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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성령의 열매 맺는 달☜
모든 생명의 양식(복음)을 등한히하면,사탄의 표적되어 영생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마1:7-17절) 깨진 다윗언약
강화도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장식한 여러 사적(事跡)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유명한 철종의 생가도 남아 있습니다. 철종은 전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이었는데, 갑자기 왕이 되어 왕궁으로 붙들려 간 사람입니다.
왕족인 그가 강화도에서 무식한 나무꾼으로 산 이유는 외적(外敵)들의 횡포가 심해서 조금이라도 똑똑한 왕족이 있으면, 모두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태종 태세 문단 세”하면서 조선왕들의 족보(族譜)를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왕들의 족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드라마에서 조선역사가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조선왕조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젠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에게“다윗의 왕조”는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다윗 왕조”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그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다윗 왕조”의 역사는 쇠퇴(衰退)의 역사입니다. 즉 다윗과 솔로몬 때에 잠깐 반짝하고 빛난 후, 이 왕조는 계속 쇠퇴하다가 결국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운 언약은 깨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다윗의 왕조”는 망하고, 그 후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거의 모두가 죽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다윗 왕조가 다시 회복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면 어쩔 수 없지만,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다윗의 왕조”가 회복되지 않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은“다윗 왕조”의 회복을 정치적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실제로“다윗 왕가”의 후손 중에 어느 누가 살아남아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는 전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막연하게 어느 날 굉장한 영웅(英雄)이 나타나서 공짜로 유다 나라를 회복시켜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사실 나라가 망하면, 왕족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합니다. 침략자(侵掠者)들이 왕족들을 모두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살아남아 있다 하더라도 신분(身分)을 감추고, 숨어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마태 사도는 이 왕족의 뿌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찾은 방식은“다윗의 후손”을 찾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까 그가“다윗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사도는 예수가“다윗의 후손”이며, 다윗 언약을 회복시킬 분이라는 것을 알고, 다윗의 족보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마태 사도는 왜 이렇게 다윗의 족보를 추적하고 있을까?
첫째 이유는, 정말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갖는 자는 다윗의 족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다 나라를 회복할 사람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윗의 족보 이야기가 나오면,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그가“다윗 언약”을 회복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회복이 아니라, 영적(靈的)이며, 종교적(宗敎的)인 회복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 부분이 가장 마태 사도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염원하고 있는데,“왕이 오긴 왔는데 실제로는 그런 정치적인 왕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변명 같기도 하고, 속임수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을 읽으려는 분들에게 나타나는 최초의 장애물은 바로 마태복음 서두(序頭)에 나오는 족보(族譜)입니다. 사람들 중에는‘우리나라 조선 왕들의 족보도 외우지 못하는데, 남의 나라 왕의 족보까지 외워야 하냐? 면서 불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스라엘 역사라고 한다면,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救援) 역사의 회복이며, 지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꼭 필요가 있습니다.
Ⅰ.깨진 다윗 언약
요즘 우리나라의 안전(安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국제조약(國際條約)이 있다면, 그것은 곧“제네바 협약”입니다. 이것은 세계가 북한이 핵 개발을 제재(制裁)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조약으로서, 북한이 핵 사찰을 받아들이면, 여러 나라가 투자를 해서 북한에 경수로 공장을 건설하고 거기에 필요한 중유를 제공한다는 조약(條約)입니다.
우리가 피부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세계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조약들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여러 언약들이 나옵니다. 인류의 평화가 지속되는 것은 이런 언약들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노아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홍수가 끝난 후,“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창9:11).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노아언약, 곧“무지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물론 홍수 재해로 아파트 앞에서 남매가 맨홀에 빠져 떠내려 가기도 하지만)
왜냐하면 이“노아언약”이 아직도 효력(效力)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이“노아언약”보다 더 중요한 언약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約束)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신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망한 족보(族譜)를 연구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아브라함 언약”때문입니다.“아브라함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이 아브라함의 믿음만 보시고, 그를“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를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약속(約束)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고, 에덴(낙원(樂園)에서 잃어버린 지위와 특권을 되찾아 주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 언약은 완전한 언약이 아니라, 일종의“약속어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만기가 되어 결재(決裁)가 떨어져야 완전히 유효(有效)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언약(言約)을 더 주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애굽을 탈출했을 때, 시내 산에서 모세와 율법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아니라,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전제(前提)로 하고, 어떻게 하면 계속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地位)를 유지하느나? 는 일종의“보존언약”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면, 계속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 복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해서 늘 위태로운 일을 당했습니다.
둘째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곧“다윗언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처럼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는 솔로몬 이후 계속 쇠퇴하기만 했습니다.
1:7-11절)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여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우리가 실제로 보게 되는 유다의 역사는 쇠퇴(衰退)의 역사입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함으로써“다윗언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까? 그것은 다윗의 언약이나. 시내 산 언약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내 산 언약이나, 다윗 언약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시내 산 언약이나, 다윗 언약이나,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다윗언약”은 시내 산 언약의 보완(補完)이었습니다. 그러니까“다윗언약”은 시내 산 언약의 개정판(改訂版)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믿음으로 살 때, 그 나라를 영구적으로 지켜주시겠다는 것이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다윗언약”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망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험악하고, 죄악이 소용돌이쳐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왜 믿음이 생기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족속들은 아브라함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을까? 사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유다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율법과“다윗 언약”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망하고 말았을까? 결국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 정말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후, 나라까지 이루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망했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유다의 멸망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절망감을 갖게 만듭니다. 우리도 실컷 믿는다고 하면서 봉사도 하고,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했는데, 결국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사실 오래 믿는 분들 중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믿었는데, 하나님의 심판(審判)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이 그 불꽃같은 눈으로“너는 안돼, 다음 사람...”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될까?
유다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몸부림치시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구악 성경의 가장 큰 미스터리(mystery)가 유다의 멸망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악(惡)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유지하셨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남게 합니다. 결국 구약 성경은 의문 부호(符號)로 끝이 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포기하는가?하는 의문(疑問)입니다.
영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져 겨우 로프(rope)에 매달려 대롱대롱 거리는 사람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온갖 힘을 다 써보지만, 사람은 올라오지 않고, 힘은 점점 빠집니다. 즉 줄은 끊어지려고 하고, 힘은 다 빠지고, 나중에는 어떻게 합니까? 결국 혼자라도 살기 위하여 줄을 놓아버리고, 친구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유다의 역사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애를 쓰시지만, 죄(罪)의 힘이 너무나도 강(强)해서 좀처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쪽으로 따라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의 줄을 놓음으로써 유다 백성들은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만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도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를 쓰시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罪)의 성향이 너무나도 강해서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不義)와 불순종(不順從)을 감당하지 못하시고, 우리를 붙든 손을 놓아버리시면 어떻게 될까?
Ⅱ.바벨론에서 진행되는 구원의 역사
우리가 마태복음 말씀을 보면서 견지(堅持)해야 할 것은, 가만히 눈감고 앉아 침묵하며 쉽게 은혜를 받으려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태의 기술(記述)입니다.
1:17절)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 사도는 족보(族譜)를 열거한 후, 대(代) 수가 열네 대씩, 열네 대씩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만히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족보(族譜)를 한번 헤아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한번 헤아리면, 어떻게 될까? 한번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네 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떻게 보면 열 넷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열 셋인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더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포로 될 때까지는 열넷이 넘습니다. 그런데 마태 사도는 몇 대(代)를 뛰어넘어서 열넷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포로부터 그리스도까지는 열넷이 안 됩니다. 열넷이 되려면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고냐를 두 번 넣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피상적(皮相的)으로 대하던 족보(族譜)를 깊이 연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한 번 헤아려서 안 되니까 그 다음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예 펜을 들고 맞는지, 틀린지, 연구(硏究)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연구(硏究)하는 자세로 마태복음을 대하기를 원하고 있고, 또 족보(族譜)라는 재미가 없는 것 안에 퀴즈를 내서 우리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정말 불행한 사람은 여고냐입니다. 그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무려 37년 만에 복권(復權)되어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인 여고냐의 삼촌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완전히 망하고, 성전은 불탔으며, 바벨론 왕은 시드기아가 보는 앞에서 왕자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그는 거기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고냐는 자식(子息)이 없었고,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다윗의 혈통(血統)은 끊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스알디엘은 어떻게 된 아들이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알디엘이 다른 사람의 아들인데, 여고냐의 아들로 입양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는데, 입양에 의하여 다윗의 혈통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또 하나의 입장은 여고냐가 37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후, 복권(復權)되어 완전한 새 사람이 되어 다시 자식(子息)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바벨론 포로전의 여고냐와 바벨론 포로 후의 여고냐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즉 포로가 되기 전, 여고냐는 다윗 왕조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했지만, 37년의 죄수생활 끝에 그는 변화되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고, 유다의 역사는 바벨론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後者)의 입장입니다. 즉 계속 혈통으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입양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후에도 다윗의 후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을 뽑히고, 노예로 잡혀간 후에도 계속 그의 머리털이 자라고 있었던 것처럼, 포로 후에도 다윗의 후손들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포로 후에 성경의 기록에 남는 사람은 스룹바벨입니다. 그는 총독(總督)이 되어 유다 백성들의 귀환(歸還)과 성전(聖殿)을 짓는 일을 지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이름들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마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族譜)를 찾아서 이름을 밝혀내었던 것 같고, 일반인들에게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패를 의미하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여호와 하나님은 더욱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오가 조서(調書)를 내려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다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律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까지는 여호와가 일종의 유대인의 민족 신(神)으로 여겨졌는데, 알고 보니까 여호와는 민족 신(神)이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신(神)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율법(律法)을 아주 딱딱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골치 아픈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너무나도 고상(高尙)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유대인들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을 온 세상에 퍼뜨린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유대인들의 회당(會堂)마다 이방인들 중에서 율법(律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복음(福音)을 듣고,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시다가 결국 나중에는 힘이 다 떨어져서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다의 불순종(不順從)을 징계(懲戒)하시면서 오히려 이 구원의 복음(福音)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기회를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전혀 허물없이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복음(福音)은 우리들에게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개판”을 치는 바람에 하나님은 복음(福音)이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서 온 세계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는 세계 교회를 준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셔서 포로후기의 다윗의 이름 없는 혈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습니다.
1:12-16절)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끝에 가서 마태 사도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설명하기 위하여“요셉이 예수를 낳고”라고 말하지 않고,“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망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혈통(血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게 하는 징검다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하여 다윗의 후손이라는 징검다리를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오래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원하셨습니다. 이 세상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구원역사”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역사도 잘 모르면서 남의나라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 역사의“뼈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짐승이나, 사람에게서“뼈대”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들이 흐물흐물해져 버릴 것입니다. 즉 그냥 의미도 없는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후손의 역사는 인류역사를 지탱하는“뼈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회의 역사는 앞으로 세계 역사를 지탱하는“뼈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의 탄생으로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예수 이전의 시기입니다. 우리가 주전 즉 BC로 부르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 후는 AD 즉 주후라고 부르는 시기입니다. 인류 역사는 의미가 없이 흐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탄생은 가장 큰 분기점(分岐點)이요, 분수령(分水嶺)입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죄(罪)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어떤 병(病)에 걸렸는데, 그 병(病)에 대한 치료책이 없어서 자기가 무슨 병(病)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율법(律法)은 치료책이 아니라, 율법(律法)은 죄(罪)를 진단(診斷)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도 치료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律法)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는 죄(罪)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단지 유다 백성들은 죄(罪)가 무엇인지?알고도 망했고, 다른 민족들은 죄(罪)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망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암을 예(例)로 생각해 보면, 일단 사람은 암에 걸리면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하지 않는 한 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암에 걸리면 본인에게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완전한 약(藥)이 발견된다면, 의료 역사에 혁신적인 한 획이 그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미 그런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파스퇴르의 공헌(貢獻)입니다. 그는 병균(病菌)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병균(病菌)을 이길 수 있는 백신(白身)을 개발해 냈습니다. 이 백신(白身)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인류는 우리 안에 있는 죄(罪)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罪)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원수(怨讐)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죄(罪)는 없어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타락의 길로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죄(罪)를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입니다.
Ⅲ.세 번의 열네 대
마태 사도는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족보(族譜)를 열거하면서 끝에 가서 이 족보(族譜)를 열네 대(代)씩 세 번에 걸쳐 나눔으로써 새로운 흥미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1:17절)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가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족보(族譜)에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잘 맞지도 않는 족보를 열네 대로 맞추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유다가 망하고, 충분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약속이 성취될 만한 충분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불어넣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約束)하신 것이 다윗에 이르러 성취되기까지 무려 열네 대(代)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망하기까지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열네 대(代)정도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망한 후, 열네 대(代)가 흘렀으니까 이제 무엇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직한 시간이 되지 않았느냐?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일곱이라는 숫자를“완전수”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14라는 숫자는 일곱이 두 번 있는 것이니까 정말 충분하고도 또 충분하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때를 계산하는 것은 맞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건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제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할 때가 되었다는 주의환기 정도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다윗언약”의 충격적인 폐기(廢棄)가 곧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不順從)하는 유다의 폐기(廢棄)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모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 버리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즉 악(惡)한 자는 악(惡)한 자대로, 말씀에 순종(順從)하는 자는 순종(順從)하는 자대로 모두 다 사용하십니다. 단지 악(惡)한 자는 하나님께 실컷 사용당한 후에 자기 악(惡)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倉曹)자는 이 세상에서 버리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불순종(不順從)하는 자만 가장 불쌍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마치“다윗 언약”이 무슨 볼모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慾心)을 채우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惡)한 자는 악(惡)한 자대로 쓰시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다윗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오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무려 일곱 번의 세대(世代)가 여러 번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뜻은 수면(水面)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성급하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다가 낙심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표어(標語)에“하나님은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맷돌을 천천히 돌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악(罪惡)이 너무나 강(强)해서 이런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고는 우리가 죄(罪)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마태는 다윗의 족보(族譜)를 모두 열거한 후에 이제는 시기(時期)가 꽉 찼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족보(族譜)나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時代)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죄(罪)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곧 그분이십니다. 즉 이분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言約)을 성취(成就)하실 장본인이십니다.
이분만이 그 믿음의 언약(言約)에 결재(決裁)를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죄(罪)에 머뭇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아픔과 상처와 깨진 것을 모두 내놓고, 성령으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운명(運命)을 바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공부나 우연(偶然)으로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運命)을 그리스도로 고침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아-멘
찬송가 82장 *성부의 어린 양이*
오늘의 묵상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 교갱원카페. 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필수.상식.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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