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걷고 싶은 곳.”
남해군은 총면적이 358km²(약 1억848만 평)에 이르지만 전체를 다 구경하는 데도 2박 3일, 아주 여유롭게 둘러본다고 해도 3박 4일이면 충분한 곳이다. 김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걸어도’ 여유 있게 경치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발길 닿는 곳 어디의 경치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동네가 바로 남해군이기도 하다. 산촌의 소박한 풍경도 그 안에 있고 마음을 탁 트이게 해 주는 깨끗한 바다와 은빛 해변도 그 안에 있다.
기자가 남해군을 찾았던 3, 4일에는 아직 봄기운이 완연히 무르익진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10∼20일 사이에 벚꽃 등 봄 풍경이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하니 따뜻한 봄볕을 맞으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남해군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아직 조금 이른 봄의 흔적을 미리 찾아가 봤다.
○ 벚꽃에 유채꽃에… 화사한 봄의 향연
남해군의 지형은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닮았다. 총 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남해군 중 군청이 위치한 ‘큰 섬’이 엄마요, 창선대교로 연결된 작은 섬이 엄마 무릎에 누운 아기다. 남해군은 섬이지만 두 개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배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은 없다. 두 개의 다리란 경남 하동군과 남해군을 잇는, 엄마의 머리 부분에 있는 남해대교와 사천시에서 아기에 해당하는 창선면에 연결된 창선·삼천포대교다.
본격적인 남해 여행은 바로 이 두 개의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다리를 넘으면 가장 먼저 벚꽃이 반긴다. 이 벚꽃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남해대교를 지난 직후 옆길로 새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남해대교에서 800m 정도 들어와 노량삼거리에서 차를 왼쪽으로 돌리면 해안도로를 따라갈 수 있다.
그대로 따라가면 설천면까지 이어지는 이 길 중간에는 약 2km가량 벚나무가 죽 늘어선 구간이 있다. 노량삼거리에서 차를 이용해 이 벚꽃 길을 끝까지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5분 정도 될까.
하지만 기자가 이 길을 지나가는 데는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중간 중간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 양쪽에 벚나무가 없으면 없는 대로 새파란 바다가 탁 트인 경치를 연출하고 벚나무가 있으면 꽃과 바다가 어우러진 ‘봄바다’가 펼쳐진다.
벚꽃 외에 남해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꽃은 바로 유채다. 바다와 맞닿은 언덕 중간을 개간해 만든 계단식 논 곳곳에는 어김없이 노란 유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들도 마찬가지다. 너른 벌판 한 곳에 서서 눈을 여기저기 돌려 보면 그중 한 곳에는 어김없이 노란 꽃밭이 눈에 들어온다.
○ 계단식 논 한 편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마을
차를 그대로 몰아 들어가면 남해대교에서 이어지는 큰길과 다시 합쳐지고 남해읍내를 지나게 된다. 여유가 있다면 읍내에 위치한 재래시장에 잠시 들러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유채꽃 향기에 취하고,쪽빛 바다에 홀리고…
간간이 등장하는 벚꽃과 유채꽃을 눈으로 반갑게 맞아 주며 남면으로 항한다. 남해군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남면에 있는 ‘가천 다랭이마을’을 보기 위해서다. 가는 길 대부분은 해변이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도로다. 남해읍에서 출발했다면 약 30km 정도를 달려야 하지만 강진만과 앵강만의 짙은 파랑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리 먼 거리도 오랜 시간도 아니다.
가천 다랭이마을은 바다와 맞닿은 설흘산, 응봉산 자락의 가파른 경사를 계단식 논으로 개간해 농사를 짓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농기계의 혜택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한 칸의 농토가 좁아 아직까지 사람과 가축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이 바로 다랭이마을이다.
사실 다랭이마을은 남해군 안에서 계단식 논에 농사를 짓는 모든 마을을 가리킨다고 한다. ‘다랭이’라는 말이 ‘아주 좁은 논 또는 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남면에 위치한 가천 다랭이마을만 유명해진 이유는 뭘까. 해답은 불교에 있다. 가천 다랭이마을의 계단식 논을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칸을 세어 보면 딱 108계단이 된다고 한다. 극락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이라는 108계단.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번뇌가 소멸된다는 이 숫자의 논을 부리면서 옛 농민들은 좁은 땅을 오르내리며 허리 굽혀 농사지어야 하는 시름을 잊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시간이 맞는다면 석양이 지는 시간에 하루 중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다랭이마을을 볼 수 있다. 물론 느리게 걸을수록 좋은 남해군에서는 얼마든지 시간을 ‘맞추는’ 것도 가능할 테다.
○ 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한 야경
해가 지고 나서는 바다를 향해 아름답게 떨어지는 야경을 보러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조심조심 차를 몰아 나서자.
목적지는 ‘대교’다. 남해대교도 좋고 창선·삼천포대교도 좋다. 두 다리 모두 서울의 한강다리처럼 화려한 조명으로 멋을 낸 다리는 아니다. 다만 현수교라는 구조물 자체의 멋에 바다에 비치는 조명의 경관은 굳이 멋을 내지 않아도 시골의 차분한 야경을 보여준다. 특히 한 개의 다리가 아니라 여러 섬을 징검다리 뛰듯 연결하는 창선·삼천포대교는 남해대교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이 다리를 완전히 건너 육지 쪽에 위치한 각산에 오르면 더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야경 사진을 즐기는 독자라면 참고할 만하다.
다리가 아닌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서면과 남면의 경계쯤에 위치한 ‘힐튼남해골프&스파리조트’에 가면 바다 건너 여수의 할로겐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골프 클럽하우스가 있는 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 별채로 된 숙소가 있는 곳에서 시정이 적당히 좋은 날 보이는 바다 건너 여수시의 불빛이 고즈넉하다.
여수가 생각보다 가깝기 때문에 이런 야경이 가능하다. 하루에 두 번뿐이지만 지금도 여수시와 남해군을 오가는 배가 있다. 여수에서 남해까지 찻길보다 뱃길이 더 빠르다고 하니 섬에 들어가는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시간을 잘 맞춰 배를 이용해 보는 것도 색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
시원한 편백자연휴양림
108 계단 다랭이논 아득
금산 보리암은 3대 성지
죽방 멸치회 제철 만났네
○ 금산에서 일출 맞고 피로는 산림욕으로 풀고
석조와 야경까지 함께 즐겼다면 떠오르는 해도 한 번 맞아보는 것이 어떨까. 금산에 올라보자. ‘일출 보기 좋은 곳’으로 남해군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곳이 바로 금산이다.
산세가 만만치는 않다. 해발 681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꼭대기는 바위로 덮여 있는 악산(惡山)이다.
이 금산의 끝에 보리암이 있다. 강원 양양군에 있는 낙산사, 인천 강화군의 보문사와 함께 한국의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바로 이곳에서 기도하고 난 후 새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훗날 임금이 된 태조가 보답의 의미로 산에 비단을 내렸다는 뜻에서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재미있다.
오전 10시경 편백자연휴양림에 들렀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 문을 여는 순간부터 식물이 병원균이나 해충에 저항하려고 내뿜는 물질인 피톤치드가 충만한 곳에서만 나는 솔잎 향기가 농도 짙게 밀려온다.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잠시 벗어나 나무 사이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단, 산책로를 벗어날 땐 발끝을 바라보면서 걷길 바란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발길을 따라 무수히 만날 수 있는 들꽃들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그 꽃들을 무심코 밟아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 아기 안고있는 엄마 형상의 섬 ‘포근’
나무들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으로 목욕재계 후 찾은 곳은 창선교. 아래에 흐르는 물은 분명 바다지만 얼핏 보기엔 폭이 3∼4km 정도 되는 강을 연상시킨다.
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징표가 바로 죽방렴(竹防簾·물살이 드나드는 좁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비)이다. 한 마리에 1000원 가까이 하는 ‘죽방 멸치’가 바로 이곳에서 잡힌다. 빠른 유속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게으른’ 고기를 낚는 삿갓 형태의 죽방렴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다.
다리 근처에는 회를 파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주민들의 말로는 횟집 주인은 대부분 작은 배를 한 척씩 가지고 있고 횟감은 그 배에서 나온다니 ‘저것이 양식인가 자연산인가’ 하는 의구심은 품을 필요가 없단다.
잡어부터 도미까지 횟감이야 많지만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할 회는 바로 멸치회. 2∼4월 사이가 멸치회 맛이 가장 좋을 때다. 그 이후가 되면 산란기가 되면서 멸치에 기름기가 많아져 맛이 떨어진다니, 다른 곳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멸치회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올봄 남해에 들러 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형상이라는 섬의 모양 때문이었을까. 차로 이동하며, 걸으며, 멈춰서서 보고 느낀 남해군은 마치 엄마 품처럼 포근한 느낌을 줬다. 1박 2일로 다소 숨가쁘게 둘러본 일정이었지만 신문지 한 장의 앞뒷면을 다 써도 아직 남해군의 매력을 반도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수많은 묘사와 설명보다 이 한마디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에게 누군가 남해군이 어떤 느낌이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사람 때가 묻지 않은 풍경이 아직도 살아 있는 곳”이라고.
○ 교통편
대전과 통영을 연결하는 통영∼대전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남해군을 찾아가는 길은 부쩍 가까워졌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남해읍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니 딱 4시간 반 만에 남해읍에 도착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 반까지 1∼2시간마다 버스가 운행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사천 나들목에서 빠지면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 남해로 들어갈 수 있다. 남해대교로 들어갈 경우는 남해고속국도를 타다 하동 나들목에서 나가면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고 싶다면 비행기를 타면 된다. 사천공항과 여수공항에서 차로 이동하면 양쪽 모두 1시간 안에 남해에 도착할 수 있다. 남해읍과의 거리는 사천공항이 조금 더 가깝고 비행기 편이 많기는 여수공항이 낫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진주 사천공항으로는 하루 3대의 비행기가 뜬다. 오전 7시 반, 오후 4시 45분과 오후 6시 40분이다. 여수공항을 향해서는 1∼2시간 간격으로 하루 총 8대의 항공기가 출발한다. 여수에서 남해군으로 가는 배편은 오전 8시와 오후 3시에 있다.
○ 숙박
남해군에 있는 유일한 특급호텔급 숙소는 남면에 위치한 힐튼남해골프&스파리조트(사진)다. 도심지 호텔처럼 한 건물에 숙소가 몰려 있지 않고 한 동에 8개 정도의 숙소가 있는 건물이 여러 개 지어져 있어 다른 투숙객을 신경 쓸 일이 적다. 최고 등급의 숙소는 아예 건물 한 채가 한 개 숙소로 이루어져 있다. 복층 구조로 최대 수용인원은 8명이다.
숙박료는 2인 기준으로 116m²(약 35평) 넓이의 객실 1박에 정가 48만7000원. 단 계절이나 요일 등에 따라 변동요금제로 운영된다.
골프를 좋아한다면 이곳의 골프 코스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다를 코앞에 두고 펼쳐지는 골프장에서는 운동과 경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18홀 중 한 곳은 바다 건너 페어웨이로 드라이브를 날려야 하는 이색적인 코스도 마련되어 있어 골프 마니아에게는 한 번쯤 들러 볼 만한 곳이다.
그 외에도 남해군 전역에 걸쳐 100여 개의 중저가 호텔이나 모텔, 펜션 등이 있다. 1박에 중저가 호텔은 2인실 10만 원 선. 모텔은 4만∼5만 원이고 펜션은 시설 등에 따라 7만∼15만 원의 숙박료를 받는다. 남해군 관광안내콜센터(1588-3415)나 홈페이지(www.namhae.go.kr)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