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다스들(背信者)
김광한
윤의병 신부가 쓴 이름없는 신자들의이야기 隱花(숨은 꽃)
이계중(李啓重)신부(당시) 세종로 본당 주임 신부의 스승인
윤의병신부의 글을 모아 교회사연구소에 제공했다. 윤형중 신부의
5촌 당숙인 윤의병신부는 1951년도에 북괴에 납치 당했다.
유다스란 예수를 배반한 갈리옷 사람 유다라고 한다. 보통 유다스란 이런 예수님만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나 스승,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국가를 배신하고 자신의 이득을 취한 간교한 자들을 일컫는다.한국천주교 초입,박해시 유다스는 정부쪽의 정보원이 아니라 같은 신자나 신자를 가장한 민간인들이었다.이들은 관군들로부터 약간의 돈을 받고 신자들을넘겨주었다.유다가 은전 30량을 받고 로마군에게 넘겨주듯이 은전 30전이라면 지금 돈으로 3만원 정도했을 것이다.
유다스는 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을까? 그가 배반의 대가로 받았다는 돈은 고작 죽은 나그네나 묻어주는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살 수 있던 금액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악하기 그지없던 그가 단순히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다스는 자신이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던 예수의 어리석음에 실망했다. 그 실망 때문에 유다스는 그리스도를 배신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구세주를 배신했다는 절망감은 그에게 스스로 목을 매게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나 자신의 목을 맨 일은 모두 그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박해시대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신자들은 아마 그 유다스와 같이 희망과 실망과 절망을 뒤범벅하여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러기에 박해 때마다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희망이었던 새로운 믿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 유다스의 길을 걸었는지 모를 일이다.
1815년 박해 때의 전지수
1815년 3월 경상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그곳 신자 가운데 전지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돌아다니며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여 연명했다. 교우들은 자신들의 곤궁한 처지에 비하여 많은 동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진 것이 모두 바닥나 애긍이 줄어드니, 전지수는 구걸로 받는 것에서 별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교우들을 밀고할 생각을 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복수도 되었고, 또 한편 저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약탈하여 그 오죽잖은 재물을 거침없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심보에서였다.
당시 관행으로는 범죄자를 밀고할 경우 그 죄인의 재산은 밀고자의 몫이었다. 전지수는 바로 이 점을 노렸던 듯하다. 이에 ‘흉악한 배신자’ 전지수는 교우들을 등쳐 먹을 요량으로 그해 부활절에 안동 관아의 군졸들을 데리고 청송 노래산에 숨어 살던 신자들을 체포했다.
그런데 1815년 11월 무렵, 배신자 전지수도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 감사는 그를 굶겨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옥에 갇혀있던 신자들이 날마다 얼마 안 되는 배급을 그에게 나누어주어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물론 신자들은 그가 자신들을 밀고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뒤 전지수가 석방되어 거의 알몸으로 내쫓겼을 때에도 신자들은 그에게 몸을 가릴 옷을 주었다. 신자들이 옥중에서 전지수에게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던 때는 자신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경상도 신자들은 참다운 애덕을 가지고,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든 외교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인 전지수가 굶주리자 먹을거리를 주었고, 헐벗은 그를 입혀주었다. 이 복음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19세기 초엽 두메산골의 신자들까지도 복음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고 실천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유다스 전지수가 자신의 신앙공동체를 포기하게 되었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 전지수도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에 대해 유다와 같은 실망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고발당했던 신자들은 죽음을 앞둔 자신들의 앞길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기에, 자신들을 고발한 사람까지도 따뜻이 배려할 수 있었을 게다. 아마도 전지수는 그 순교자들에게 큰 빚을 진 처참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1839년 기해 박해 때의 김순성
1839년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기해 박해이다.이 박해에서는 배반자 김여상이 동료들을 잡아넣으려고 맹활약했다. 김여상은 당시 관청자료에서 김순성(金順性)으로 나온다. 그 박해를 기록한 책인 “기해일기”를 보면 그의 세례명은 요한으로 나온다. 그는 한국교회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배신자로 평가되어 왔다. 선교사들은 그를 ‘추악한 배반자’, ‘거짓 형제’로 규정했다.
그의 밀고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을체포한 사람도 김여상이었다. 그는 간특한 잔꾀로 순박한 시골 신자 정화경 안드레아를 속여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아냈고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결국 관헌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의 행동거지에 대해 달레 교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배반자 김여상(순성)은 신자들의 집회에는 언제나 제일 먼저 와서 교리문답과 성서를 사람들 앞에서 읽으면서 천주께서 그들에게 보내시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참아 받으라고 모여있는 모든 이에게 권고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의 신임을 샀고, 그래서 관헌에게 가장 정확하고 가장 상세한 밀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순성은 박해가 끝난 다음 포상으로 하급관직밖에 받지 못했고, 아무런 물질적 이득도 얻을 수 없었다. 박해가 끝나자 그도 용도폐기되었다. 그 뒤 그는 여러 사건에 끊임없이 연루되어 투옥되거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1862년에 일어났던 이하전의 왕위찬탈 음모에 연루되어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김순성은 대역부도죄인으로 처형당해 그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잘렸다. 그의 잘린 지체들은 전국 8도를 돌면서 반역자에 대한 경계가 되었다. 이 사건은 얼마 뒤 무고였음이 밝혀졌지만 그는 끝내 신원이 회복되지 못했다. 1839년 박해의 진상에 관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김순성은 ‘교활한 정탐꾼이며 밀고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또한 그의 비참한 말로가 인과응보적 차원에서 배신자가 맞이해야 할 당연한 결과인 듯 묘사해 놓았다.
천주교 박해 시대를 그린 소설 은화(隱花)가 있다. 윤의병 신부가 쓴 군난(窘難) 소설이다. 은화란 우리말로 숨은 꽃이란 말이다.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10여 년 동안 '경향잡지'에 연재됐던 이 작품은 충북 진천의 배티성지와 용진골 일대를 무대로 혹독한 박해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 가는 한 부부의 신앙생활을 그린 군난소설이다. 여기에도 이름모를 유다스들이 많이 등장한다. 충청 내륙지방의 실제 지명과 이성칠, 서금순 부부의 행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생명을 위협받으며 슬기와 용기로 신앙을 지켜나간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오늘날 안일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삶의 자극과 용기를 심어준다.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해 1939년 1월부터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연재되어 1950년 6월 저자가 인민군에게 피납 되기 전까지 만 11년 동안 원고지 2,000여 장이 연재되었다. 박해시대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 모습, 그리고 순교를 소재로 박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며 신앙을 증거하려는 교우들의 고뇌와 비애와 인고와 기쁨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늘의 유다스들
자신이 아쉬울때는 찾아가 온갖 아첨을 떨다가 그 사람의 원력이나 금력이 다했다고 생각했을때 오히려 자신을 도와준 은인의 뒷통수를 치는 요즘의 정치 배신자들을 유다스라고 한다.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보다 더 인기가 높은 박대통령을 팔아서 국회의원에 당선이 된 새누리당의 간신배들,이 연놈들이 바로 유다스로 후세에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 이름들이 너무 추접스러워서 글로 쓰기가 너무 지저분해 생략한다. 국민들이 다 알고있기 때문이다.
두목 이름만 밝힌다 김무성이란 얼굴 양푼만한 자이다.여자 대표는 나경원이란 얼굴 반반한 간교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