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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대인과 일본(Jews and Japan)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일부는 유대인과의 접촉에서 비롯되었으며, 일본은 다시 유대인의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합니다.
초기 유대인과 접촉
16세기와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일본으로 항해한 최초의 외국인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와 영국 해군에 고용된 유대인 상인과 탐험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1639년 문호를 폐쇄하고 200년 넘게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했습니다.
이 칙령은 1853년에 해제되었고, 일본에 정착한 최초의 외국인 중 일부는 유대인이었습니다. 1860년대에는 도쿄(Tokyo) 근처 요카하마(Yokahama)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일본 최초의 회당(synagogue)을 설립했습니다. 1895년에는 50가구의 유대인이 요카하마에 정착했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공동체는 다양했습니다. 마을 유대인 묘지의 묘비에는 히브리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일본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곧 나가사키(Nagasaki), 고베(Kobe), 도쿄에(Tokyo)도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초기 정착민 중 다수는 러시아의 포그롬(pogroms)을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베의 유대인 영웅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발발한 러일 전쟁은 일본이 러시아의 동쪽 영토 확장 야망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해군이 맞붙은 전쟁이었습니다. 약 2,000명의 유대인 병사를 포함하여 70,000명이 넘는 러시아 군인이 일본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 포로 중 한 명은 요제프 트럼펠도르(Joseph Trumpeldor)라는 유대인 전쟁 영웅이었는데, 그는 전쟁에서 팔을 잃었습니다. 트럼펠도르는 현지의 동화된 가정에서 자랐지만, 포로 수용소에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베사라비아, 볼히니아 포돌리아, 시베리아 등 러시아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고향에서 동포 유대인들이 겪은 반유대주의에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펠도르는 유대인 전쟁 포로 협회(Society of Jewish Prisoners of War)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으며, 감옥에서도 이스라엘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는 대의에 동참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트럼펠도르는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시온 뮬 군단(Zion Mule Corp)을 조직하고 신생 유대 국가의 방위력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전쟁 후에는 러시아에서 젊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선구적인 청년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트럼펠도르는 1920년 이스라엘 북부의 유대인 마을인 텔 하이(Tel Hai)를 공격한 아랍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지우네 스기하라(Chiune Sugihara), 열방 가운데 의로운 자
1940년 여름, 리투아니아(Lithuania) 주재 일본 대표 지우네 스기하라(Chiune Sugihara)는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의 외교관들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전령이 스기하라에게 유대인 대표단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전했습니다.
밖으로 나간 스기하라는 유대인 난민 제라흐 와르하프티크(Zerach Warhaftig)를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이스라엘 정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와르하프티크는 중대한 부탁을 했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 난민(Jewish refugee)이 리투아니아로 몰려 들어와, 절박하게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유대인 난민에게 국경을 닫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한 나라는 카리브해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지 퀴라소(Curacao)뿐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소련을 거쳐 퀴라소로 가는 경유 비자가 없었습니다. 스기하라가 그 비자를 발급해 줄 수 있겠냐는 절박한 요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곤경에 마음이 움직인 스기하라는 즉시 비자 발급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만에 스기하라는 도쿄에 있는 상사에게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몇 년 후, 스기하라의 아내 유키오(Yukio)는 남편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에 몹시 괴로워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 걸어온 겁에 질린 남자,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공식 명령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0년 7월 31일부터 8월 28일까지 스기하라는 자발적으로 비자 발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 18시간씩 매일 300건이 넘는 비자를 작성했는데, 이는 한 달치 정규 비자 할당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손으로 직접 쓴 긴 서류들이었습니다. 그는 매 순간이 다른 생명을 구할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식사를 위한 휴식조차 거부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매일 퇴근 후 그의 부은 손을 마사지해 주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스기하라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약 6,000건의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그는 9월 4일 나치의 침공이 임박하여 영사관이 해체되면서 사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1946년 일본으로 돌아온 스기하라는 이러한 비자 발급 "죄"로 일본 외무부에서 해고되었습니다. 1984년 야드 바셈(Yad Vashem)은 지우네 스기하라를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추대했습니다.
일본의 유대교 예시바
유럽의 모든 위대한 예시바(yeshiva) 중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온전히 살아남은 것은 리투아니아의 유명한 미르 예시바(Mir Yeshiva) 뿐이었습니다. 지우네 스기하라 덕분에 약 500명의 학생, 랍비, 그리고 그 가족들이 1940년과 1941년에 리투아니아를 떠나 일본 고베로 갔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미르 난민들은 퀴라소 입국 비자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베에 정착하여 예시바를 재건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시바의 일본인 이웃들이 당황했습니다. 예시바 학생들은 매일 18시간씩 공부했고, 유대인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기도 소리가 동네를 가득 채웠습니다. 지역 관리들이 파견되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예시바는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고, 일본 당국은 그 구성원들을 "성스러운 이상주의자“(Holy Idealists)"라고 불렀습니다.
1943년, 일본은 미르 예시바 구성원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 난민들을 일본이 점령한 상하이로 이주시켜 게토에 거주하도록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독일 동맹국으로부터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압력을 거부했습니다, 미르 예시바는 전쟁 내내 운영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예시바는 예루샬라임으로 이전되었고, 지금도 번창하며 매년 수천 명의 학생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일본 헌법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다
일본 헌법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의 권리와 보호를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국민에게 평등과 자유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이 획기적인 조항이 22세의 유대인 난민인 비테 시로타 고든(Beate Sirota Gordon)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23년 비엔나(Vienna)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베아테의 아버지 레오(Leo)는 유명 피아니스트였으며, 베아테가 다섯 살 때 일본의 명문 제국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했습니다. 베아테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며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해졌습니다. 뛰어난 학생이었던 베아테는 1939년, 겨우 15살의 나이에 미국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Pearl Harbor)공습 이후, 베아테는 부모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부모님의 생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미국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대학 측에서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도 시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미국 정부 감청 기지에서 일본 라디오 방송을 감시하고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는 라디오 선전물을 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베아테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43년 현대어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전쟁 후 민간인의 일본 여행이 제한되자, 베아테는 민간 직원 신분으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참모진에 합류했습니다. 1946년, 그녀는 장군과 함께 도쿄로 이동했고, 곧바로 불타버린 폐허가 된 가족의 집으로 갔습니다. 결국 비테는 수용소에서 부모님을 발견하고 맥아더를 위해 일하면서 부모님을 간호해 건강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1946년 2월, 베아테는 일급 기밀 임무를 받았습니다. 바로 맥아더 장군을 도와 전후 일본의 새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맥아더 팀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베아테는 헌법의 여성 관련 조항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고, 7일 안에 작업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마치 물건처럼 취급받았습니다."라고 그녀는 회상했고, 이것이 바로 그녀의 운명을 바꿀 기회였습니다.
베아테는 가능한 한 많은 국가의 헌법을 연구한 후, 일본 헌법의 다음 두 조항을 초안했습니다. 제14조는 "인종, 신념, 성별, 사회적 지위 또는 가족 출신으로 인해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제24조에서 "배우자 선택, 재산권, 상속, 거주지 선택, 이혼 및 기타 문제"에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베아테는 유대인 직원이었던 조셉 고든(Joseph Gordon)과 결혼하여 남은 생애를 아시아 예술 발전과 지역 예술가들을 미국에 소개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쓰나미 이후의 도움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지진이 일본 북부를 강타하여 파괴적인 쓰나미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많은 비극적인 재난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이 재난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대응한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외무부가 수만 개의 비상 물품으로 구성된 초기 구호 물품을 일본에 보냈고, 당시 이스라엘 주재 일본 대사였던 타케우치 하루히사(Haruhisa Takeuchi)는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 비극의 여파 속에서 자원하여 도움을 주고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 준 의료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초기 지원물품이 발송되자 이스라엘 단체들은 일본에 장기 거주지를 마련하여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정신 건강 회복을 돕기 위한 구호 활동가들을 교육했습니다. 이스라엘 국제 인도주의 단체인 이스라에이드(IsraAID)의 자원봉사자인 메이라브 탈 마르갈리트(Meirav Tal-Margalit)는 이스라엘 자원봉사자들이 그토록 효과적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사실상 트라우마 연구소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방법들은 전 세계적으로 효과가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문화적 적응도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인간이고 같은 두려움과 같은 꿈을 공유합니다."
코셔 스시(Kosher Sushi)
일본 요리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유대인 소비자들은 일본 요리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뉴욕 최대 하시딕 공동체인 버러 파크(Borough Park)에는 62개의 스시 식당이 있습니다. 정통 유대교 연합(Orthodox Union)의 코셔 부서 최고운영책임자(COO)인 랍비 엘리펀트(Elefant)에 따르면, 뉴욕 코셔 레스토랑의 80~90%가 스시를 판매합니다.
코셔 스시를 비롯한 일본 음식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질 전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코셔 일본 음식 및 음료 시장을 충족하기 위해 최근 정교회 연합과 영국의 KLBD 코셔 인증이 일본에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By Dr. Yvette Alt Miller ( Ph.D.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참고:
- 요제프 트럼펠도르(Joseph Trumpeldor): 1880년 11월 21일 – 1920년 3월 1일, Zion Mule Corps를 조직하고 유대인 이민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오는 데 도움을 준 러시아의 시온주의 운동가. 그는 1920년 텔하이 정착지를 방어하던 중 살해당했고 이후 유대인 국가적 영웅이 되었음.
- 지우네 스기하라(Chiune Sugihara): 1900년 1월 1일 ~ 1986년 7월 31일. 일본 제국의 외교관. 주 리투아니아 영사관 영사로서 나치 독일로부터 수 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린 인물. 일본판 쉰들러 리스트로 불림. 1969년에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은 후,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야드바셈 상을 수상하고 예루살렘에 기념 현판이 설치되는 등 ‘열방의 의인’으로 기려졌다.
- 비테 시로타 고든(Beate Sirota Gordon): 1923년 10월 25일 ~ 2012년 12월 30일.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공연 예술 진행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산하 외국방송정보국( FOIS) 의 전쟁정보국 에서 근무.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와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의 통역으로 임명. 일본 전후 헌법 초안 작성자 중 한 명으로 발탁되어 남녀 평등을 명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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