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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8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나를 따라와야 한다
내 정성이면 내게 맞게 그만이면 그만이지 말이야. 아무것도 없는 농사꾼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이야 굉장한 돈을 내서 도시에 가서 비싼 물건을 사가지고 간다면 사실 정말 바로 된 친구라면 욕할 거예요. “자네가 이런 게 무슨 살 힘이 있어 이건 허영심이지. 괜히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자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거지 네가 무슨 생각에 무슨 힘에 이걸 가지고 올 수가 있냐?”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 속을 해부해보면 ‘좋은 물건이야만 가지고 가지’, 하는 생각은 그 사람을 위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내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져있는 허영심이라고 해도 좋고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고 그런 거니까 자기는 자기분대로 아무거나 그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있게끔 내 쉬운 말로 하면 나는 나 노릇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 내 오늘 아침에 우리 모임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건 왜 이러냐 그러면 이 사람들이 상기도 정도가 멀었어. 나부터 그런 사람들이지만 말이야. 옛날 하던 버릇이 있어서 그 예배시간에는 거기 계급이 있어선 못써요. 무슨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교회에 예배를 한다고 하는데 거긴 무슨 관리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자리를 쓱쓱 내주며 이리로 올라오시오. 그런 따위 뭐 행여 그런 걸 봅니다만 그건 상기도 예배가 뭐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유명한 얘기 있지 않아요. 나 벌써 어렸을 때 들은 얘깁니다만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는데, 말하자면 뉴턴이 조그마한 교회가 어째 나가는 조그만한 교회가 있었데, 그랬는데 또 뭐 뉴턴은 그래도 학자고 그러니까 어째 그랬는지 그 교회에서도 ― 내가 옛날이야기를 잊어버려서 자세한 걸 기억을 못합니다만 그 뉴턴이 학자란다고 그 태도가 교만하다고 그래서 그랬는지 뭐 상대를 잘 안했다나 무슨 책벌을 했다나 뭐 그래요. 또 그래서도 또 뉴턴은 아무 말도 안하고 몇 해 그저 그 한구석에 그저 고스란히 가만히 가서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몇 해를 그렇게 다녔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래 뉴턴은 사실 교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치유해 가고 그러면 자연히 자타가 다 그런 잘못에 빠져, 예배하는 시간에 그런 거 잘나도 지위가 높고 낮고 말한 것도 없고 선생이고 제자여도 이렇게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이전에 기독교 처음 들어올 때에 주일날은 절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난 그거 좋은 뜻이라고 그래요. 주일날은 하나님만 예배하는데 어른보고 절할 필요가 없다 그 얘기에요.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 없는 줄 압니다만 그래도 그 뜻은 말이야 그날 어른이고 애고 높고 낮고, 하나님은 한분이 있을 뿐이지 무슨 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서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근데 예배시간에 그래야겠는데 예배시간이라고 해도 이 사람들이 선생님은 선생님으로 알고 말씀을 해도 누구 선생님들이 하시겠지. 그런 생각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들이 아직도 멀었어.
종살이 하던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거는 일체 모든 그런 걸 벗어버리고, 너도 하나님의 아들, 한집에서 보면 말이야 어린애가 뭐 자기 낫살 많은 언니라고 그래서 그 때문에 뭐 눌리지 않지 않아요? 도리어 어떤 경우를 보면 어린애가 더 오히려 기운이 당당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집에서는 그렇게 먼저 난 형이라고 더 높은 것도 아니고 작은애라고 해서 낮은 것도 아니고 부모 밑에서 마찬가지 그런 모양으로 민주주의라는 게 나 이제 앉아서도 그런 생각했습니다만 이거 정말 민주주의 시댄데 민주주의 시대라면 민주주의가 뭐냐 자유해야 할텐데 자유 한다면 자유가 뭐냐 자주해야 자유, 스스로 자기가 주인 돼야 스스로 주인 된다는 게 그럼 뭐냐? 스스로 책임지는 거예요. 스스로 책임져야 주인이지.
그러니까 모임을 뭐인지 모르게 우리는 집에서 성경공부라고 이렇게 합니다만 이름이야 뭘로 붙였던지 간에 여기서도 마찬가진데 여기 와서 누구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이 주장을 하거니 거길 이렇게 나도 그저 책임 그건 상관없이 나도 거기 가서 한 번 말을 듣자 그러면 그 태도도 없는 것보다는 좋지만 나는 그것 가지곤 “아 그건 아주 부족하다”고 그렇게 봅니다. 남이 하는데 나는 거기 손님으로 가는 경우 그래 아주 정치에서 얘기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도대체 그렇지 않아요.
내 노릇을 한다하는 것
지금 말은 민주주의라고 그러지만 남들이 하는 정치에 나는 손님노릇을 떡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어디 될 수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정치에도 그런데 뭐 신앙엔 더구나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다고 또 반대로 나가서 “야 이 모임은 내가 주인이다.” 그리고 또 상식에 어그러지게 나서서 또 되지도 않게 이건 제 마음대로 끌고 간다, 그건 그거는 모를 그게 주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보면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주체하는 사람이 있어서 있는 모임인데도 불구하고 거기 가서 자기가 주인이나 되는 듯이 이럭하고 저럭하고 그럴라구하는 상식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일이 또 이제 그것도 지나친 또 잘못이고 그래서도 못쓰지만 모든 걸 한 손님격으로 그건 난 그건 모르고, 그 시간에 가서 한시간가서 말 있으면 들었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그런 거만은 그렇게 만은 할 수 없다. 이거는 조금 다릅니다만 아침모임에서 내가 그 느꼈던 생각이 그겁니다.
그래서 옛날식으로 지도자가 있고 우리는 따라가는 사람이지. 그런 의식이 그냥 살아있어 가지고는 안 된다고, 그러는 말은 나보다 먼저 안 사람의 말을 배우지 말란 말 아니야. 그건 물론 배워야지. 배워야 하지마는 그러나 그 우리 살아가는 이 모임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책임에서 얘기할 때 말하자면 나는 직접 책임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손님모양으로 공개 무슨 강의하는데 가서 무슨 말을 들었으면 그만이라 하는데 그런 것만은 가지고는 그 무슨 정신모임이 성립이 안 되는 그건 될 수 없다하는 거. 그래 정말 참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나는 내 노릇을 한다하는 그게 권리주장보다도 책임, 전체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다. 그런 경우를 지금은 이렇게 이 우리는 아주 어려운 시기에 있습니다.
나는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이제 종교라는 게 뭐냐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토론까지는 모르더라도 종교 살림이라는 것에 형식이 이제 굉장히 바뀔 겁니다. 지금 그래 고민하는 시대 아니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도 이제 어떻게 다르게 되면 나도 그대로 따라가지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 하나 하나 하는 일이 이제 이다음 시대를 위해서 그런 무슨 새것이 나오려고 하는 그 과정에 그 책임을 지고 있는 거라고 그런 생각을 이 앞으로는 우리는 모르지만 옛날 하던 그런 식대로 그렇게만 그저 따라 갈수는 없고 종교살림 신앙살림이라 하는 것도 형식이 굉장히 어느 정도의 형식이 없을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이 아주 이 시대에 맞도록 달라지는 점이 이 시대에 맞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시점에 있어 우리의 마음을 비교적 이렇게 그대로 표시한다고 하는 것이 될 수 있으리만큼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할 거다.
그 점을 사람이 이렇게 앉아서 의논해 가지고 고칠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 그런 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시대의 과제다 하는 그런 생각도 많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저 이렇게 남들이 다 이 교회의 교회에 그 기본에 나쁜 건 그것이야요. 다 돼있는데 나도 거기 가서 이렇게 한 회원이 된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게만 지금 생각할 수 없다고 지금 우리가 아주 고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거기 사람 큰사람 작은사람이 없어요. 집을 짓는데 재력에 재목에 큰 것 작은 것 구별이 없어요. 큰 돌도 있고 조그만 벽돌도 있지만 조그만 못도 있지만 그 집을 이루는데 있어 책임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런 모양으로 현 역사에서 우리가 지금 역사를 장차 오고 있는 시대를 만들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겁니다.
속에 정신을 기르려면 어려움을 견뎌야
오늘은 12장 27절에서 읽을 차례. 이 선풍기를 트니깐 내가 얘기 하나 하렵니다. 여기 선풍기 내가 왜 껐는가하니 일부러 껐습니다. 저번에 어디 강연을 갔더니 사람은 많이 모였는데 더운데 이 선풍기 하나도 준비를 안했어요. 그러니까 그날은 또 준비 안했다고 내가 욕을 했어요. 왠고하니 저 사람은 이렇게 모이고 민주주의를 살린다고 그러면서 공개 강연회를 연다. 그러면 여기 이렇게 덥기도 하고 환기 기운이 이게 다 문젠데 그런 준비쯤 해놓고 하지 사람을 그저 오라기만 하느냐 그래 선풍기 하나도 준비를 안 해놓고 뭐하러 다음에 그런 공개 강연 하겠다면 그런 준비 하라고 그날은 나무람을 했습니다만 오늘은 마음이 딴 마음이 들어서 그게 잘못이라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러기도 해야겠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냐 그러면 그 여기 저 선풍기 더운데 틀어놓으면 물론 좋지만 현대 사람은 너무 그런 점은 아주 약해져서 옛날 옛날 이전에 우리 예수 믿을 땐요.
기도하는 시간엔 아주 부채 부치지 말라고 말까지 해주었습니다. 너 기도한다면서 덥다고 부채질을 자꾸 이러고 그게 무슨 기도가 그러니까 또 그러면 더워 땀이 쭐쭐 난다 아이쿠 땀이 난다 그래가지고 기도가 될 리도 없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일이지만 옛날사람은 하여간 무슨 밖에 조건이 있더라도 그 조건을 될수록 견뎌보자. 이 마음을 가지고 밖에 조건 뭐든지 못 견딜 것 어디 있냐. 그러니까 지금 사람이 보면 질겁 할거에요. 여름에도 결혼식중이고 결혼식은 피할 수가 있지만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해야 하는데 장례식 할 때 프록코트(frock coat) 입고 가 해요. 그걸 생각을 해보시오 지금 사람하면 뭐 그거 할 것 같은가 하지만 그렇게 하면은 또 그래도 다 해요.
그런데 근래에는 너무 아주 이렇게 사람들이 그저 문명이 발달이 된다고 그래 가지고 될수록 편하게 편하게, 아니 편하면 좋지요. 그건 뭐 더워서 땀을 쭐쭐 흘리며 정신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그래도 서늘하게 하면은 그런 생각을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순전히 마음을 정신의 문제에만 쓸 수 있다면 오죽히 좋아요? 그런 면이 있긴 있는 거 같지만 그러나 이론이 그렇지만 않아요. 그런데 나 자신은 이제 그런 말이 났으니까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아주 나 자신이 그런 말 우리집 할머니한테 말을 들어요. 그 전에 젊어서 얼음 안 먹었거든요. 얼음, 부채도 가지고 다니지 않은 때도 많이 있었고 겨울이 되도 장갑 안 끼고도 다니고 그랬는데 근래엔 아주 그 점이 약해져서 요새 얼음을 많이 먹어요. 그러니까 전에 안 먹던 왠 얼음을 그렇게 먹는가 그러면 내속에 부끄러워요.
그건 역시 내가 기운이 죽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뭐 안 먹으면 또 안 먹고 지내가지 뭐. 그까진 것 그거 못 견딜거야. 그런 줄 아니까 먹는 때도 있고 그렇긴 그럽니다만 너무 한편은 또 요렇게 꼭 틀을 짜고 요렇게 구속을 꼭 받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얘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대체로 보면 사람은 속에 기운을 기른다고 속에 있는 정신을 기르는 건데 속에 정신을 기르려면 뭘 작정을 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견뎌간다고 하는 그런데서 길러지지 밖에 조건대로 자꾸 편리한데로 해 이제 가지곤 안 돼. 그것만은 뭘 증거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영적 생명이란
이제 27절에서 읽습니다. 요한복음 12장.
“지금 내 마음이 초조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버지시여 이 시간에 나를 건져 주옵소서. 그러나 나는 바로 이를 위하여 이 시간에 이른 것이옵니다.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거기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천둥하는 소리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때이다. 내가 땅에서부터 높이 들려올라가게 될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라.”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신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합니까. 인자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아직 얼마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다니고 어두움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라. 어두움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고 빛의 아들이 되라.”(요한복음 12:27-36)
여기까지 읽었습니다. 요 전번에 인제 그 나온 말은 헬라 사람이 예수님을 와서 뵈이겠단다고 빌립에게 말했고 그래 빌립이 안드레하고 의논을 해 가지고 예수님을 와서 뵈었다. 그런 말씀 그 헬라 사람이 와서 무슨 말을 했다는 건 없고 그저 오겠단다고 와서 선생님을 뵙겠다. 그러는 건 예수님의 이제 이름이 사방으로 높아지고 그러고 하니까 아마 그 소문을 듣고 그이가 와서 한번 보자고 그래 아마 그랬던가 봅니다. 거기 대해 말씀한 게 이제 놀라운 말씀을 했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요한복음 12:24-26)
그래서 분명한 말은 없고 그저 이 한 말만 있는데 헬라 사람이 와서 뵙겠다고 그러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자기로서는 이제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는데 또 찾아오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까지는 모르고 왔을 겁니다. 그러고 더구나 헬라 사람이라는 사람은 아마 이렇게 그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염두에 두셨는지 대개 아마 그러셨겠지요. 헬라사람이라고는 뭐 다 그때 알거니까 근데 물론 이렇게 이렇게 그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겁니다만 우리가 보통 상식적 일반화한 말로 하면 헬라사람은 대단히 이지적으로 된 사람들이고 또 예술적으로 많이 된 사람들. 이 히브리사람과는 퍽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같은 그런 종교는 뭐 헬라 사람에게는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그런 그 헬라 사람이 온다고 그러니까 그래서 더구나 아마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아주 이건 알아듣기 좀 어려운 말입니다. 한마디로 헬라 사람이라면 논리 지금 논리학이라고 지금 철학하려면 철학만 아닙니다마는 해도 철학하면 더구나 논리학 못하고 옛날에는 논리학이라고 굉장히 중요한, 지금도 중요한 학문입니다만 뭐 지금 학문하려면 논리 모르곤 아니 될 터인데 그 논리라는 게 헬라 사람에게서 나온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것은 논리로는 맞지 않는 말이에요.
밀알 하나가 땅에 들어가서 떨어지면 열 알이 되지만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누구든지 제 목숨 아끼는 사람은 잃어버리지만 제 목숨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 이것은 보통 역리라고 그러지 않아요. 논리에 거슬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패러독스(paradox)라 보통은 많으면 점점 더 많아지고 없으면 점점 더하고 그렇게 살면 점점 더 살 수 있고 아끼면 점점 더 살 수 있고 또 아끼지 않으면 잃어버리고 그게 보통 논리가 아닌데 이런 것과는 반대 되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거고 도리어 제 목숨 이 땅에서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 보통 논리 가지곤 안 되는 역리라고 그래 패러독스라고 그런 말씀을 해주셔.
그런데 이거는 이제 그 사람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만 말씀하시는 예수님으로서는 이건 결론적인 말씀 아니에요? 자기의 생애를 지내보고 또 이제 이 앞에 자기의 마지막이 거의 다 가까워 온 거를 보고 여러 말 할 것 없이 자기로서는 결론적인 말씀을 이렇게 간단하게 해 준걸로 물론 그 사람만 아니라 제자들도 들으라고 그래 한말 일겁니다만 그래 그런 말씀. 그러니까 그래 우리가 거기서 보면 예수님이 그 속에 자기로서는 태도가 꽉 찼지. 이건 두고 두고 지내본 결과 얻은 결론이야요.
그래서 비유를 해가면서 땅에 밀알 떨어져 죽으면 여러 개로 나올 수 있지만 한 알대로 있으면 그런 모양으로 영적 생명이란 이런 거다 그러고 그래서 나를 섬기려는 사람은 나 따라와야 된다 할 때는 그런 줄 알고 와야 된다. 그래서 이런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과는 아주 또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거기서 보면 예수님에는 속에 문제가 벌써 십자가에 돌아가기 전에 꽉 다 결정이 됐어. 결론이 다 생겨요. 인생에 관한 결론이 다 생겨있는 확신이 있는 분인데 이제 27절은 것과 아주 다른 게 지금 내 마음이 초조하니 내가 초조라고 했습니다만 혹은 마음이 설레이니 그렇게 할 수도 영어로는 터멀(turmoil)이라고도 번역할 때도 있고 트러블(trouble)이라고 번역할 때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우리와 같은 사람
어째나 이렇게 휘저어서 혼란이 일어나서 뭐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마음이 그렇다는 내 마음이 지금 초조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서양도 그건 마찬가집니다. 동양적인 더구나 생각으로 한다면 훌륭한 사람이란 다음엔 퍽 이렇게 수양이 돼있어서 이제 죽음이 닥쳐온다 그럴 때에 까딱이 없는 것이 그 아주 훌륭한 참 의미에 정신적인 의미에 영입니다. 그래 부동 움직이지 않는다.
맹자에도 부동심(不動心)이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얘기가 있습니다만 아니 그런 부동이야말로 그 이속에 힘이 들어차 있는 증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까딱이 없는 거. 도둑이 칼을 들고 들어온다. 그래도 안색도 하나 변하지 않는다. 까딱이 없다. 동양적인 수양에 목표라고 할 때 그런데 있어요.
그런데 이거는 것과 반대야 아주 그런 면으로 보면 예수라는 사람이 뭐 그럴까? 이렇게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지금 내 마음이 초조하니 혹은 지금 내 마음이 설레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니 뭐 보통말로 참 추태라고 그래도,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이 우리가 날수가 있어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래도 이제 그 뭐 성경에 다른 점 예수의 생애에서 다른 점이 동양적인 소위 말하는 그런 영웅과 다르다고 하는 점, 위에서도 이제 먼저 번에 말했던 그런걸 보면 결정이 됐다면 다 결정이 돼있는 건데, 또 그 아니고라도 복음서에 공관복음에 보면 몇 번씩 증거하지 않았어요?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방사람한테 붙들려서 죽을 거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 그런 말 예언했다고 미리 미리 다 말씀했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거기 대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부터 다 소위 결정돼 있었어. 그러는데 그러면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내 마음이 초조하니 무슨 말을 하겠나? 그러고 어쩔 줄을 몰라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말씀이 나온다고, 하여간 설명은 어찌 했던지 이대로가 그 이것이 예수님의 살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벌써 이렇게 수천 년이 됐고 보통말로하면 기독교에 다른데서 다 교조라고 그러지 않아요?
물론 기독교에서하면 예수님을 뭐 교조라는 의미로 섬기진 않아요. 그렇지만 다른 보통말로하면 각 종교에 교조가 있는데 예수님을 교조라고 그래서 지금은 이 일반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는 태도도 다른 종교에서 자기네 교조에 대하는 그런 태도와 다를 것이 없어요.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그렇게 대해버려 그런데 확실히 폐단이 있어요. 그런 점이 예수님의 속 깊은 데는 도리어 잘 모르지 않나. 또 다른 덴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폐단이 많이 있지 않나. 예수님 믿는다고 할 때에 그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편만을 강조해 말을 물론 거 믿는다고 할 때에 의지하는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그것만이 아닌데 그 점만이 강조된다고 하는 게 우리가 지금은 생각할 점, 어느 한 면만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 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 그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해 놓으면 잘못 돼. 믿는다하는데 또 내맡긴다. 내맡긴다는 면이 확실히 있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맡긴다하는 면만 강조해 놓으면 걸로 인해서 잘못 되는 데가 있어요. 그런 면이 지금 우리같이 이 시점에 와서는 우리로서는 그런 점을 좀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점에 자꾸 이게 도리어 어느 정도 지나간 편입니다만 몇 십 년을 두고 난 그 점에 자꾸 반성이 됐던 사람입니다. 그 의심이 나고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해서 저 믿음이 아니라고 그러고 이단이라고 그런 말도 들었습니다만 남이 뭐라거나 그건 난 상관없어요. 이렇게 쭉 그러니까 지금도 이단으로 생각한다거든 나하고 말할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생각한다거든 그거 또 나하고 무슨 토론한다거나 그럴 필요 없지요. 얼마든지 난 남의 믿음을 뭐 강요해서 나와 마찬가지로 꼭 만들어 난 그런 생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또 저런 옆에서 있는 대로 좌우간 말을 하라고들 그러니까 하는 데로 내 있는 걸 증거하고 증거하려면 나는 내속에 비교적 안다 분명해졌다고 하는 걸 말을 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알거 있어요.
그런데 그 점을 그렇게 숨김없이 말을 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무슨 본래부터 이제 이렇게 무슨 그 딱 예정돼 있는 것이 있어서 아주 기성품으로 되가지고 하늘에서 다 되가지고 떨어져 내려온 것같이 그렇게 말은 성경에 있는 데로 예수님은 완전히 사람이면서 완전히 하나님이라고 그런 말은 합니다만 그런 말이 참 난 이해하기 어려운데 완전히 사람이란다, 그러긴 그러면서도 사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잊어버리지 않았나. 예수님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된다.
신학으로는 다 인정을 해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아닌 게 아니라 똑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말은 똑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면서도 대개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면은 잊어버려요. 잊어버리면 어떤 결과가 생기냐? 또 그거 잊어버리게 되냐? 그러면 거기 대단히 중요한 거 있다 그 말이야. 잊어버리면 무슨 일이 생기냐? 그러면 우상이 돼버려요. 예수를 정말 참으로 믿는다. 믿는다면 믿는다 할 때 아까 그를 의지한다든지 그에게 내맡긴다든지 그를 바라본다든지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여기 말씀한대로 예수님이 날 섬기는 사람은 나 따라와야 된다.
나 따라와야 된다 하는 건 자기가 앞장을 서가면서 우리도 그대로 하기를 말하는 거 이건 실천, 인생을 살기를 내가 산 방식대로 그대로 그렇게 살기를 바래. 그런데 보통 저 열심으로 믿는다고 더구나 소위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그러는데서 믿는다고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뜨게 달라서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를 짓는 일도 없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아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중 가운데 중보가 될 수가 있다. 확실히 그 면이 그건 뭐 십자가에 예수님의 생애에 그 면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거 뭐 모르는 거 아닙니다. 부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면만을 강조를 해 놓으면 예수님은… (녹음29, 3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