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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
왕상 19:1-8,
2021.09.26.늘찬양교회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로 인하여 자영업자이 폐업하고 회사의 사업장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량의 실직자들이 양산된 가운데 많은 사람이 꿈을 잃어버린 채 커다란 낙심과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심한 사람은 우울감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에 걸려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질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는 가치가 없다. 나는 희망이 없다.” 고 자신의 뇌에 입력을 시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도 그런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라는 탄원을 할 정도의 위기와 절망 속에 빠진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지치고 낙심되고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자신을 죽여달라는 엘리야를 로뎀나무 아래로 인도하여 쉬게 하시며 잠을 자게 하시며 먹을 것을 주심으로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심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나갈 수 있도록 치유하시는 장면을 통하여 우리는 큰 도전과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 모두 로뎀나무에서 엘리야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건강하게 삶을 살아나가는 귀한 축복이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Ⅰ. 로뎀나무로 이끄시는 하나님
아합왕의 왕비로서 이방여인이었던 이세벨은 자신이 고향에서 섬기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에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850명이나 세워서 거창하게 종교행사들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임하였지만 아무도 감히 이 왕비의 세력 앞에 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과감히 나서서 이 우상의 세력과 맞섰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의 대결을 통해서 우상선지자들을 처단하였습니다. 일은 시원케 처리하였지만, 그 후 일어난 이세벨의 분노를 엘리야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엘리야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고독하게 홀로 광야 길을 달리고 달려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위협과 고독 속에서 엘리야는 영과 육이 모두 지치고, 절망하고, 힘이 소진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로뎀나무 아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쓰러지기 직전, 그 광야 한가운데서 엘리야는 로뎀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로뎀나무는 2-3m 되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입니다. 생명력이 강해 광야 같은 메마른 지대에서도 잘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엘리야는 이 나무 밑에 와서는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
절망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선지자도 생명의 기운이 다 떨어지고 쇠진하여 쓰러질 때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 엘리야가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놀라운 모습에서보다 그의 연약한 모습에서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지칠 수 있다는 데서 우리의 모습과 닮은 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친 모습으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프라스티에는 미래의 인간은 인생의 총 88만 시간 가운데 44만 시간을 잠자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미래에는 여가와 쉼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대두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잠은 가장 기본적인 건강이며 즐거움입니다. 아울러 잠을 건전하게 조절하고 은총으로 아는 것은 영적인 사람들의 기본입니다. 시편 기자도 시 127편 2절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고 하였고 예수님도 파도 가운데 배에서 환경을 초월하시고 주무셨습니다. 잠언 3장 24절은 "네가 누울 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잠이 달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단잠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살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잠이 온다는 것은 우리 몸에 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쉼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민과 욕심이 많은 사람 즉 죄가 많은 사람은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다시 말해 쉼과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아무리 좋은 영양식과 비싼 보약을 먹어도 늘 어깨가 처져있고 피곤에 지쳐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지 그 먼 거리를 달려 시원한 로렘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이세벨의 협박도 잊은 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더욱이 천사가 어루만져 강제적으로 깨운 후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먹고 마시고는 이내 또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이렇듯 휴식에 있어서 잠은 기본입니다
Ⅱ.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엘리야에게 누군가 다가와 어루만집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지친 엘리야를 어루만지십니다. 지친 중에서도 눈을 떠서 올려다보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떡을 먹으라고 권하였습니다. 거기 한 병의 물과 구운 떡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꿈인지 생신지 분간을 못하는 채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는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천사가 두 번째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7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탈진해있는 엘리야에게 "네가 지금 왜 여기에 드러누워 있느냐? 네 꼴이 이게 무엇이냐?"고 꾸중하시지 않고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의 지친 어깨를 주물러 주셨으며, 정신을 차리게 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제가 좀 이해가 안 되며 안타까워하던 일 중의 하나는 왜 사람들이 놀러 가면서 저렇게 많은 짐 보따리를 들고 가는 것일까? 저 짐 보따리의 대부분은 먹는 것이겠지... 왜... 굳이 무겁게 싸 들고 가지 말고 가까운 음식점에서 돈 주고 간편하게 사 먹지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여행할 때 가장 큰 문제가 잠자리와 그다음에는 먹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맛도 그렇지만... 음식값이 차지하는 경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짐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것이 힘은 들지만 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광야 한가운데 퍼져있는 엘리야 도저히 걸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탈진해있는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육신 적인 공급 즉 떡과 물의 공급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니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음식을 주실 것이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하면서도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는 굶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상관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사도 가정을 이루고 있고, 또 그 밑에 가족들이 여러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마저 침례 요한처럼 약대 털옷에 이슬과 석청을 마시면서 사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남편에게 여보 여름 휴가비 안 나와... 추석 보너스 안 나와 물어보면서... 목사님에게는 "목사님 여름휴가 다녀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추석 연휴에 좀 쉬셨다 오셔야지요!” 하면서 휴가비 한번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로 다 어려워서 그런 말을 하거나 듣는 것은 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 시대에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배부른 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에게도 그런 쉼과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꼭 기도원이나 수도원의 개인적인 휴식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탈진의 징후, burn-out징후를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마 6:31) 주님은 이렇게 자상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의 영적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며 지쳐있는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어루만지심을 받고 힘을 얻을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는 그 로뎀나무가 어디이겠습니까? 광야에서 만나는 로뎀나무—그것은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로뎀나무야말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 영혼이 쉼을 얻고, 상처를 치유 받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성소입니다.
우리가 광야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하고, 상처받았을 때 쉽게 찾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어루만지시며 회복케 하시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영혼들은 계속 피폐해지고 경제위기로 몸과 마음은 자꾸만 지쳐가는데 비대면 예배로 인하여 로뎀나무와 같은 쉼터와 생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를 찾지 못하다 보니 힘들고 어려운 삶이 더욱 가중되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각자만의 영혼의 쉼터인 로뎀나무를 만들어야 합니다. 찬송큐티와 같은 묵상과 찬양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돌보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매주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나마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지만 은퇴하면 이런 것조차 멀리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영성 또한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로뎀나무 말씀묵상, 찬송큐티, 실천하는 삶을 통해 매 순간순간 어루만지시고 힘주시며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덧입으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지쳐 탈진했던 엘리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어루만져주심과 먹여주심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40일을 밤낮으로 달려가서 호렙산에 올라 말씀을 듣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심은 받은 사명의 산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거듭남의 영적 비밀과 성령의 능력과 영적 충만함을 공급해주시기 위하여 종종 우리들을 호렙산으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호렙산은 꼭 기도원과 수도원 또는 산상부흥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호렙산은 갑작스러운 사고와 아픔을 통하여 병상에 드러누워 치료를 받고 있을 때도 나타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사업의 실패와 좌절과 절망으로 인하여 모든 희망을 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도피하고 있을 때의 처소가 호렙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의 실패, 대학진학의 실패, 사업장의 폐업과 도산의 자리, 그 어떤 자리에서도 호렙산은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호렙산이 참으로 귀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도 그랬지만 실패한 자에게만 나타나는 하나님의 치료의 산이요, 능력의 산이요, 권능의 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현실화되어 현재 우리의 삶에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 그것이 문제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진선미,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살 수 있는 영성이 있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도덕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남을 자기처럼 아끼고 도와주는 사회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끊어졌고, 양심을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죄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죽어도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 허물을, 우리의 죄악을, 우리의 가난을,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니 대속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공로 없으나 예수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 질병을 담당했다고 믿어야 합니다. 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내 죄를 이미 담당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그는 부요하신 자로써 가난하게 사심은 가난하게 산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하셨기에 날마다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십자가를 붙들면 삽니다. 어떠한 절망 상태에 있을지라도 찾아오신 주님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거부하지 않는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자를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어루만지도록 내어 맡겼습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를 주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의 짐을 주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앞길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떡을 겸손히 받아먹는 것입니다.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새 힘을 얻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새롭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기막힌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을 붙잡았더니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삶에 지치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절망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찾아오신 주님, 말씀을 붙잡으시고 다시 한번 일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줄 줄로 믿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은 죽지 않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상처받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멀리할 때 내 속에 실망감, 패배감, 좌절감, 비교의식, 탐욕, 분노와 원망, 허탕한 생각들을 심어주어서 계속해서 음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또는 하나님과 약속한 시간에 개인의 골방에서 말씀묵상, 찬송큐티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일어나라. 아직도 너의 갈 길이 저렇게 남아 있지 않느냐! 힘을 내라. 아직도 네 할 일이 저렇게 있지 않느냐? 네가 아직도 더 달려가야 하리라. 내가 네게 준 사명들이 아직도 네 앞에 저렇게 있지 않느냐! 생명의 떡을 먹고 힘을 내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꿈이 생겨납니다. 도전과 담대함이 살아납니다. 이 모든 은혜와 능력이 치유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속에 도전과 개척정신보다 실패와 절망감이 가득 차 있다면 빨리 로뎀나무로 달려가십시오!...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의 어루만져주심과 회복케하심과 치유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손길과 축복을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