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님네 전화번호
이 영 희
별님네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가 그 번호를 알게 된 것은 봄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 저녁의 일입니다.
거리에 저녁빛이 짙어갈 무렵. 가로등은 달맞이꽃 피어나듯 조용히 밝아옵니다.
이맘때가 되면 늘 그리워지는 얼굴이 있습니다. 꼬옥 껴안아주고, 이마에다 뽀뽀를 해주고 싶은 얼굴입니다.
그날, 별님네 전화번호를 알게 된 그날은 유난히 포근한 저녁이었습니다. 여태껏 맵싸하던 바람이 마치 깜장비단처럼 목덜미에 감기었으니까요.
봄이 온다는 거와 그리는 얼굴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어쩌면 아무런 상관도 없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봄이 다가오는 저물녘, 나는 더욱 가슴 가득히 그 얼굴을 그리지 않을 수 없읍니다.
꼭 보고만 싶은 데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꼭 품에 안아주고 싶은데 안아주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는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읍니다.
옷집 이웃에는 빵집이, 빵집 다음에는 침대가게가, 침대가게 옆에는 책가게, 책가게 지나선 시계방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거리를 가다가, 자그마한 꽃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읍니다. 환한 민패 유리창 너머에 활짝 핀 프리뮬러꽃 더
미가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프리뮬러, 분홍안개.
--프리뮬러, 봄에 피는 꽃.
한길에 서서 노래하듯 하던 나는 그 연분홍 꽃더미 속에 새까만 전화통이 놓인 것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공중전화가 있는 꽃가게였읍니다.
나는 가게문을 밀고들어가, 꽃속에 묻혀 있는 수화기를 손에 들었습니다. 한 군데 전화 걸어둘 곳이 생각난 탓입니다.
수화기에는 꽃향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오련한 그 향내를 맡으며 나는 잠시 망설여야만 했습니다. 갑자기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74국이던가, 아니면 73국이던가? 1259이던가, 5592번이던가------ 수자에 관한 기억이란 가끔 장난감통 속처럼 뒤죽박죽이 될 때가 많습니다.
서기 1408년, 이씨조선의 이태조가 세상을 떠났다거니, 서기 1564년, 영국의 유명한 시인 셰익스피어가 세상에 태어났다거니 하는 수자를 한강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이 외어야 하는 어린이를, 내가 더러는 동정하고 더러는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읍니다.
이렇게 잠시 동안 수자의 교통정리를 하고 보면, 굳이 전화 걸어야 할 일도 없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은 번번이 이상스런 노릇입니다. 반드시 걸고 싶은 곳이 한군데 있다면, 내 가슴에 달처럼 떠 있는 얼굴 임자에게일 뿐, 그러나 그 임자에겐 전화가 없읍니다.
나는 덮어놓고 다이얼을 돌렸읍니다.
“따르릉·-----”
곧 신호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당황한 내가 미처 수화기를 놓기도 전에 전화 받는 이의 목소리가 줄을 타고 울려나왔읍니다.
“별입니다!”
아주 맑은 목소리였옵니다.
“네?”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나는 되물었읍니다.
“별이요?”
“네, 별의 교환대입니다. 전화를 어디로 대드릴까요?”
“별의 교환대------저 밤하늘의?”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밤하늘을 우러러보았읍니다. 유리로 연 꽃가게 지붕위의 남색 하늘엔 여남은 개의 별들이 눈부신 별사탕처럼 박혀 있었읍니다.
맑고 고운 목소리는 재우쳐물었읍니다.
“------어딜 대드렬까요? 달님네입니까, 직녀네입니까? 아니면 별님네? 어디든지 원하시는대로------”
별의 전화교환수는 상냥스럽기도 합니다.
이 교환대를 통하여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여러분들은 짐작하시겠지요, 물론 내 가슴속의 그리운 얼굴에게였읍니다.
그런데 그 신기한 전화번호가 몇 번이냐고요? 이 얘기속에서 나는 벌써 그 번호를 일러드린 것 같온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