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시편 130편 1 - 8절
1 여호와여, 깊은 절망 속에서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
2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고, 자비를 구하는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보소서.
3 여호와여, 만약 주께서 죄를 기록하셨다면, 주여, 누가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주께 있으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하며 높입니다.
5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나는 주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6 나의 영혼이 주를 기다리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며,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사모합니다.
7 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의 소망을 여호와께 두십시오. 변함없는 사랑이 여호와께 있으며 충만한 구원이 그분께 있습니다.
8 주가 친히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묵 상>
본문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자의 노래>로 ‘성전 순례시’ 15편 중에서 11번째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언제 기록하였는지! 어떤 일을 배경으로 기록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용 상으로는 굉장히 신약의 이신칭의적입니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께 용서해 주실 것을 바라며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깊은 곳에서의 참회와 용서의 간청(1-4절)
"여호와여, 깊은 절망 속에서 내가 주께 부르짖습니다."(1절) 시인은 과거에 겪었던 ‘깊은 절망 속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깊은 절망 속’은 ‘아주 높은 산의 골짜기’, '바다 속의 심연'을 뜻합니다. 또한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수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큰 고난이나, 고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은 '깊은 절망 속'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표현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인생의 고난과 고통이 바로 깊은 절망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한다'라고 고백합니다.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고, 자비를 구하는 나의 울부짖음을 들어 보소서."(2절) 시인은 ‘들으소서’, ‘기울이소서’와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 자신을 깊은 절망 속에서 건져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시인이 1절에서 간구할 때에는 ‘여호와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현존하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 의미는 ‘주인’, ‘소유자’, ‘주권자’입니다. 그래서 1절의 간구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제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 깊은 절망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2절의 간구는 “나의 주인이신 주님,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주십시오. 종은 주인이 책임져 주시듯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몸을 책임져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만약 주께서 죄를 기록하셨다면, 주여, 누가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3절) 시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깊은 절망 속’에서 부르짖게 된 원인이 천재지변과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삶, 자신의 제국을 꿈꾸다가 당하게 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시인은 ‘죄’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복수로만 사용하는 명사입니다. 즉 시인은 자신이 무수히 많은 죄들를 짓고,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아주 처절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아주 또렷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주께 있으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하며 높입니다."(4절) 여기서 '용서하심’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하심’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신은 불가능한 용서입니다. 그 용서는 오직 주님만이 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만이 깊은 절망 속에서 건져 올려질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영어로 “Your Kingdom come”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내 세상’은 아무리 와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크게 와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임할 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심이 주님께만 있으니 그러므로 이에 주님을 경외하며 높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까닭은 그것 자체로 마침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은혜를 깨닫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높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날에는 하나님이 없는 삶,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통해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있는 삶,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의한 삶,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2. 개인과 민족의 용서해 주심을 기대(5-8절)
시인은 자신이 ‘깊은 절 망 속’에 빠져 있음도 알고, 거기에서 건져 올려 주실 분도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나는 주의 말씀에 나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5절)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다’는 표현에서 초점은 ‘기다림’에 있지 않고, ‘여호와’에게 있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기다림이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기다림이라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동사 '기다리다'는 '앙망하다', '존경하여 우러러 보다', '줄로 묶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묶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줄을 당겨주심으로 나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살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소망’은 동의어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다리는지를 강조해서 다시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기다리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다리며,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사모합니다."(6절) 군대에서 ‘경계’는 군인들의 생명과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굉장히 유명합니다. 파수꾼이 경계를 제대로 서려면, 추위와 더위하고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졸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파수꾼은 동이 트는 것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보다도 더욱 더 간절히 주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파수꾼이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고 한없이 무겁게만 여겨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것이 죄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더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야 하는 존재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민족 전체도 동일해야 함을 촉구합니다. "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의 소망을 여호와께 두십시오. 변함없는 사랑이 여호와께 있으며 충만한 구원이 그분께 있습니다. 주가 친히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입니다."(7-8절) 이스라엘 백성 전제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 이유는 변함없는 사랑과 충만한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으로 맺은 사랑’, ‘실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언약으로 맺은 사랑 역시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실수와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세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기에 하나님의 구원도 충만합니다. 언약으로 맺은 변함없는 사랑과 충만한 구원의 극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삶,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다가 ‘깊은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고, ‘우상숭배의 나라’, ‘자신의 나라’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기다린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인생의 주인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겠다는 결단과도 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날의 삶을 주신 자리에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간절하게 사모하십시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어 가십시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나라를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만 임하기를 사모하십시다.
<오늘의 기도>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만 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능력과 위엄, 놀라운 주님의 사랑, 실패가 없으신 사랑, 기적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주님을 찾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옵소서. 도저히 나의 능력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을 때에 자유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때 나의 삶과 인격과 신앙이 더욱 온전해지며, 깊어지게 하옵소서. 인생을 살면 살수록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며, 바라게 하옵소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다리며 갈망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만을 존경하여 우러러 보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의 줄로 묶어 주옵소서. 주님 말씀으로 나를 묶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나로 인하여 나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