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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 연구한 가톨릭 사제
이병욱 교수가 《인도불교사》(라모트 지음, 호진 스님 역)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국어에 웬만큼 숙달되지 않는 한, 외국 서적을 읽고 어떤 학문적 관점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좋은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우리 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호진(浩眞) 스님이 8년여 ‘인고와 보람의 세월’에 걸쳐 번역한 《인도불교사》는 실제로 우리 불교학계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웬만한 불교학 전공자라면 사실 책이나 논문 몇 가지를 참고하여 웬만한 수준의 인도불교사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저술할 수 있지만, 번역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다시 말해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해서 접근할 수만은 없는 또 다른 경지의 영역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이 기회에 《인도불교사》 역자인 호진 스님께 삼가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단 한 권의 번역만으로도 우리 학계의 수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인도불교사》가 라모트의 수많은 노작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라모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인 위베르 뒤르트(Hubert Durt, 1936~2018)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983년 5월 5일 에티엔 라모트의 죽음으로 우리는 서양에서 불교 연구의 뛰어난 발전을 이끈 보기 드문 스승을 잃었습니다. 그가 출판한 저술의 방대한 분량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또한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번역하고 주석한 주요 텍스트를 선택한 그의 지혜와 안목에도 우리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라모트가 저술한 글의 정확성과 명확성은 점점 더 많은 충실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주요 저술 중 일부가 영어로 번역된다면 더 많은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독일의 인도학자이자 불교학자인 하인츠 베헤르트(Heinz Bech-ert, 1932~2005)도 라모트가 서거했을 때 한 학술지에 기고한 글에서 라모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라모트 교수는 서구 세계에서 불교에 관한 가장 위대한 살아 있는 권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명을 잃었고, 그를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은 가장 상냥한 친구이자 동료를 잃었습니다.
동료와 제자들로부터 존경받는 학자였지만 라모트는 저술에 그의 개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 열정을 꾸준하게 표현했지만, 객관적 연구를 추구하기 위하여 항상 냉정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아상가(Asaṅga), 바수반두(Vasubandhu)와 같은 위대한 영혼들이 그들의 저술에 자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 “탁월한 차이(distinction)”라고 부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연유로(a fortiori) 번역자와 주석자는 이 위대한 영혼들이 머나먼 “그때 그곳에서(llic et tunc)” 가르치고 저술한 것들을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에티엔 라모트는 1903년 11월 21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 디낭(Dinant)에서 그 지역의 법원장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였던 조르주 라모트(Georges Lamotte)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나무르(Namur) 지역의 아브(Ave)라는 곳에서 로슈포르(Rochefort) 백작을 위해 일했던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디낭은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의 격전지였던 아르덴(Ardennes) 숲 끝자락에 있는 험준한 시골 마을이었다. 디낭이 위치한 뫼즈(Meuse) 계곡은 중세 시대에는 세련된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라모트의 젊은 시절에는 뫼즈강이 오히려 침략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에 이 계곡에서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그중 가장 악명 높은 학살이 바로 디낭에서 일어났다.
라모트는 참혹한 학살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5년부터 1920년까지 고향 디낭에 있는 노트르담 드 벨뷔에 대학(College Notre-Dame de Belle-Vue)에서 고전 그리스와 라틴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대학에서의 학업을 마친 라모트는 가톨릭 사제인 형 아르망(Armand)의 영향으로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루뱅(Louvain, Leuven)에 있는 가톨릭대학교(Universite Catholique)와 메헬렌(Mechelen)에 있는 신학교에서 철학, 신학, 고전 문헌학 등을 공부했다.
1923년도에 가톨릭대학에서 학위(Candidat en Philosophic de S. Thomas)를 받은 라모트는 동양학, 특히 인도학 분야로 관심 범위를 넓혔다. 이어 1925년에는 산스끄리뜨어, 아베스타어, 아르메니아어 등을 공부하여 동양언어 자격증(degree of Licencie in Or-ental languages)을 취득했다. 루뱅과 말린(Malines)에서 예비 연구를 마친 라모트의 동양학자로서의 경력은 카를로 포르미치(Carlo Formichi)의 후원 아래 1927년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그의 로마 체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라모트의 연구에 큰 자극을 준 사람이 루이 드 라 발레 푸생(Louis de La Vallée Poussin, 1869~1938)이었다. 당시 발레 푸생은 겐트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Ghent)의 교수였지만 루뱅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브뤼셀에 살고 있었다. 라모트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루뱅의 한 학교(College Saint-Pierre)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동시에 루뱅대학에서 인도학과 불교학 분야의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929년에 동양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1930년에는 〈바가바드 기따에 대한 주석(Notes sur la Bhagavadgītā)〉을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철학 및 문학박사(Docteur en Philosophic et Lettres) 학위를 새로 취득했다. 그는 또한 대학에서 동양언어 분야 최초의 대상(Laureat des Concours Universitaires)을 수상하고, 여행 보조금을 받아 당시 서양 불교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한 불교학자들인 폴 드미에빌(Paul Demiéville), 알프레드 푸셰(Alfred Foucher), 마르셀 라루(Marcelle Lalou), 실뱅 레비(Sylvain Lévi), 장 프르질루스키(Jean Przyluski) 등의 지도를 받고, 루이 르누(Louis Renou), 장 필리오자(Jean Filliozat), 올리비에 라꽁브(Olivier Lacombe) 등과도 교류한다. 그렇지만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의 이 짧은 부재를 제외하고 라모트는 발레 푸생이 서거할 때까지 그와의 긴밀한 관계를 평생 유지했다.
1930년에 벨기에로 돌아온 라모트는 다시 발레 푸생의 최고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1894년에 겐트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된 발레 푸생은 벨기에에서의 언어 분쟁으로 인해 1929년에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덕분에 연구에 전념할 기회를 얻게 된 그는 귀국한 라모트를 개인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 후 정기적으로 만나 함께 연구를 했다.
1932년에 라모트는 정규직 강사(reader)로 임명되고, 1937년에는 루뱅대학교의 정식 교수(Ordinarius)로 임명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인도학 및 불교학 강의 외에도 그리스 문학을 가르쳤고, 대학의 여러 직책에 선출되었는데, 특히 1950~1952년에는 동양연구소의 회장, 1952년에는 철학 및 문학부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몇 년 동안은 발레 푸생과 라모트에게 격렬한 학문적 활동의 시기였다. 그들은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연구성과를 출간했는데, 그것들 다수는 서로 연관된 저술들이었다. 이때 라모트는 주로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 or Vijñānavāda)의 연구에 집중했지만, 중관(中觀, Mādhyamaka)과 바수반두(Vas-ubandhu) 연구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라모트는 거의 항상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동양학회(Société Belge d’Études Orientales)와 벨기에 고등중국어연구소(Institut Belge des Hautes Études Chinoises)에서 그의 연구성과를 출간했는데, 가끔은 루뱅에서 루뱅대학 시리즈 컬렉션(Recueil: Conférences d’Histoire et de Philologie) 및 박물관도서관(Bibliothèque du Mu-séon) 시리즈로 발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간한 주요 연구성과를 언급하자면, 먼저 발레 푸생이 서문을 쓴 《바가바드기따 주석(Notes sur la Bhagavadgītā, 1929)》이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주요 유식(唯識) 텍스트가 있는데, 《산디니르모짜나수뜨라(Saṁdhinirmocanasūtra, L’explication des Mystères),해심밀경》의 티베트어 버전의 텍스트 편집 및 번역(Recueil, 1935), 그리고 《마하야나상그라하(Mahāyānasaṁgraha, La Somme du Grand Véhicule d’Asa-ṅga), 섭대승론》의 텍스트 편집 및 번역(1938~1939)이다.
그렇지만 그의 학문 여정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 두 번째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이듬해에 라모트는 그의 모교인 루뱅 가톨릭대학교의 도서관이 1차 대전에 이어 두 번째로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국제 원조 덕분에 도서관은 곧 대부분 복구되었지만, 안타까운 것은 하필이면 재난이 닥치기 수 주 전에 스승 발레 푸생이 그의 개인 장서를 도서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44년에는 그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당시 라모트의 아버지와 자매들이 살고 있던 아브 마을이 그 유명한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대학살의 무대가 되었다.
이 암울한 시대를 상기하면서 그의 방대한 출판물을 본다면 우리는 라모트를 자신에게 엄격하고 가혹하면서도 정확한 ‘일 중독자(bourreau de travail, workaholic)’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엄청난 작업량을 부과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불교 경전을 탐구할 때만큼은 결코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순수한 연구에 1시간이 바쳐진다면 검증, 필사, 교정 및 기타 재미없는 작업에 9시간이 소모되어야 한다고 덧붙이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라모트의 관심은 중관으로 옮겨간다. 그는 중관학파의 주요 텍스트 세 가지를 번역하고 주석했다. 그중 하나가 지혜를 관통하면서도 역설적 내용이 담긴 작품인 《유마경(維摩經, Vimalakīrtinirdeśa)》인데, 라모트 개인에게는 특히 소중한 경전이었다. 그의 번역과 주석은 인도 사상사의 걸작 중 하나에 대한 훌륭한 열쇠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석 방법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 여겨진다. 그의 번역은 티베트어역을 기본으로 했지만, 현장(玄奘)의 중국어 역도 상호 대조해가며 번역했다.
라모트의 마지막 위대한 주석 작업은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이 한역한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ñāpāramita-śāstra 또는 upadeśa)》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주석과 번역이다. 그는 평생의 상당 부분을 《대지도론》의 프랑스어 번역본(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에 헌신했다. 그는 먼저 1944년과 1949년에 제1권과 제2권을 출판하고, 20여 년 후인 1970년, 1976년, 1980년에 제3, 4, 5권을 PIOL 시리즈로 출간했다. 색인, 부록, 정오표가 있는 제6권을 포함하면 그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2,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라모트의 국제적 명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작품은 국내에도 번역된 《인도불교사(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des origines á 1’ére Śaka)》이다. 1958년 초판이 출간되고, 1976년에 재판된, 거의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20세기 역사 서술의 랜드마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모트의 제자 위베르 뒤르트는 《인도불교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우리가 라모트의 《인도불교사》를 비슷한 범위를 다른 책들, 즉 헨드릭 컨(Johan Hendrik Caspar Kern, 1833~1917)의 《인도불교사(Histoire du Bouddhisme dans I’Inde, Paris)》(1901-1903), 라 발레 푸생의 《인도-유럽인과 인도-이란인: 기원전 300년경까지의 인도(Indo-Européens et Indo-Iraniens: L’Inde jusque vers 300 av)》(Paris, 1924), 《마우리아, 바바리안, 그리스, 스키타이, 파르티아 및 월지 시대의 인도(L’Inde au temps des Mauryas et des Barbares, Grecs, Sc-ythes, Parthes et Yue-tchi)》(Paris, 1930), 《카니시카에서 무슬림 침략까지 인도의 왕조와 역사(Dynasties et Histoire de l’Inde depuis Ka-nishka jusqu’aux invasions musulmanes)》(Paris, 1935) 등과 비교한다면 라모트가 달성한 성과의 진가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인류의 영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불교의 연구와 관련된 방대한 문제들에 대해 능숙하게 종합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방대한 학문적 성취에 비해 루뱅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라모트를 항상 바쁘고 유쾌한 그리스어와 인도-유럽어 교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루뱅대학의 불교 커리큘럼은 매력적이었음에도 그의 학생들은 항상 소수였고, 결국 그가 명예교수가 된 1974년도에는 이 과정이 폐지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주로 한국, 일본, 중국, 미국, 이탈리아에서 온 소수의 학생들에 의해 루뱅대학의 명성이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비록 학생들과 대학 당국으로부터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 사제로서의 몬시뇰 라모트와 학자로서의 라모트 교수, 특히 불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상호 이해 개선에 대한 기여를 인정했다. 그 결과 라모트는 1941년에 메헬렌에 있는 메트로폴리탄교회로부터 카노니쿠스 호노리스 카우사에(Canonicus Honoris Causae)의 품위가 수여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비기독교인을 위한 교황 사무국 특파원(Roman Secretariatus pro non-christianis)으로 임명했고, 1964년에도 교황으로부터 프라에라투스 도메스티쿠스(Praelatus Domesticus) 품위가 수여되었다.
먼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나 바빴던 라모트는 1977년에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아시아에 순례 여행에 나섰다. 라모트가 일본 여행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의 유언에도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이 연구한 책들을 포함하는 그의 귀중한 개인 장서를 교토에 있는 프랑스극동연구학교(EFEO)의 일본 지부인 호보기린(法寶義林) 재단에 기증했다. 라모트는 이 관대한 선물로써 불교 연구에 헌신한 그의 삶을 조용히 마감했다. 당연하지만 지키기 힘든, 존 브로우(John Brough, 1917~1984)의 《인도불교사》 서평 한 구절을 인용하며 필자의 글도 마감하고자 한다.
그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결코 불충분한 증거로부터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으며, 어떤 역사적 인물과 시대가 아직 가설이라면 항상 주의하라고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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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영 souyoung@naver.com
연세대학교에서 지질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으로 석사, 인도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논저로 〈Proto-Indo-European 오그먼트의 기원과 역할〉 〈《아슈따디아이》 따디따(taddhita) 부분의 구조〉 〈바르뜨리하리(Bhartṛhari)의 재조명〉 〈힌두이즘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 힌두교는 동인도회사(EIC)의 발명품인가〉 등의 논문과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새 종교지평》(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