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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바람에 앉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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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앉아]
송낙현 시집 / 월간 순수문학(2016.06.3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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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앉아
송낙현
저 꽃에 벌과 나비가 수시로 놀다 가더니
솜털날개 달린 꽃씨가 주렁주렁
꽃대에 비눗방울 모양 부풀어 있다
바람을 기다리며 길게 기린 목처럼 올라와 있다
세찬 바람이 불면 저 씨앗은 정처 없이 날아가리라
아무 연고도 없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생면부지의 땅으로,
몸부림치면서 스스로 터전을 잡고 정착하리라
까마득한 낭떠러지 절벽에 바둥바둥 달라붙어
혹은 시멘트로 둘러싸인 불모의 틈새에도 비집고 들어가
생명을 틔우는 그 절규 같은 숨소리를 우리는
한 번도 귀담아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내가 들녘에 나와
이처럼 바람에 앉아 잇는 것은
나도 저처럼 한없이 날려가 어느 누구의 가슴에
육중한 대문 같이 닫혀있는 그 심장에 뿌리를 내려
흔들려도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다
할머니 손두부 같은
송낙현
글을 읽다가 흐미하게 보여 돋보기를 하나 샀다
매일 아침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는다
참 많은 사건 사고들이 연일 대서특필 된다
구석구석에 온갖 독버섯이 자라나고 있다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인 곰팡이에 열병을 앓고 있다
세상이 마치 도수 높은 돋보기 너머처럼
중심을 잃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고 있다
방구석에 들어박혀 혼자 용을 쓰면서 나라를 걱정한다
자기가 뭐 대단한 애국자도 아니면서, 은퇴한 주제에
이봐, 그래봐야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쓰잘 데 없는 걱정 말고 차라리 돋보기를 쓰지 마
희미하면 희미한 대로 어렴풋이 살아가면 되는 거지
뭐 그렇게 애타하나, 허 참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아니야
긴 장마철, 억수 같은 소낙비에 하늘이 간수를 듬뿍 넣어
골고루 뿌려 주었으면 좋겠다
할머니 손두부 같은 구수한 세상이 되도록……
인생
송낙현
옥문玉門부터
토문土門까지
길어야 백여 년
남사당 줄타기
구경하듯
언제나
조마조마
그저 그냥
송낙현
안녕사하시지요, 선생님
어저께 봄 꽃 피우더니
벌써 푸른 잎사귀 무성하내요
바쁘게 지나간 봄이네요
그냥 안부 문자 올립니다
예, 세월
참 빠르네요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요
무척이나 궁금했는데요
아니 뭐
별 뜻은 아니고요
그냥 그저요
정말로
그냥 그저요
종종 연락주세요
그저 그냥
그렇게요
눈 거울
송낙현
내 눈으로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거울이나 사진에서 볼 수도 있지만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너무 차갑고
사진 속의 나는 이미 지나버린 옛적일 뿐이다
그러다가 사랑스런 너를 만나면
따사로운 너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나의 생동하는 얼굴을 본다
순간순간 진솔한 나의 모습을
언젠가 내 영혼이 이륙하는 날
촉촉이 이슬 맺힌 너의 눈망울 속에
아슴푸레 남아 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 잔잔하게 웃음 머금은
나의 마지막 모습도 눈 거울 속에서…
퇴고推敲
송낙현
어머니 뱃속에서
눈 달고 코 달고 입 달고
나온 원고를
오늘도 고치고
내일도 고치고
퇴고만 하다가
못 쓰게 망가질라
구겨진 휴지처럼…
서울의 명품거리
건물마다 즐비한
성형외과 간판
황간역 까치
송낙현
황간역에 기차가 서면
시가 내린다
그걸 고이
항아리에
담아 놓는데
달이 뜨면
까치가
물고 날아가
높다란
철탑 위에
집을 짓는다
연리지가 있는 오솔길
송낙현
불덩이 하나가 숲 속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 뒤를 또 하나의 불덩이가 손을 잡고 따라가고 있다
잡은 손, 마디마다 타타탁 섬광처럼 불꽃이 튀긴다
두 개의 불덩이다 용암처럼 흘러내려
한 개의 불덩이로 부등킨다
산새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날아간다
풀잎들도 겁먹은 듯 싸르륵 씨르륵 움츠리며
몸을 사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진한 사랑의 향기가 맴돌아 퍼진다
저만큼 떨어져 내가 넋이 나간 듯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
다가갈 수 없는 그녀의 허상을 품에 안고, 마치
천년으로 사랑으로 빠져들 것 같은 황홀에 젖어…
요양원 창문 너머
송낙현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비야
쭉쭉 오너라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라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바람아
찬바람아
너라고 쌩생 달려오너라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송낙현
대왕거미 한 마리가 골목시장 높다랗게
이리어지 줄을 치며 분주하게 설친다
가로 세로 엮어서 출렁출렁 그물을 치고 있다
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신기해서
구경하고 싶어 앉았다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기웃대다 앉았다
벌레 한 마리 나무 타고 올라오다가
잠간 쉬어 가라고 앉았다
하나씩 하나씩 자취가 감쳐지고 있었다
앉아 있던 모두가 사라지고 없었다
거미의 목젖이 부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바람
송낙현
바람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면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밤낮없이
쉴새없이 일을 찾아 헤맨다
해와 달처럼 낮과 밤을 교대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잠에 취해 있으면 흔들어 깨우고
꽃가루 날라 사랑을 맺어 주고
이리저리 씨앗 날라 생명을 움트게 한다
검은 구름 걷어 네 청정 하늘 찾아주고
짙은 안개 몰아내 길 환히 밝혀 준다
강물도 한 번씩 뒤집고
바닷물도 끊임없이 헹가래치며
속살을 씻어 준다
바람은 지치지 않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일을 하며
불평 한 번 하지 않는다
지구를 사랑하지만
모든 것은 숨어서 한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떠나 버린다
머물지 않는다
바람 떠난 그 자리
봄이 되면 새순이 돋아오를 것이다
갓밝이
송낙현
저 밀리 수평선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만나
밤새도록 출렁출렁
사랑을 하더니만
불덩어리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다
어둑어둑 장막에
빨간 피 쏟으며
사방을 불그스레 달아오르는데
바람은 황금물결 배내 요를
널따랗게 깔고 있다
희미하게 불 밝혀
배 한 척 떠 있고
갈매기 부산하게
날아오른다
산파産婆일까
새롭게 하루가
밝아 오고 있다
장엄한 무대를 열면서…
먼 하늘 흰 구름
송낙현
바람 부는 언덕
청보리 푸른 물결
가는 허리에 휘감고
임 떠난 그 자리
종달이 높이 울어
고개 들어 올려보니
먼 하늘 흰 구름
그대 모습 그리네
빈 자리 하나
송낙현
호수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출렁출렁 물결 헤집고 철새들 주르르 오선을 수놓는다
천상의 화음이 줄 타고 내려와 올챙이 같은 음표音標로
송알송알 탈바꿈한다
싱그러운 바람이 현란하게 지추휘하고
삼라만상 연주자들이 저마다 기량을 뽐내
감미로운 멜로디가 산천을 휘감는다
숲과 나무들이 온몸을 뒤틀며 미친 듯 춤을 추고
물고기가 솟구쳐 기립 박수를 친다
한 떼의 오리가 자맥질을 한다
안개꽃 관중이 온 산을 자욱이 뒤덮고 있다
비 오는 날 호수는 환상의 무대다
그 무대 한 켠에 내가 서 있다
빈 자리 하나 곁에 놓아 두고…
단풍 1
송낙현
나도 한 번 걷고 싶다
기차 타고 배 타고 비행기 타고
세상 한 번 구경하고 싶다
나도 한 번 새처럼 훨훨 날아 이산도 가고
저 산도 가고 바다도 가보고 싶다
매일처럼 오다가 며칠째 오지 않는
너도 찾아가 혹시라도 아파서 못 오는지
성큼성큼 다가가 물어 보고도 싶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느니 차라리
내가
가 보고 싶다
누구든 나에게 발을 다오…
누구든 나에게 날개를 달아 다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자리 서서
하늘 받치고 너무 무겁다
평생을 울고 또 울다가
피눈물 왈칵 쏟아 온 산을 덮어 버렸다
눈
송낙현
하늘이 곳간을 열어
내리는 거다
목마른 모두에게
속까지 얼얼한
아삭 아삭 빙수를 버물어
온 산천에 하얗게
잔치를 벌이는 거다
세찬 겨울바람
오들 오들 떨고 있는
헐벗은 가지에
시리게 영롱한
뽀송뽀송 솜꽃을
피우는 거다
길에도, 지붕에도
마당에도, 산과 들
하늘 닿는 온갖 곳 골고루
소리 없이 소복이
쌓아 두는 거다
봄이 오는 길목에
질퍽질퍽 양수가 넘치게…
도란도란
송낙현
탐사선 하나가 혜성과 만나듯이
꿈인지 생시인지 기적 같은 만남으로
너와 나 하나 되어
내가 호롱불로 빗나고 있을 때
너는 등잔이 되었고
내가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
너는 억새가 되었다
쉬임없이 오르고 또 오르다가
이제 우리 꼭지점 지나
너털너털 하향 길 걸으매
검은 머리 희끗희끗 눈꽃 피어도
새 씨앗 파릇파릇 자라고 있으니
따뜻한 햇살처럼 보담아 주며
여생餘生길 도란도란 정답게 걷자
직립
송낙현
이 세상에 첫 신호 울음 갖고 태어나
엄마 품에 안겨 수도 없이 보채고
천정 보고 누워서 수없이 주먹 치고
수없이 발로 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수없이 뒤집고 수없이 엎드려 팔 벌리고
낑낑대다가 수없이 배밀이 하고
수없이 기어 다니다가
소파 모퉁이 잡고 수없이 일어서다가
무량으로 넘어 지다가
드디어 직립
첫돌 맞은 우리 아기
얼음조각 배
송낙현
겨울이 물러나고 있는 강물 위에
수많은 얼음조각 배가 일렁이며
열심히 봄을 실어 나르고 있다
그 봄이 자기 모선母船 얼음을 부숴 버리고
머지않아 그 또한 그로 인해 사라질 것임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래도 열심히 봄을 나르는 것은
가슴 깊이 뭔가 묻어둔
속마음이 있기 때문일 거야
한 송이 꽃이라도 피우고 싶은
한 포기 나무라도 키우고 싶은
뜨거운 욕망이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비록 자기는 없어지더라도…
낮달
송낙현
밤새도록 칭얼대는
애기 보느라 얼굴이
핼쑥하게 핏기를 잃고
대낮에도 저렇게
맥없이 누워 있다
영양제 주사
한 대 놓아 줄
누구 의사 없을까
새처럼 훨훨
날아 올라가…
질주
송낙현
달팽이가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추석명절 맞으러
고행 가는 길
설레임 가득히
가슴에 담고
쌩쌩 바람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질주하는 바람 사이로
산과 들이 딋걸음친다
아무리 달려도
달팽이의 고향길은
참으로 멀다
가자가 자고
아예 집까지 업고
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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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내가 내 이름으로 된 시집 한 권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삶의 흔적을 깨끗이 닦아 내고 품고 있는 미래의 꿈도 함께 버무려 한편 한편의 시를 모았다
많은 아픔이 뒤따랐다. 자아실현을 위한 고난의 길이다.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보람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다고 기대를 해 보긴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금년에 칠순을 맞는 아내에게 이 한 권의 책을 조촐하게 생일선물로 택했다. 아내의 반응이 어떨지 미지수다.
나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고 어렵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신 부모님께 늘 고마운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살아오는 동안 곁에서 지켜 봐 주시며 많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이 시집을 출간해주신 朴永河 주간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2016년
붐이 영그는 들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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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낙현 詩集 [※바람에 앉아※]
[ 해설 ] -
문여기인文如其人의 풍경을 읽다
-송낙현의 시집『바람에 앉아』를 중심으로
나호열(시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1
『바람에 앉아』는 시인 송낙현의 첫 시집이다. 종심從心을 넘어서서 선보이는 80여 편의 시는 열렬한 창작에의 욕구의 산물이며 시인 자신의 삶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겠기에 각별할 뿐만 아니라 시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바람에 앉아’의 문장이 넌지시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오욕칠정을 넘어선 초탈과 관조의 경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언어의 조탁彫琢을 통하여 미적 성취를 거두고 싶은 것일까?” 하는 시인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개관하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짚어보는 것이 시집『바람에 앉아』와 시인 송낙현의 면모를 가감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몇 마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작품(시)이 그 작품 생산자(시인)의 삶을 투영한 체험의 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작품이 시인의 인품과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작품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구현이라는 점을 잘못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작품에 드러난 언명이 마치 작품 생산자의 인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고래의 예술론으로 언급되는 회사후소繪事後素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사이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몇 가지 관점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회사후소의 해석을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백지가 필요한’ 것처럼 시를 쓸 때 ‘맑고 그윽한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자칫 시심詩心을 ‘선善한 마음’으로 가식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작품(시)을 고매한 인격의 표현으로 착각하여 언어의 쓰임새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대교약졸이 뜻하는 바는 ‘진정성이 결여된 큰 기교는 말장난에 그쳐 졸렬함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시심을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을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의 시나 시집의 성패를 가르는 지점은 회사후소와 대교약졸의 함정을 피하는 그쯤이 될 것이다.
2
시집『바람에 앉아』를 개괄하여 보면 1부엔 시인의 인생에 대한 회고와 사회현상에 대한 감상을 , 2부는 여행을 통한 사색을, 3부는 자연 현상을 묘사한 작품, 4부는 가족과 가정의 소중함을 다룬 작품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제들이 시인의 세계관이나 삶의 인식을 드러내는 일관된 통로인가의 여부에 따라『바람에 앉아』의 성취가 결정될 것이기에 눈여겨보아야 할 몇 편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알다시피 송낙현 시인은 오랜 공직생활을 훌륭히 마친 분이다. 뒤늦게 시업에 뜻을 둔 늦깎이 시인으로 열정 가득한 시들을 생산할 수 있는 근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의 현대사가 말해주듯이 전쟁과 가난의 역경을 헤쳐 나오다 보니 자아의 탐구나 자기애自己愛의 결여를 뒤늦게 깨닫는 세대의 각성일까? 오래 전 미당未堂 선생의 궁극의 시로 명명한 예지시, 즉 풍부한 삶의 체험을 예지叡智로 발현함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맨 먼저『바람에 앉아』시편에서 산견되는 것은 동심童心이다. 동심에는 부정이 없고, 비판이 없다. 시인의 연치年齒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나무가 우산을 쓰지 않는 것은/온몸으로 비를 맞아 속살까지 젖어서/가슴 깊은 사랑을 뿌리로 내리기 위해서다/…중략…/한없이 즐겁게 때로는 눈물겨운 괴로움 속에서도/너무나 뜨겁게 지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나무는 왜 우산을 쓰지 않을까」부분)’와 같은 정감이 가득한 시심의 출발이 동심이기 때문에 시인의 회고는 허세로 겉돌지 않고 육화肉化되어 있다. ‘내가 산을 오르고 있을 때/이미 내려오는 사람을 보면/나는 조금은 부러워진다/저렇게 무사히 내려오기가/쉬운 것만은 아니니까…(「등산」마지막 연)’처럼 삶에 대한 태도는 진솔하고 일관되게 경건하기조차 하다. 이와 같은 동심은 시집 전 편에 걸쳐 혼연히 드러나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시집『바람에 앉아』의 감상이 뜻깊을 수 있다.
옥문玉門부터
토문土門까지
길어야 백여 년
남사당 줄타기
구경하듯
언제나
조마조마
-시「인생」전문
먹는 일, 자는 일, 배설하는 일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조마조마하게, 팽팽하게 긴장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걷는다/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환승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즐겁다(「환승」마지막 연)’과 같은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기쁨에서 슬픔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환승하는 일을 체념이나 푸념으로 허비하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나이 들어감을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환승으로 받아들일 때 삶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3
여행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고, 다른 세상의 풍물 속에 자신을 되비쳐보는 일이다.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들 틈 속에서도 시인은 동심의 때묻지 않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걸린 새 둥지를 보며 미물인 새들의 다복을 기원하며 연등을 걸어주고 싶다는 마음(「초파일 연등」), 강물에 빠진 산을 건져주려는 마음(「은둔」)이 이윽고 고향에 닿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눈물겨운 일이다. 그리하여 가난하였으나 상한 고등어 한 마리를 저녁상에 내놓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나가는 어머니와 물끄러미 천장을 쳐다보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간고등어」)
봄소식 지금쯤 고향에 가면
닫았던 문 활짝 열고 따사로운 햇살 받으며
논두렁 밭두렁 여기 저기 들판에 나와
쑥, 냉이, 풋나물 가득 채운 바구니 속에
하늘 높이 종다리 청아한 노래
포개어 보드레 담고 있겠지…
-시「고향에 가면」마지막 연
다시 생각해 보면 동심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자라난다. 맹자는 사단四端의 으뜸으로,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믿음으로 측은지심을 세웠지만 분별이 없는 동심이 튼튼하지 못하다면 측은지심은 발현될 수 없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바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바람’을 보지 않는 시인의 시각이다. 흩어짐, 정처 없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바람’의 의미를 생명의 원천으로 감지하는 시인의 눈은 깊은 통찰로 가득 차 있다.
바람은 지치지 않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일을 하며
불평 한번 하지 않는다
지구를 사랑하지만
모든 것은 숨어서 한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떠나 버린다
머물지 않는다
바람 떠난 그 자리
봄이 되면 새순이 돋아오를 것이다
-시「바람」3,4연
이쯤에서 바람은 생명의 전달자, 매개자로 세계화된다. 동심은 측은지심으로, 측은지심의 구현체로 바람을, 바람의 속성으로 존재의 의미를 치환하는 시인의 예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바람에 앉아」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저 꽃에 벌과 나비가 수시로 놀다 가더니
솜털날개 달린 꽃씨가 주렁주렁
꽃대에 비눗방울 모양 부풀어 있다
바람을 기다리며 길게 기린 목처럼 올라와 있다
세찬 바람이 불면 저 씨앗은 정처 없이 날아가리라
아무 연고도 없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생면부지의 땅으로
몸부림치면서 스스로 터전을 잡고 정착하리라
까마득한 낭떠러지 절벽에 바둥바둥 달라붙어
혹은 시멘트로 둘러싸인 불모의 틈새에도 비집고 들어가
생명을 틔우는 그 절규 같은 숨소리를 우리는
한 번도 귀담아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내가 들녘에 나와
이처럼 바람에 앉아 있는 것은
나도 저처럼 한없이 날려가 어느 누구의 가슴에
육중한 대문 같이 닫혀 있는 그 심장에 뿌리를 내려
흔들려도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다
-시「바람에 앉아」전문
바람이 존재의 속성인 유한성有限性 그 자체이거나 개별적 존재 자체를 표징하는 것이라면 개별적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맺음은「바람에 앉아」에 드러난 바와 같이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바람’인 존재, 즉 타자他者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인식은 사변思辨으로 이루어진 관조가 아니라 시인이기 전의 인간 송낙현의 삶의 이력이며 증표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4
위와 같은 생명과 생명 사이의 관계맺음은 자연 또는 자연현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노자는 ‘자연은 인간을 추구로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도덕경 5장)’라고 하여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하였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현상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음을 갈파한 혜안은 오늘날의 삶에서도 그 의의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송낙현 시인은 이를 체득하여 ‘하늘이 비를 내리는 이유는/풀 한 포기 작은 생명 하나라도/정화수靜化水 한 모금 먹이고 싶어서다’(「비」부분)고 묘파하고 더 나아가 ‘비는 하늘이 글렁글렁 흘리는 사랑의 눈물’(「비」마지막 연)로 승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무모함을 은근히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가 꽃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고 꽃받침이 변형된 주머니 속에서 안으로 피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로부터 이끌어낸 ‘그걸 가만가만 숨어서 누군가는 드나들며/사랑을 도왔을 거야/그래서 열매가 열리는 것일 거야/미로를 통해서 은밀하게 서로가 연락이 있었을 거야/그저 우리만 모르고 있었을 거야’(「무화과」1연 부분)와 같은 자연의 비의를 우리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권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아래와 같은 시에서 유니크한 선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눈은 하늘이 부쳐 온 다이아몬드 엽서다
해마다 잊지 않고 우주의 온갖 소식 담아서
해 소식, 달 소식, 별 소식, 천둥 소식, 번개 소식
골고루 담아 보내 오는 거다 궁금하지 않도록
답장은 필요 없이 받기만 하도록 보내는 거다
다 읽으면 사라지게 하늘이 배려하는 거다
보관창고 없어도 걱정하지 않게
함박눈 오는 날이면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들길을 걷고 싶다 새하얗게 쌓이는
눈부시게 영롱한 다이아몬드 엽서를
뽀드득 뽀드득 소리내어 읽으며…
-시「다이아몬드 엽서」전문
동시童詩로 읽어도 즐거운 시에 더 이상 첨언은 필요 없다. 이러한 순진무구한 마음은 행복 바이러스가 되어 나에게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더 넓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퍼져나간다.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시인의 가족애는 그래서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영하의 매서운 추위에
뽀얀 김 내뿜으려
둘이서 조잘조잘 걸어가다가
버스 정류장 근처 구멍가게에서
타타탁 튕기며 고운 속살 드러낸
따끈따끈한 군밤 한 봉지 사서
옆 주머니 깊숙이 찔러주는
그런…
-시「정情」전문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온기와 같은 것, 말하지 않아도 마음에 와 닿는 정情이 메말라 가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유리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나지막히 읊조리는 시인은 그래서 또 이렇게 간절한 소원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똥별이
섬광처럼
빛을 내며
길게
밑줄을
긋고 있다
“사랑하며 살자”
-시「밑줄」전문
어둔 밤하늘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이 한 순간 빛을 내며 사라지는 것임을 목도하는 순간 포착한 “사랑하며 살자”의 밑줄은 아름다운 만큼 서늘하지 않은가!
5
이 글의 서두에서 글과 글쓴이의 인품을 동일시했을 때의 혼란이 어떠한지에 대해 잠시 언급한 바가 있다. 작자 자신이 언어의 미혹에 빠져 글의 진정성이 결여되기도 하고, 시가 허구fiction라는 일차적 정의를 잘못 이해한 독자들이 겪게 될 난국을 회피하기 위해서 조심스러웠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면서『바람에 앉아』전편을 관류하는 청정한 동심의 세계가 시인 송낙현의 삶 그 자체이었음을 확인하면서 필자의 성급한 주장을 철회하고자 한다. 개인적 동심이 외연을 넓혀가면서 삭막한 세상을 향한 안타까운 몸짓과 측은지심이 어떻게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승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준 시집『바람에 앉아』는 안개꽃같이 무리지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기교를 사상捨象하고 직필直筆의 어감을 유지한 시법詩法은 시인의 심성과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나 있음을 우리 모두는 다 같이 인정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은 말 그대로 글과 그 사람의 인품이 일치함을 이르는 말이다. 시집 『바람에 앉아』는 시인 송낙현의 삶과 사상을 올곧게 드러낸 징표이다. 이와 같은 기상氣象이 더욱 빛을 발하여 후세의 큰 길에 넘쳐나가기를 기원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無籬齋에서 나호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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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개인적 동심이 외연을 넓혀가면서 삭막한 세상을 향한 안타까운 몸짓과 측은지심이 어떻게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승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준 시집『바람에 앉아』는 안개꽃같이 무리지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기교를 사상捨象하고 직필直筆의 어감을 유지한 시법詩法은 시인의 심성과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나 있음을 우리 모두는 다 같이 인정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 나호열의 <해설> 중에서
전편에 걸쳐 성장과 일상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담백하게 그리는 시인이다.
말년에 대도시 생활 속의 속진俗塵을 거두고 어린손자 등으로 단란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런 세밀한 일상사를 군더더기 없이 한 폭의 회화繪畵처럼 그려 낸다. 그러면서도 고향의 바람을 내내 못 잊어 한다,
어린 시절의 바람과 삶을 회상해 다시 작품으로 이끌어 내고자 한다. 지금은 때로 속기俗氣가 풍기지만 나는 본다 그의 숨은 내공內攻을…
― 장윤우의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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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낙현 시인∥
∙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 동국대학교 법학과,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헹정학 석사)
∙ 경북 예천경찰서장, 의성경찰서장, 서울 남대문경찰서장을 역임했으며
∙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예술세계』(시) 로 둥단하여
∙ 예술시작가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서울시인협회 회원, 강남문인협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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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작회 송낙현 시인님, 인생의 멋과 맛을 겸비하신 ~~참 멋장이십니다.
1월 7일 정기총회날 출간기념패를 드렸습니다.^^ ㅎㅎㅎ
최재경 시인님, 저의 시집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껏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예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때가 새롭습니다. 출간 기념패를 잘 간직하겠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21. 11. 14 운천 송낙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