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1915년 10월 21일, 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고향은 아일랜드 웨스트미스 주 드럼러니인데, 바다가 없다. 라 신부는 태어난지 19일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34년 달간파크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1940년 12 월 성 골롬반 외방서교회에서 서품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동기들은 그를 평소 강인한 정신과 체력을 지닌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라 신부는 1941년에서 1946년까지 영국에서 선교활동 후, 194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한국어 공부를 마치고 1948년 한국에 도착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선교사들이 동물을 싣는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라 신부 역시 동물을 싣는 화물선을 타고, 배 멀미를 하는 동물들과 함께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왔다.
첫 파견은 원주 원동성당에서 한국 신자들의 깊은 신앙심을 목격했다. 주일에는 1100명의 신자들이 마사 참례뿐 아니라, 평일도 100명 이상이 미사에 참례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음 파견지는 묵호였다. 강원도 동쪽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1949년 3월 그가 제 2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당시 묵호 인구는 15000 명의 작은 어촌이었고, 신자 수는 시내 30명 시골 50명이상이었다.
라 신부가 묵호성당에 온지 1년이 넘어 625가 터졌다. 6월 27일에는 북한 공산군 육전대 병사 1800명이 옥계 정동진 금진 지역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그때 라 신부는 삼척 성내성당의 진 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라 신부는 ‘카톨릭 신앙으로 최후까지 성당을 지키자’ 라며 죽을 각오를 하고 묵호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때 신자들이 배를 준비 하여 부산으로 가자고 했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회자가 갈 수 없다’ 라고 했다.
6월 29일 공산군이 코밑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만우리 골짜기에 살던 남봉길 프란치스코 회장은 어렵게 신부를 설득시켰고, 라 신부는 그를 따라 만우골 골방생활을 시작했다.
힘든 생활을 이어가던 중 7월 29일 공산당원에게 잡혔다. 공산당은 소고삐로 신부를 결박해 살구나무 옆에 무릎을 꿇렸다. 이후 묵호 지서로 끌려간다.
8월 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밤재골에서 총살 당했다. 그의 나이 35세 때다.
라 신부의 시신은 1950년 11월 수습되었다.
묵호경비사령부 앞 가묘에 안장했다.
1951 년 춘천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역으로 옮겨진다.
권석순 전, 강원대학교 외래교수는 묵호성당 순교자 형양위원장으로 묵호성당 70주년 기념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전기 ‘라 파트리치오, 그리고 동쪽 바다 묵호’를 발간하는 등 신부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생애 기록은 물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묵호성당은 여전히 많은 신자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