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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 전투를 통한 교훈(수7:2-15)-2021.6.13
가나안 땅을 밟기 전에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진멸시켰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입성하기 전에 승리의 경험을 통해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하자마자 가나안 부족들과의 진멸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시나 두려워할까봐 예비전을 치러본 것이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자신감을 얻은 것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넘실거리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발을 디디자 흘러내리던 물이 그치고 쌓이며 끊어졌습니다(수3:1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마른땅을 밟듯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밟고 당당하게 입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그들이 넘어야 할 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 성은 비무장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그곳에 먼저 보내서 여호수아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보다 가나안에 먼저 오셨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그들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전투하는 방식도 참 특이합니다. 양각나팔을 가진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앞장을 서고 언약궤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침묵하며 따라갑니다. 그들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아야했습니다. 엿새 동안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성을 일곱 번 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돌 때 제사장이 나팔을 붑니다. 그 나팔소리에 맞추어 백성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쩌면 그 소리는 천둥번개보다 더욱 크게 들렸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초자연적인 역사였지요. 그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여리고성을 도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사기는 충천하였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사람은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형통할 때가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역시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그들이 숨겨진 복병을 만난 것입니다. 아이성입니다. 그들의 생각으로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해서는 볼품없이 작고 초라한 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사람을 선발하여 아이성을 정탐케 한 것입니다. 잘 한 것입니다. 준비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한 것입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충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5절). 전혀 상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이스라엘의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작은 성입니다. 아이성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처럼 아주 작은 꼬마성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완패한 것입니다. 모든 실패에 원인이 있듯이 아이성 전투의 패배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패배원인이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 패배원인과 함께 치유책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그 밥에 그 나물(2-5절)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고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이성 정도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왜냐면 여리고성은 그들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철벽성이었거든요. 그런데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거예요. 그러니 그럴 수밖에요.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듯이 여호수아는 사람을 선발하여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마치 40년 전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듯이 말입니다.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준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여호수아의 결정적인 실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어떠한 기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하나님께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낼까요?’라고 먼저 물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가 기도했던 흔적이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생각으로 아이성의 정탐꾼을 보낸 것이지요. 마치 전에 가나안의 정탐꾼을 보낼 때 모세가 그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보고 배운 것이 아닐까요? 보통 많은 지도자들이 실수하는 이유가 이런 것들입니다. 지도자들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 결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거든요.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먼저 기도함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성으로 정탐꾼을 파송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기도하지 않았고, 아이성으로 정탐꾼을 보내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쉬운 점은 기도없이 이런 중대사를 여호수아 단독으로 구상하고 결정하여 파송했다는 것이지요. 기도는 큰 문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소사 무슨 문제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없이 도모하고 결정하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사고 날 확률이 많아요. 자기 혼자 결정한 일이기에 사고가 나면 혼자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일이 더욱 꼬이고 커지지요. 하지만 기도로 판단하고 기도로 결정하면 결과도 하나님이 책을 져주십니다. 그러므로 안전합니다.
보십시오. 아이성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3절입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 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한마디로 아이성은 작은 성이라서 전력을 투입하지 말고 적당한 인원만 보내자는 것입니다. 대략 이 삼 천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첨삭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수고롭게 마소서’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식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그들의 상식으로 그들이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리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 자기들이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아이성을 만만히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성이든지 아이성이든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투하는 숫자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하다니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수고롭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안에서 수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편하게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이지요. 사실 게으름과 편안함은 믿음의 적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믿는 자들이 아무 수고나 헌신 없이 열매를 거두려고 요령을 피우지요. ‘수고롭게 마소서’라는 말은 수고와 헌신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믿는 자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수고와 헌신이 따르거든요. 그래서 ‘수고롭게 마소서’라는 말은 고통없이 영광을 차지하겠다는 말이에요. 이런 발상은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보낸 여호수아나 자기들의 생각대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다 같다는 거예요.
기도 없이 보내니까 기도 없는 대답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냥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하고 결정한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런 보고를 할지라도 여호수아는 판단을 잘해야 했습니다. 그가 정탐꾼을 파송 할 때는 기도하지 못했을지라도 이제 전투병을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했어야 옳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기도 없이 일을 추진했을지라도 늦게나마 기도하면 실수나 실패를 현저히 줄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일이 진행 중일 때에라도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되거든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전히 기도없이 그들의 말만 믿고 삼천 명의 전투병을 파견하고 맙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결과는 뻔했습니다. 그들은 아이사람들 앞에서 혼비백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전사한 사람은 불과 36인 정도밖에 안되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버린 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사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스포츠나 전쟁은 더욱 그러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사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사기를 잃어버린 이유는 전쟁의 숫자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삼천 명의 전투인원을 파견하지 않고 삼만 명 혹은 삼십만 명을 파견했을지라도 그들은 똑같이 아이사람들에게 패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번 전쟁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치 못함에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의 이런 행동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치른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자기들의 힘으로 치른 전쟁이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으로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를 통과했으며,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졌던 것이지요.
그들은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하고 살아온 민족이었지요. 그런데 기도 없이 아이성에서 싸운다구요? 얼마나 교만한 생각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교만의 병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낭패를 겪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이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더욱 아쉬운 것은 비록 여호수아가 기도없이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내고, 전투병을 파견한다면 백성중에 누구라도 기도하자고 권면하는 사람이 없을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실패는 불을 보듯 뻔했던 것이지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자기들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이기고 승리했던 것이지요. 특별히 이방인들은 기도의 위력을 모르니까 기도없이 결정할지라도 믿는 자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나 일도 기도보다 앞서면 안됩니다. 범사에 기도가 우선되시기를 바랍니다.
(2) 똥 뀐 놈이 성낸다(6-9절)
다행스러운 것은 여호수아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한 후에 여호수아는 측근 참모들을 소집하여 다음 행보를 상의하거나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6-9절).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눈물어린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 내용이 가관입니다. 아이성의 실패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우시지 않아서 자기들이 패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의 기도내용을 네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여호수아가 충격을 받고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기도는 일종의 불만(7절)과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8-9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기도 내용을 보면 긍정적인 시각으로도 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내용으로 보는 시각은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기도한 점입니다. 그 기도 자세는 가장 진실하고 성경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이거든요. 물론 기도하는 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호수아의 기도는 내용으로 볼 때도 진실한 기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약간 부정적인 시각에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셨냐는 것’입니다(7절상). 왜 우리를 가나안에 왜 들어가게 하셨냐는 말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요. 우리말에 똥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지요? 표면적으로는 마치 그 옛날 광야에서 모세를 향해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출14:11, 민14:2-3)과 비슷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물론 학자들은 여호수아의 기도와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동의합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의 원망은 전혀 다르지요.
그 옛날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불평을 위한 원망이었지만, 여호수아의 원망은 패배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는 원망이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기도가 우리 듣기에 불편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요단강만 건너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정말 황당한 기도가 아닙니까? 자기들이 불신앙으로 인해 패배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요? 마치 그 옛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향하여 책임을 전가하던 그 소리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왜 하와를 만들어서 자기에게 붙여주셨냐고 반문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인간은 인간인가 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도를 보십시오.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7절하)입니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차라리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서 거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입니다. 사실상 요단 저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원치 않지만 두 지파 반(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이 먼저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입에서 그런 망발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여호수아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푸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물론 여호수아의 기도를 단순한 문장으로 부정적이라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기도는 자기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요, 자기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기도는 자기 마음에 있는 넋두리를 토해내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중과는 상관없는 기도인지 모릅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투정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실까요? 이런 철부지 같은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황당하기 그지 없으셨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바른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말입니다.
또 다른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8절)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망가진 체면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체통이 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신의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었다는 말이에요. 입이 열 개라도 자신은 말할 자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체통은 중요하고 하나님의 위상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자신들의 패배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단 말입니까? 정말 여호수아의 수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성숙하지 못한 여호수아의 자질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협박조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9절을 보십시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 거민들이 아이성의 패배소식을 듣고 자기를 둘러싸서 자기들의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는 것입니다. 정말 갈수록 태산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나안의 원주민들보다 약한 것처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누가 주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을 누가 높여주셨습니까? 지금까지 이름도 변변치 않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스라엘의 이름을 누가 높여 주셨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붙여주시고, 그 이름을 높여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치 자기들의 이름이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에서 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요? 이것 역시 믿음의 언어가 아닙니다. 어찌 여호수아가 이 정도일까요? 어떤 나라도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면 세울 자가 없고, 하나님의 끊으시지 않으면 끊을 자가 없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모르는 것일까요? 각 나라와 족속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는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를 바 없는 여호수아의 입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다니요. 그래서 제가 ‘똥 뀐 놈이 화낸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닙니다. 말 같지도 않는 말들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믿는 자는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하시려느냐고 반문합니다. 자기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지상에서 소멸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의 말에는 어패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 공갈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렇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합니까? 일은 자기가 저지르고 수습은 하나님이 하시라는 것이지요. 사고는 자기가 치고 수습은 하나님이 하시라는 거예요.
이로 보건대 우리는 여호수아의 기도를 통해 참으로 아쉬운 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기분이나 감정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른바 자기 생각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기도해야 해요. 자기 마음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에요.
(3) 그럼에도 불구하고(10-15)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기도 같지도 않는 기도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처방전을 내려주시지요.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 같지도 않는 기도였기 때문일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가 작은 숫자를 파병했기 때문이 아니요, 전술이나 전략에 실패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물론 기도없이 정탐하고 기도없이 전쟁에 나갔다고 여호수아를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한 것입니다. 숨겨진 죄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 범죄의 행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11절). 하나님은 범죄자의 신상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7:1).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취하고 도적질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던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을 어긴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도적질 했는지를 한 사람도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똑똑히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단 말입니까?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수많은 전리품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얻은 모든 물건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6:17). 분명히 하나님이 명령하셨지요. 왜냐면 여리고성의 전리품들은 가나안의 첫 열매를 상징하거든요. 여호수아서6장1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은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고 첨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많은 전리품들을 거두어서 은금 동철 기구를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습니다(6:24). 그런데 그들 중에 바친 물건을 도적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둑이 공개됩니다(1절).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아간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괴롭히다’, 혹은 ‘혼란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이름처럼 아긴이 이스라엘 전체를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그가 도적질한 목록이 21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조서를 받던 그가 직접 시인한 것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그의 도적질은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노케 한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패배원인은 거룩함의 붕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그 영향이 미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앙공동체거든요. 한 사람이 아프면 백성전체가 아프고, 한 사람이 범죄하면 백성전체가 악영향을 받아요. 아간의 범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에게 아이성 전투의 패배라는 징계를 내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11:45, 20:7, 출19: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처방전을 주십니다(13-15). 가장 먼저 백성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당장 도둑놈을 찾아서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 진영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먼저 청결함을 입은 후에 도둑놈을 찾는 거예요. 어쩌면 도적질한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 제비를 뽑아 도둑놈을 잡기 전에 그들이 스스로 성결례를 치르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가슴이 졸이고 불안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내가 죄인이라고 이실직고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자 할 때도 성결예식을 치렀고(출19:10),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도 성결예식을 치렀거든요(3:5). 이번에도 그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는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번에 성결예식을 왜 치르는지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목적없이 성결예식을 치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결예식은 몸을 깨끗이 씻어내는 정결예식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근본이 다릅니다. 이사야서55장8절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선순위로 생각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장 범죄한 사람을 찾아내어 처벌하는 것이요, 그리고 아이성과 전투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 오염되어 있는 죄를 먼저 색출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관심은 범죄한 당사자보다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죄로 오염되고 전염되는 것을 먼저 막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한 당사자를 찾아내서 처벌함이요, 그리고 아이성 전투를 치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전쟁의 승리보다 거룩함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의 거룩함과 성도의 거룩함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거룩함이 회복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어떤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성결예식을 치른 이튿날 아침에 이스라엘을 지파별로 집합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방식은 지파와 족속과 가족과 남자별로 축소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른바 최소단위로 압축해가는 방식이지요.
우리는 제비뽑기하는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상상해 보면서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범죄 한 당사자도 가슴 졸이면서 참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졸이고 호흡이 가빴겠습니까? 제비뽑기를 통해 자기가 밝혀질 것은 자명할 일일 텐데 자기가 지목될 때까지 능청스럽게 견뎌야하는 그 양심은 도대체 어떤 양심이었을까요? 이처럼 범죄 한 인간은 누구든지 끝까지 자기를 감추고 싶은 속성이 있나 봅니다. 제비뽑기하는 도중이라도 스스로 자기 죄를 자백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발각될 것은 분명한데 말입니다. 범죄 한 인간은 대부분 이런 양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간은 제비가 자기에게 뽑힐 때까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비뽑기의 실수라도 기대한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무지입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방법입니다(레16:8, 민26:55). 잠언서16장33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요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간은 끝까지 버티다가 제비뽑기로 자기 죄가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조건없이 용서해주십니다. 아간은 그런 절차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속이고 양심을 속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간과 아간의 가족 모두가 처형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노를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읍과 그 땅을 붙여주셨습니다(수8:1).
거기다가 보너스를 주십니다. 아이성에서 탈취한 모든 전리품들은 스스로 취하라는 것입니다(수8:2). 여리고성의 탈취물은 바치라고 하셨는데, 아이성의 탈취물은 스스로 취하라고 하십니다. 여리고성의 탈취물은 가나안의 첫 열매요, 아이성의 탈취물은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아이성을 쳐서 승리했습니다. 아이성의 전투를 통해 우리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정상이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혹시 한번 실수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외면치 아니하시고 받아주시고, 이기고 승리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꼭 큰 병으로만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리 건강에 치명적인 아픔과 고통을 주면 패배를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벌어진 것은 아닌지, 관계가 깨어진 것은 아닌지, 혹은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하여 친밀함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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