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송당공(松堂公) 보관(譜觀)
송당공은 관북출신으로 오랫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관북종친회와 대종회 결성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두 종친회에서 발행한 「장흥위씨 종보」및「월명송」을 편집하면서 족보 등의 문제점을 규명하여 게재해 문중발전에 기여했다.
(1) 시조공입국(始祖公入國)에 따른 두 가지 문제(問題)
시조공 경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638)에 소위 팔학사와 같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입국하셨다. 팔학사란 위(魏)․방(房)․홍(洪)․목(睦)․기(奇)․은(殷)․길(吉)․봉(奉)의 도예지사를 말하며 이때가 당정관(唐貞觀) 12년에 해당된다. 그런데 타성 족보를 보면 팔학사의 입국연대(入國年代)가 같지 않다.
홍씨 족보에는 고구려 27대 영류왕(榮留王) 22년(339)에 당성으로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방씨는 고구려의 주청으로 당정관(唐貞觀) 17년(643)에, 기씨는 백제 온조왕(BC,63~18) 때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위씨 족보(기묘초보 1759)에는 신라 태종무열왕(654~661)에 당나라 공주의 배신(陪臣)으로 입국했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어느 곳을 통해서 시조공이 입국했는가 라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데 입국지점은 당성(唐城)이 거의 정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성이란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성(九峰山城)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刊)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전(世傳)되기를 당에서 재공(才工) 8명이 와서 고려(고구려 사람의 착오인 듯)사람을 가르쳤는데 홍(洪)학사가 그중 한 사람이다.」 라고 적혀있다. 이런 사실이 공인되어 정부에서도 1971년 4월 15일 이곳을 사적 제 217호로 지정한 것이다. 당성은 당시 3국의 가장 격심했던 분쟁지로 선덕여왕 11년(642)까지 신라 땅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11년 7월에「백제 의자왕(義慈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 서쪽지방 40여성을 공취하였다. 8월에 또다시 고구려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당항성(南陽)을 공취하여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은 사신을 당태종에게 파견하여 위급한 사실을 알렸다.」라는 것을 보면 당성이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팔학사 입국 연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수(隋)가 망하고 당이 건국되는 해는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40년(618)이고 43년(621)에 신라는 비로소 당과 교류하게 된다. 앞에서 살핀 대로 문중마다 입국 연대가 다른데 팔학사란 말은 동시입국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당성이 신라 땅이었던 선덕여왕 11년 이전에 입국했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 족보 이설(異說) 즉 태종 때의 공주배신으로 입국운운은 당시 한반도의 정세로 볼 때 사리에 맞지 않다. 나당연합군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격심한 전쟁 속에서 어찌 공주를 외국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만암공도 전쟁의 와중도 물론이지만 공주를 외국으로 보내면 반드시 기록이 있기 마련인데 신라로 공주를 보낸 기록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씨로서는 신라 선덕여왕 7년의 입국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싶다. 홍씨들은 당나라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으로 재공(才工)을 보냈다고 하나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로 보아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나라와 고구려는 사실상 견원지간일 정도로 전쟁을 많이 했음은 역사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신라(新羅) 때의 방조(傍祖)
신라 때의 방조로 관북보(1824)에 위흔(魏昕)․위영(魏英)이 실려 있고, 장흥보(1842)에는 이들 이외에 위문(魏文)․위원(魏元)․위진(魏珍)․위홍(魏弘) 등 6인이 실려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경잡기오(東京雜記誤)에 기록되어 있는 이들의 신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 위문(魏文) - 33대 성덕왕(聖德王) 11년(712) 3월에 이찬(伊湌)인 그를 중시(中侍)로 삼았다. 중시가 시중(侍中)으로 바꿔진 것은 35대 경덕왕(景德王) 6년(747)이다.
■ 위원(魏元) - 성덕왕 26년(727) 4월 일길찬(一吉湌)인 그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삼고, 급찬대양(級湌大讓)을 사찬(沙湌)으로 삼았다.
■ 위흔(魏昕) - 46대 문성왕(文聖王) 4년(842) 3월 이찬(伊湌) 위흔의 딸을 비로 삼았다. 동 9년(847) 시중 김여(金茹)가 죽자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다.
■ 위진(魏珍) - 48대 경문왕(景文王) 2년(862) 정월에 아찬(阿湌) 위진을 시중으로 삼았다.
■ 위홍(魏弘) - 49대 헌강왕(憲康王) 1년(875) 이찬(伊湌) 위홍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왕은 평소 위홍과 통했는데 왕은 그에게 대거화상(大秬和尙)과 향가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한다. 그 위홍은 각간에 오르고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 위영(魏英) - 고려 태조(太祖) 19년(936) 위영을 동경[慶州]주장으로 삼았다.
이상 6명은 정말 위씨일까? 필자는 일찍이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읽고 우리 족보(1824년 관북보 이후) 방조인 위영이 위씨가 아니라 「金魏英」이란 사실을 알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그 후 삼국사기를 다시 읽던 중 55대 경애왕(景哀王)의 이름이 위응(魏膺)임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는 박(朴)씨였다. 성을 붙이지 않고 이름만 써 놓았기에 위씨로 착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는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두웠다. 예전에도 방조들의 이름이 외자인 부분이 석연찮았던 참이었다. 이 수수께끼를 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마침내 오늘 장마 중 후덥지근한 중복 날에 이 수수께끼를 말끔히 풀게 됐다. 삼국사기(三國史記) 38대 원성왕(元聖王) 1년조(條)의 한 줄 기사를 읽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신라시대 방조 6인은 위씨가 아니고 신라 종성(宗姓)인 김(金)씨였다. 여기에 그 근거를 밝혀 둔다. 즉 「東京雜記誤」에는 김부식(金富軾)의 증조부가 「김위영(金魏英)」이므로 위씨가 아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38대 원성왕조에는 위문이 「김위문(金魏文)」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니 위홍 역시 「김위홍(金魏弘)」이라는 근거도 되는 것이다.
※ 동경잡기(東京雜記) =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재위 19년(936)되는 해였다. 그리고 개경[松岳]․동경[慶州]․서경[平壤]에 3경을 두었다. 「동경기(東京記)」라는 책은 작가․연대 미상으로 내려오던 것을 조선 현종(顯宗) 10년(1669)에 경주 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진사 이채(李埰) 등과 증수 간행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라 이름 하였다. 숙종(肅宗) 37년(1711)에 부윤 남지훈(南至薰)이 중간하고, 헌종(憲宗) 11년(1845) 부윤 성원묵(成元黙)이 증보했다.
신라의 옛 도읍지였던 경주의 여러 사적(史蹟)․연혁(沿革)․성씨(姓氏)․산수(山水)․풍속(風俗) 등을 기록한 것인데 고려와 조선의 역사연구에 중요한 문헌이 되고 있다. 「동경잡기오(東京雜記誤)」는 숙종 38년(1712)에 부윤 권이진(權以鎭)이 펴낸 것으로 동경잡기 내용 가운데 잘못된 곳을 바로 잡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