲藁艸也。皆大笑而去。大山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