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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 붕괴 사고 발생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지붕 붕괴 현장.
2004년5월23일 오전7시쯤 프랑스 파리
의 북쪽 외곽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여객터미널의 지붕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
가 발생했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으면서 터미널 건물이 완전히 반 토막 났다.
한국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형 사고였다.최소한 5명이 사망했지만, 이른 아침이어서 사고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는 적었다.
사고가 난 2E 터미널은 전해 6월 개통돼 완공된 지 1년도 안 되는 새 건물이었다. 에어프랑스, 대한항공 등이 입주해 있고 한국행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곳이어서 우리로서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넘길 수 없는 아찔한 사고였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공항을 유럽의 허브 공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대대
적인 확장 공사를 벌였다. 2E 터미널도 그 중 하나로, 7억5000만유로(약 1조원)를 들여 지었다. 철골조와 유리로 된 화려한 건물 외관은 첨단 디자인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유럽의 허브 공항’이 되겠다는 프랑스의 원대한 계획도 한 방에 날아갔다.
▶2010년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 별세
▶2009년 조은화씨,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서 부산에서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붕역풍 생어역수(大鵬逆風 生魚逆水;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헤엄쳐 거꾸로 간다)’라는 말을 즐겨 쓰며 시대의 역풍을 딛고 일어서려는 기개를 보인 분입니다. ‘노무현’하는 뭐가 떠오릅니까?
“바보 노무현”
대의를 위해서는 뻔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던 그 기개, 원칙과 정도를 걷고자 했던 분으로 우리는 기억합니다. 탄핵 역풍에도 의연하였고 임기를 마치고는 우리나라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고향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웃이 되고자 했던 분입니다. 그러나 친형 노건
평 씨 등 친인척 비리 관련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뒤쪽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62세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https://youtu.be/x6qkD86YxV8
사람들은 그를 ‘권위적이지 않고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시대정신은 아직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늘 말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어서 빨리 실현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07년 한국계 미국 팝 가수 에이머리 새 앨범 홍보차 방한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방중
▶2005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박성용씨 별세
▶2005년 몽골 새 대통령에 엥흐바야르 前총리 선출
▶2004년 한국전에 첫 참전했던 미군 스미스부대 특공대장 찰스 B 스미스 별세
▶2004년 ‘90경기 무패’ 멕시코 영웅 프로복서 차베스 은퇴경기서 판정승
▶2004년 광주과학기술원 변영로 교수, ‘이코노미 증후군’ 예방알약 첫 개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충성메모’ 파문의 당사자 안동수 법무장관, 취임 43시간 만에 경질
▶2000년 이한동 국무총리 서리 취임
▶2000년 시리아 북동부서 6000년전 도시 발견
👉🏿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에 도시문명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6000년 전 유적이 시리아에서 발견됐다. 이 유적의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굴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 중동연구소는 시리아 북동부, 고대 주요 무역루트에 있는 ‘텔 하무카르(Tell Hamoukar)’의 거대한 흙더미를 파고들어갔다. 그 결과 시가지 방호벽 등 6000년 전에 복합적 형태의 사회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존재했음이 드러났다. 연구소측은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이 문명지가 남부의 수메르 문명과 동시에 발흥한 것이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2000년 5월 23일 발표했다. 발굴 책임자 맥과이어 깁슨 박사(Professor McGuire Gibson)는 하무카르 유적은 수메르 유적과 같은 시기인 6000년경으로 추정되지만, 여러 흔적으로 보아 하무카르의 도시문명이 수메르 이전에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1999년 여름 시카고대 중동연구소와 시리아정부의 합동프로젝트로 시작된 텔 하무카르 발굴은 유적지의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물이 지표 가까이에서 발굴됐으며, 향후에도 다양한 유물이 발견될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기대했다.
이번 발굴에서 최대의 성과는 60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 폭 4m의 방호벽. 이런 규모의 축조물은 문명이 시작된 증거로 간주된다. 또 방호벽 안에서 이글루 모양의 거대한 화덕과 조리용 토기, 동물 뼈, 밀· 보리·귀리 등 곡물 흔적이 나타나 사회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문명이 존재했음을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또 다량으로 발견된 인장을 통해 문명의 중요 요소인 사회 계층화가 확인되고 있다. 이들 인장은 음식과 물건을 보관하는 용기에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단순한 자국만 들어간 작은 인장과 표범·사슴·곰·오리 등이 새겨진 커다란 인장이 발견됐다. 인장 크기의 차이는 사용자의 계층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당시 사회계층이 여러 단계로 분리됐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구가 급증하고 관개시설을 통한 곡식생산 증가로 보다 급진적인 사회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점차 중앙집중화해 가는 정부가 사회와 경제를 지배했고, 농촌은 도시로 성장했다. 이중 일부는 왕이 다스리는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이 시기는 당시 가장 발전했던 도시 ‘우륵’의 이름을 따 ‘우륵 시기’ 또는 ‘문명의 요람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륵의 영향을 보여주는 토기가 기원전 3700~3500년 층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기원전 3200년경 층위에서야 등장했는데, 이 때는 이미 하무카르 도시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있던 시기다. 따라서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3500~4000년 무렵 북쪽으로 진출했을 때 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 규모는 아니지만 이미 발전한 단계의 족장사회를 목격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는 초기 문명이 오로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하구에서 시작, 무역 루트와 식민지화를 통해 북으로 전파됐다는 기존 학설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발견에도 불구하고, 기존학설을 부정하려면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2007년 1월, 시리아 고대유물부와 시카고대학 고고학 연구진은 시리아 북동부 이라크 접경 지역의 고대도시 하무카르 유적에서 5,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발사대기 상태로 배치돼 있는 12발의 진흙 포탄을 비롯, 이 도시의 멸망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필사적인 전투 현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지난 1999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에서 이미 많은 파괴와 화재 등 전쟁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이번에는 새총을 이용해 발사되는 타원형의 진흙 포탄들이 성벽 바깥 쪽을 향해 가지런히 정렬된 모습을 발견했다고 밝히고 이 포탄들이 사용되기도 전에 지붕이 무너져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이는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침략자들에게 던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했다" 설명했다.
학자들은 현장의 유물들로 미루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를 공격한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루크인일 가능성이 있으며 설사 우루크인들이 공격의 주인공이 아니라 해도 이들은 이 현장이 무너진 직후 도시를 점령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편 하무카르 유적의 다른 곳에서는 수천개의 흑요석 연장과 무기 등이 발견됐으며 당시 주민들이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들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학자들은 도기 파편의 연대 추적 결과 흑요석 도구들이 전투가 있기 수백년 전에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오늘날 터키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연결하는 주요 무역로에 위치한 하무카르의 유적들은 당시 대량생산된 흑요석 도구 등의 시장 개척 과정에서 이곳에 도시 문명이 발전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카고대학 관련 자료 :
http://www-news.uchicago.edu/releases/00/000523.hamoukar.shtml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소풍’, 한국영화 사상 첫 칸영화제 수상
▶1999년 미국 81세 노령 산악인, 국립공원 요세미티 엘캐피탄봉(2307m)에 올라 사상 최고령 등반기록 수립`
▶1999년 독일 대통령에 요하네스 라우 선출
▶1997년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당선
▶1996년 인천 국제공항 터미널 기공식
▶1996년 북한 공군 소속 이철수 대위, 미그19기 몰고 귀순
▶1995년 2002년 아시안게임 부산개최 확정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에 당선
▶1985년 미 문화원 점거농성
▶1984년 김일성 소련 방문, 흐루시초프와 회담
▶1982년 프레이저 호주수상 내한
▶1982년 이란군 호람샤르 탈환
▶1979년 카르스텐스 서독 대통령에 피선
▶1977년 시인 이산 김광섭 사망
👉🏿 함북 경성의 어대진읍, 국토의 최북단에서 태어나서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1928년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한 이래 1935년 《詩苑》지에 시 <고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제하의 비관적인 현실 인식을 관념적인 시풍으로 노래하다가 일제 말기인 1941년에는 민족의식 고취 협의를 받아 체포되어 3년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합니다. 해방 후에는 군정청 공보국장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역임하였고 언론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성북동 비둘기>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1975년 월남난민 태운 청룡호 부산에 입항
▶1973년 대법원 공해에 첫 배상판결 (영남화학에 320만원 지급 판결)
▶1969년 문교부 외래어 한글표기 원칙발표
▶1965년 ‘진통제 마약’ 메사돈 만든 제약사 급습
▶1961년 최고회의 언론기관을 정비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1956년 SEATO 본부 방콕에 설치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대처승관련 담화발표
▶1951년 중국-티베트, `17조 협약` 조인
▶1950년 터키 총선, 27년 만에 1당독재 종식하고 정권교체
▶1950년 한국은행법 시행령 공포
▶1949년 서독 연방공화국 수립
▶1946년 극예술연구회 발족
▶1946년 38선 월경 금지
▶1937년 석유왕 록펠러 사망
▶1934년 미국 은행강도 보니와 클라이드 사살
▶1923년 조선야구협회 창립
▶1917년 생물학 발전에 공헌한 강영선 출생
▶1916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 옥사
👉🏿 임병찬은 최익현과 더불어 호남 의병 운동의 핵심 인물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최익현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해 6월 격전 중에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했습니다.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전라도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대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했으나, 그해 5월 동지 김창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그 운동은 실패했습니다.
▶1915년 극작가 함세덕 출생
▶1915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1915년 이탈리아 일차대전 참전
▶1912년 중국 철도투자를 위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4국 차관단 결성
▶1908년 윤봉길 의사 출생
▶1908년 미국의 물리학자 바딘 출생 - 1956년 트랜지스터 발명, 1972년 초전도이론 개발으로 노벨상 수상
▶1907년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
▶1906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사망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893187&cid=60619&categoryId=60619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타국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과 권력 공고화를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을 억제하려고 명(明)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592년 음력 1월 히데요시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明)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명(明)을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좋게 바꾸어(정명가도)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임진왜란, 조일전쟁이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