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이라크 전 대통령 후세인(Hussein, Saddam) 사형 집행
← 후세인
1937. 4. 28 ~ 2006. 12. 30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69) 전 이라크 대통령이 30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이라크 전역에서 90여명이 숨지는 무차별 테러가 잇따랐다. 사담에 대한 교수형은 30일 오전 6시(한국시각 낮12시)쯤 바그다드 북부 카다미야 지역의 전 정보부 건물에서 집행됐으며, 그의 시신은 31일 고향인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부근에 매장됐다. 그의 사형은 이라크 형법이 사형을 금지한 만 70세를 4개월 앞두고 집행됐다. 사담 처형 수시간 뒤 바그다드 북서부 시아·수니파가 혼재하는 후리야 지역에서 3건의 연쇄 차량폭탄테러가 발생해 37명이 숨지고 76명이 다쳤다. 바그다드 남쪽 160㎞의 이슬람 시아파 거주지역 쿠파에서도 미니버스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31명이 사망했다. /조선
[1996년] 지하철 5호선 완전 개통
서울 지하철5호선 도심구간인 여의도에서 왕십리까지 14.1㎞구간이 1996년 12월 30일에 개통됨에 따라 5호선 전구간인 방화에서 마천동까지 이어지는 52㎞가 완전 개통됐다. 지하철5호선 도심구간은 김포공항과 여의도, 강동지역이 도심 지하철로 이어져 서울의 동-서간 교통축이 완성되는 획기적 변화를 이루게 된 것으로서 지하철 5호선을 이용하면 광화문에서 김포공항간이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 39분 만에 도착할 수 있게 됐으며, 여의도지역의 지하철 이용이 크게 편리해졌다.특히 도심구간에는 한강바닥 아래 15.6~37m 지하에 국내 최초로 건설된 한강하저터널이 포함돼 있다. /조선
[1994년] 미국 킹센터, 김영삼 대통령을 마틴루터킹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김영삼(金泳三)은 1980년 이후 전두환(全斗煥) 정부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 하였고, 1983년 5월 18일~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전개, 5공화국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김대중(金大中)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신한당을 와해시켰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盧泰愚),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1993년 2월 취임함으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정부를 출범시켰다. 1994년 마틴루터킹센터가 수여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평화상인 비폭력평화상을 받았으며 1995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연합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하였다. /naver
[1993년] 이스라엘·로마교황청 수교로 2000년 갈등 청산
지난 2000년간 갈등을 거듭했던 가톨릭과 유태교의 대립관계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스라엘과 로마 교황청이 1993년 12월 30일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외무부 청사에서 상호 외교관계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기본협정’에 서명,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유태인과 기독교인간 반목과 갈등을 청산하는 길을 열었다.
요시 베일린 이스라엘 외무차관과 몽시뇨르 셀리 교황청 외무차관은 이번 기본협정에 따라 대사 차원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수립에 대비, 특별대표를 서로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3월, 1964년 바오로6세 이후 36년 만에 이스라엘을 방문해 종교적 화해를 호소했다. /조선
[1990년] 전두환 전 대통령, 백담사 은둔 769일 만에 연희동 자택으로 귀환
← 연희동 사택에 도착한 전두환 전대통령 내외가 찬불가를 부르며 맞는 조계사 합창단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하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연희동을 떠나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7백69일 만인 1990년 12월 30일 서울 연희동 사저에 돌아왔다. 전씨는 이날 오전 9시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승용차편으로 백담사를 출발, 오후 1시55분쯤 연희동 사저에 도착했다.
전씨는 백담사를 떠나기 앞서 간단한 하산 예불을 올린 뒤 서울귀환에 즈음하여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그 동안 깊은 배려를 베풀어주신 국민여러분과 특히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불교계 지도자와 신도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며 "앞으로 저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 한 시민으로 돌아오던 때의 보람을 간직하고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전씨의 귀경에는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허문도 전 통일원장관, 이양우 고문변호사 등 측근과 장남 재국씨 내외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이 수행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전씨 집 부근과 연세대 주변에 경찰 10개 중대 1천5백여명과 페퍼포그차를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조선
[1970년] 호남고속도로 완공 (대전-전주)
호남고속도로는 본래 호남·남해 2개 노선을 동시에 착공하려고 했으나 건설비의 일부를 IBRD(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차관으로 충당하기 위해 그 선행 절차로 프랑스의 잉게루트사(社)에 용역을 주어 노선 결정의 타당성 조사 및 기술 검토를 의뢰하였다. 그러나 조사활동이 예정보다 늦어져 정부 방침에 따라 먼저 대전∼전주 간 79.5㎞ 구간을 국내 기술 및 내자(內資)로 건설하기로 사업계획을 변경하고, 1970년 4월 15일에 기공하여 같은해 12월 30일에 완공·개통하였다.
잔여 구간인 전주∼순천 간 172.3㎞ 구간은 1978년 11월 IBRD 차관 및 국내 재원이 확보된 다음에 시작되었고, 1972년 11월부터 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73년 11월 14일 전 구간이 완공·개통되었다. 같은 날 남해고속도로(고속국도 10)의 부산∼순천 간 176.5㎞ 구간도 개통되었다. /naver
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이 대통령의 관저 이름을 ‘경무대(景武臺)’에서 ‘청와대(靑瓦臺)’로 바꿨다. 경무대의 기와가 푸른색이어서 ‘청와대’로 개명했다지만, 진짜 이유는 경무대에서 느껴지는 부정과 부패의 이미지 때문이다.
경무대 터가 처음 역사에 기록된 것은 고려 숙종 때. 수도인 개경(開京),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과 함께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었다. 조선조 때는 업무에 지친 왕이 잠시 쉬던 경복궁의 후원이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방치되다가 고종이 이곳을 ‘경무대’로 칭한 후부터는 주로 과거를 보는 장소로 활용됐다. 경무대의 연원은 뒤에 버티고 있는 북악산(北岳山=玄武)에 빛(景)이 길이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해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이곳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39년,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 때였다. 3명의 총독이 이곳을 거쳐갔고, 해방후에는 하지 미(美)군정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다 우리 손에 넘어온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등을 거치며 최고권력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 건물이 철거된 것은 19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 때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10월 청와대 본관과 관저를 새로 지어 그리로 이사갔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길도 정권에 따라 개방과 통제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경무대 시절부터 시민들에게 출입이 허용돼온 청와대 앞길이 봉쇄된 것은 1968년 1월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부터였고, 전면통제가 시작된 것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때부터였다. 5공 초에 잠시 개방을 시도했으나 1983년 10월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다시 유야무야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에 맞춰 다시 개방된 후 2004년 현재 청와대 앞길 개방시간이 연장돼 운영되고 있다./조선
[1947년] 루마니아, 공화국 선언
루마니아(Romania)의 공산화는 1944년 8월 소련군의 발칸 진출을 배경으로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안토네스쿠 정권이 타도됨으로써 실현되었다. 신정권은 소련과 강화를 맺고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으며, 1945년 3월 소련군 주둔하에 최초의 인민정권이 탄생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47년 12월 군주제가 폐지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48년 6월 루마니아의 주요 산업이 국유화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1965년 새 헌법이 채택되어 국명도 루마니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 제국의 개혁 물결이 고조되면서 일어난 1989년 12월의 혁명에 의해 국명이 루마니아로 환원되었다. /naver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이 결정됐다. 이에 좌익은 `신탁통치 조항이 못마땅해도 임시정부부터 세우자`는 입장을 취했고 우익은 `도대체 신탁통치가 무슨 말이냐`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좌우익 투쟁이 더욱 격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30일, 고하 송진우 선생이 한현우에게 암살당했다.
고하는 189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06년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 등과 함께 신학문을 배웠고 일본에 유학, 1915년에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인촌이 중앙학교를 인수하자 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으며 3ㆍ1운동 때는 48인의 한사람으로 체포돼 1년 반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3대 사장으로 취임,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강제폐간 될 때까지 20여년 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했다. 8·15광복 후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됐다.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힘쓰는 한편 속간된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다./조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성립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연방 공화국에 우크라이나·벨로루시·자카프카지예 등 3개국이 가입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성립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혁명에 의해 소비에트 정부가 성립되었으며 볼셰비키가 정권을 획득한 직후인 1918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그뒤 레닌·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주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로 이어지는 공산당 서기장들이 소련을 이끌어왔다. 1922년 위 3개국이 합류함으로써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가 되었다. 1905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요 시기에 처음 등장한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으로, 연방·공화국·지방·시·지구·촌락 수준에서 입법·행정 기능을 수행했다.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쇠퇴하면서 각 공화국들이 연방에서 탈퇴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결국 1991년 12월 8일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브리태니커
[1922년] 영국, 라디오 방송 개시
영국의 방송은 1922년에 사기업(私企業)인 영국방송회사에 의해 개시되었는데, 1927년 국왕의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 공공사업체인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영국방송협회)가 이를 대신하여 라디오방송을 독점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1936년에 텔레비전방송을 개시하였는데, 전쟁으로 인해 1939년에 중단하였다가 1946년에 재개하였다. BBC의 방송독점은 1954년의 상업텔레비전 발족과 함께 끝나고, 그 뒤 영국의 방송계는 공공방송과 상업방송으로 분리되었다. 또 국제방송은 영어 외에 38개국어로 실시하고 있다. 1971년부터는 방송을 이용하는 공개대학의 프로그램 제작과 방송을 담당하고 있고, 1974년부터 텔레비전 문자다중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BBC의 재원은 시청료 수입인데, 징수는 정부가 한다. 최고의사결정기관으로서 경영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yahoo
[1917년] 윤동주(尹東柱) 출생
1917년 12월 30일 태어남 / 1945년 2월 16일 죽음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고민을 내밀한 자아성찰의 시로 승화시킨 대표적 시인이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용정 은진중학에서 문익환, 송몽규 등과 공부했으며,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는 등 여러 학교를 거쳤다. 그는 숭실중학교 시절 교내 문예지에 <공상>을 발표한 이후 자전적이고 내면적인 시들을 써나갔다. 1941년에는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모아 시집을 출간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을 거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된 후 1945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1948년 그의 친구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출판되었다.
[1891년] 언론인·정치가 안재홍(安在鴻) 출생
1891. 12. 30 경기 평택~1965. 3. 1 평남 평양.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1907년 서울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이상재·남궁억·윤치호 등의 지도 아래 감화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에 있는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191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했다.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학감으로 있었고,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5월 비밀조직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총무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딘 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가 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를 맡아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벌여 2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룬 뒤 1929년 1월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쳐 1931년 5월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이른바 재만(在滿)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의 객원으로 〈민세필담 民世筆談〉을 집필했다. 그러던 중 1936년 6월 난징[南京]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 5월 흥업(興業) 클럽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이후 20여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뤄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8·15해방 후 건국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사퇴했고, 그해 9월 24일 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미군정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거쳐 1947년 민정장관을 맡으면서 잠시 신문사를 떠났다가 1950년 5월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곧바로 제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 납북되었다.
〈시대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은 그는 해박한 지식과 사려 깊은 안목, 날카로운 필치로 1920~30년대에 대중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8·15해방 후에는 민주독립국가를 구현하고자 언론과 정계를 뛰어다닌 대표적인 대논객(大論客)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신민족주의 이론을 전개하여 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민족사관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1884년] 일본 군인·정치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출생
1884. 12. 30 일본 도쿄[東京]~1948. 12. 23 도쿄.
제2차 세계대전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수상을 지냈으며, 패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는 육군 중장을 지낸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敎]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22년 스위스와 독일에 체재했다. 그는 군사행정가이자 야전사령관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보임으로써 빠른 속도로 진급하여 1935년에는 관동군(關東軍) 헌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統制派)와 연계함으로써 중일전쟁의 추진자가 되었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상 아래 육군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내각의 육군상에 취임했다. 또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상과 협력하여,'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의 체결에 힘썼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했고 대(對) 영국·미국 전쟁 준비를 추진했다. 1941년 10월 제3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상으로 있을 당시 미국 정부가 중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자 육군을 배경으로 이에 강경히 반대하여 내각을 붕괴시켰다. 10월 18일 기도 고이치[木戶幸一] 등의 추천을 받고 내각을 조직하여 현역 군인이면서 수상·내무상·육군상을 겸임했으며, 또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의 전쟁수행을 이끌었으며, 그의 지휘 아래 일본은 처음에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그의 독재적인 지배체제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은 연합군의 반격을 받았고, 이윽고 1944년 마리아나 군도를 빼앗기자 도조는 그 책임을 지고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 A급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권총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로 끝났으며, 극동국제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1948년 12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1882년] 교육가·민족운동가 최규동(崔奎東) 출생
1882(고종 19). 12. 30 경북 성주~1950. 10. 18.
본관은 영천(永川). 호는 백농(白儂). 아버지는 영한(永漢)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0년대초 상경하여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와 정리사(精理舍)의 수학연구과를 졸업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평양의 기명학교(箕明學校)·대성학교(大成學校)의 교사로 있으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1918년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실력양성에 힘썼다. 1920년 6월 민족교육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조직하여 교육제도 개선 요구, 지방순회강연, 노동야학총서 발간 등의 활동을 했다. 1922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경성지방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찬조위원으로 참여했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한국교육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으로 선임되어 미군정하의 학교교육 책임자로 활동했다. 1947년 조선전기공업중학교를 인수했으며 그후 서울특별시교육회장, 서울대학교 이사장, 조선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1949년 제3대 서울대 총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살해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0년] 인도, 봄베이-캘커타간 철도 개통
인도에서 철도가 최초로 부설된 것은 1853년으로 꽤 오랜 역사를 가진다. 또한 1.676m의 광궤(廣軌)로부터 0.6m의 협궤(狹軌)에 이르는 4종류의 궤도폭이 있는데 총연장의 50%가 광궤, 40%가 중궤(中軌:궤폭 1m)이다. 1960년대 이후 전화(電化)가 진척되고 증기기관차에서 전기기관차 또는 디젤기관차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화차 부족에 의한 석탄수송의 지연이 공업생산의 중요한 장애가 되고 있다. 1998년 현재 철도 총연장은 6만 2915km이고 1만 2307km가 전화되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인도에서 유럽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뭄바이(Mumbai)항은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인도 전국에 철도망이 완비되자 뭄바이는 인도 서해안 최대 경제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naver
봄베이(Bombay)는 1995년 11월에 뭄바이(Mumbai)로 개칭하였다. 캘커타(Calcutta)도 2000년에 전통명칭인 콜카타(Kolkata)로 개명했으나, 여전히 캘커타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하다. /naver
[39년]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출생
정식 이름은 Titus Vespasianus Augustus. 본명은 Titus Flavius Vespasianus.
39. 12. 30 ~ 81. 9. 13.
7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황제.
짧았던 통치기간(79~81 재위)중 국고를 마구 낭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고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재산도 가리지 않고 마음껏 사용했던 그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79)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멸망하자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으며, 80년의 대화재가 일어난 뒤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을 완성했다. 준공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뒤 유대 지방에서 지내며(67)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군단)을 지휘했다. 네로 황제가 죽자(68) 황제가 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제위 계승자가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를 맡겼다.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원정은 예루살렘의 점령과 파괴로 절정에 달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81) 것이다.
71년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호민관 권한(이것은 황제나 제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징표였음)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켄소르(감찰관)를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콘술(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권력구조에서 군사적 오른팔 역할을 한 그는 점차 민심을 잃었고, 헤로드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케를 정부로 삼으면서 더욱 로마인들의 신망을 잃었다. 로마인들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고 있었고, 동방 왕녀와의 혼인은 로마인들로부터 거부감을 사는 처사였다. 이때문에 그는 2번이나 그녀를 쫓아버려야 했다. 79년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죽자(6. 23)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로마의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밖에
1998년 국회 교육위, ‘교원정년 62세’ 법안 통과
1997년 남아공, 중국과 외교관계 수립위한 협정에 서명
1996년 지하철 5호선 완전 개통
1996년 서강대교 개통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초연
1993년 이스라엘·로마교황청 수교로 2000년 갈등 청산
1992년 브라질 하원, 콜로르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폴란드사태와 관련 7개항의 대(對)소련경제제재조치 발표
1980년 터키, 북한과의 무역의정서 폐기
1980년 22개 낙도 자동전화 개통
1980년 입법회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5개 노동관계법안 등 의결
1978년 김상현 WBC 수퍼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획득
1978년 장거리자동공중전화(DDD) 등장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완간
1977년 프랑스, 크루즈 미사일 개발
1972년 개정 국회의원선거법, 정당법 공포
1970년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구간 개통
1961년 부정축재처리위, 부정축재액 최종통고
1952년 제1군 사령부 창설
1944년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 사망
1927년 동경 지하철 개통
1922년 영국, 라디오방송 개시
1916년 러시아 괴승 라스푸틴 피살
1905년 전(前)참판 송병준 음독자살
1894년 전봉준 체포
1884년 청-일 대한제국에 출병
1872년 일본군, 징병제도 실시
1865년 영국 작가 루드야드 키플링 출생
1691년 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