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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1.
의학의 혜택을 최대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의사가 갖는 지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의사들은 마치 모든 해답을 아는 듯 행동하고, 환자들은 의사가 다 알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은 그와 다른데도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벌어지는 기만과 상호 오해가 쐐기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를 벌려놓는다. 이런 기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진단이 나오지 않거나 진단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분노한다. 현재 과학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흔한 일이고, 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도 말이다.
p 23.
의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놀라운 만큼 의학 지식도 나날이 발전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가 알지 못하는 것들도 나날이 방대하게 늘어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p 31.
흔히 의사들이 MRI를 보면서 요통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내용들, 즉 추간판탈출증, 추간판파열, 추간판팽륜증은 요통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의 MRI에서도 흔히 보이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방사선과 의사들이 허리 MRI에서 찾아내는 추간판탈출증이나 추간판팽륜증, 그리고 기타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요통과는 관련이 없음을 의미한다.
내가 의과대학에 있을 때, 한 신경외과 의사가 말하기를 자기는 척추 수술의 효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척추 수술 환자를 앞에 두고 소독을 할 때 그런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 이 수술을 왜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다들 이렇게 하니까."
요통의 실제 발생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완치법도 모른다. 요통은 진통제로 치료하면 가라앉힐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진통제는 일시적으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심한 통증 환자, 심지어는 암 환자들에게 주는 약과 똑같다. 그리고 통증을 치료한다고 해서 며칠이나 몇 주 혹은 몇 달, 심지어는 몇 시간 후에 통증이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통증은 보통 재발된다.
요통 치료에서 카이로프랙틱, 침술, 마사지 치료 등 수많은 대체 요법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은 의료계가 요통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돕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느 영역에서 대체 의학이 번창한다는 것은 그 영역에서 현대 의학의 이종요법(질병의 증상과 반대되는 작용을 유발시켜 치료하는 것을 의미하며 현대 서양 의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다.)이 실패했따는 신호로 보면 거의 틀림없고, 요통은 그 전형적인 예다. 평판이 좋고, 실제로 치료도 잘하고, 선의를 가진 많은 의사들이 요통을 대상으로 매일 처방을 내리고 수술을 하지만 사실 요통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p 36.
의사들이 모든 의학적 문제에 대해서,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갖는다는 대중의 잘못된 믿음은 의사들에게 으쓱한 기분을 줄지는 모르지만 의사들 스스로를 좀먹는 측면도 있다. 병원을 방문해서 얻을 수 잇는 진정한 치유 잠재력을 이해하려면 의학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의사들이 모든 병을 완치시켜줄 수 없고,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하는 질병이 많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환자들은 자신의 건강과 질병, 그리고 몸에 대한 권리와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현대 의학과 기술에 전적으로 내맡기려는 것은 자신의 질병이 완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거나 담당 의사가 자기가 앓는 질병의 경과에 대해 자세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이해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과학에 한계가 있는 만큼 의사들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환자 자신의 의견과 관점, 그리고 욕구다. 의사란 결국 타인의 건강에 대해 조언해주는 상담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환자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그들에게 상담, 그리고 의사로서의 제한된 전문 기술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p 53.
의료계에서는 상기도 감염이라는 용어로 알려진 감기, 그리고 그와 연관된 질병인 귀의 염증 같은 것이 미국에서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가장 흔한 이유다. 그렇다면 현대 의학에서 감기를 치료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치료법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환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내가 스티비에게 준 도포용 진통제처럼 증상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우리는 감기 치료법을 모르기 때문읻. 상기도 감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지만, 우리에겐 바이러스와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약이 없다. 그렇다면 상기도 감염이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미국에서 병원을 찾는 상기도 감염 환자의 50%에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생제는 바이러스에 효과가 없는데 말이다. 조금만 아파도 항생제를 처방받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항생제가 필요하다는 믿음만으로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은 어떤 종류의 감염이 세균성일 가능성이 크고, 어떤 것이 바이러스성일 가능성이 큰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항생제가 바이러스 감염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런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다.
p 60.
기침은 다양한 상태에 동반되는 증상읻. 기관지염, 상기도 감염, 폐 질환, 알레르기, 후비루(코와 목에서 분비되는 점액이 인두에 고이거나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 축농증, 흔히 사용되는 고혈압 약의 부작용 등등 기침을 일으키는 상태의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만큼 오늘날 시장에 나와 있는 기침 관련 치료법도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관지염, 감기와 같이 감염에 걸린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 많다. 점적약, 사탕형 약, 시럽, 목 사탕, 마시는 약, 가루약, 알약 등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이 중 제일 효과 좋은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도 한번 직접 골라보시기 바란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감염에 대해 위약(가짜약)보다 일관되게 더 나은 약효를 보인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약은 예전에도 없었다. 기침은 우리가 낫게 할 수도 없고, 효과적인 치료법도 얺는 또 하나의 질병에 불과하다.
연구를 통해 이제 우리는 비처방 기침약이 효과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의사들은 비처방 기침약을 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환자들이 효과가 없다며 돌아오면 의사들은 그제야 처방용 감기약을 처방해준다. 하지만 이것도 효과 없는 것으로 증명된 것은 마찬가지다.
p 68.
코크런연합은 수십 가지의 환자 요소와 연구 요소를 검토하고, 수백 가지의 통계를 산출해보았다....(중략) 유방 엑스레이 검사를 받았든 안 받았든 여성의 생존율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어째서 주요 언론들은 유방 에긋레이 검사로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내용을 정기적으로 내보내는 것일까? 어째서 의사들은 통상적으로 유방 엑스레이 검사를 권유하는 것일까? 어째서 미국의학협회, 미국방사선의학회, 미국외과학회와 같은 전문 의료 단체들이 한결같이 정기적인 유방 엑스레이 검사를 구너고하고 있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의학협회 같은 전문 의학협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아왔다. 그들은 이익집단이다. 미국의학협회는 모든 의사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방사선의학회는 방사선과 의사, 미국외과학회는 외과 의사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이들 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회비를 납부하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위해 로비 활동을 벌이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대중에게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며, 건강관리를 위한 권장 사항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p 87.
.....(중략) 50만 명의 여성을 유방 엑스레이를 받은 집단과 받지 않은 집단으로 나누어 실험해본 결과 사망 가능성은 양쪽 집단에서 똑같이 나왔다는 것이다. 유방 엑스레이가 효과가 없었다는 얘기다.
p 319.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관찰의 영향과 흔히 결합해서 설명하는데, 결국 이것은 관찰이라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 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흔히 언급되는 원리로 이어진다. 이것은 의학에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현대의 의사들은 객관적이고 분리된 관찰자라는 스토아학파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이런 모델을 지지해 마지않지만, 사실 그런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질병의 진행 경로를 바꾸고, 인간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의사들은 뚝 떨어져 나와 있는 구경꾼이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의사는 질병과 치유를 구성하는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p 324.
과학이 인간의 목숨에 미치는 영향력을 점차 제한되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며녀 CT와 MRI 촬영의 폭발적인 증가와 약물 사용량의 급증에도 1990년대에 이루어진 보건의료의 발전을 통해 미국에서 목숨을 구하거나 목숨이 연장된 사람은 기껏 만 6천 명당 한 명 꼴에 불과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의료 과실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연간 44,000명에서 98,000명 사이, 다른 말로 하면 4천 명당 한 명꼴이라고 보고한 1999년의 연구와는 너무도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보건의료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달한다는 오늘날, 보건의료 기술 덕분에 목숨을 구하는 사람보다는 의료 과실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네 배나 더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