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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ending story - 1. 카산드라 (5)
“아, 문 말이야. 기름칠을 좀 하도록 해. 삐걱 거리는 소리가 심하던데.”
헬리오스라 불리어진 청년은 의자에 앉지 않은 채 가볍게 미소 지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가가 그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
리엘이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 또 발뺌하긴……. 프레이와 관련된 건이라는 건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
“쿠쿡…!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속 시원하게 해명해 보는 게 어때?”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순간 청년의 얼굴이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표정으로 바뀌면서 그를 흘겼다.
“내 장난감. 당신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지 말아줬으면 해.”
“그래? 장난감? 너에게 그 아이가 그 정도 위치인가? 하지만 네가 그 장난감을 어떻게 할 지 잘 알고 있어. 어차피 부수려면 나에게 주는 게 더 낫잖아?”
“네 손에 들어가게 하기 싫어. 그래서 부수려는 거야. 어때, 대답이 됐나?”
“아니…….”
의자에 앉아 맥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엘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네겐 장난감일지도 모르지만. 내겐 친구야.”
“친구라……. 그래봤자 실없는 헛소리.”
“맞아. 헛소리야. 내가 원래 좀 미쳤잖아? 적어도 네가 재는 잣대로는 말이야.”
“그래? 그렇게라도 이해해주니 나에겐 고맙지. 그럼 또 들르도록 할게.”
그렇게 말한 헬리오스라는 청년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다시 뒤를 돌아 리엘을 응시했다.
그의 모습은…….
“그나저나 이 얼굴. 꽤나 쓸 만하던걸.”
리엘을 바라보는 얼굴은 시빌로스 드 메르타 자작이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리엘도 일어났다.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고 뒤돌아섰다.
책장에서 책을 꺼낸 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치워 올려놨다.
그리고 다시 그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실컷 사용하라고.”
문이 끼익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자네도 내가 준 마지막 선물, 잘 쓰고 있더군.”
문이 닫혔다.
“세이르……. 들켰나?”
리엘이 허공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대답이 들려왔다.
「면목 없다, 주인. 역시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럴 테지. 나도 네가 들킬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네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로할 필요 없다. 나는 임무를 실패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
“지금 당장 손이 필요해. 오히려 손을 줄이는 바보짓은 할 수 없어. 네겐 확고한 이유가 필요하겠지. 이걸로 만족하나?”
「알았다. 새로운 임무를 내리도록 해라, 주인.」
“좋아……. 이번 임무는…….”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라도 하는 듯 리엘이 눈을 감았다.
“그래, 프레이의 정령이 되도록 해.”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주인.」
“말 그대로다. 너의 소유권을 프레이에게 넘긴다. 독자적인 마나풀을 갖고 있는 너만이 가능하겠지.”
「불가능하다는 걸 알 텐데. 나는 검의 정령. 매개물이 필요하다. 그 매개물은 당신이 가지고 있다. 나의 소유권을 넘긴다는 것은 그 검을 함께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이에게 검을 넘길 방법이 있는가?」
“세이르……. 너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프레이에겐 이미 리오스가 붙어있다. 아마 그의 신변에 위협이 있다면 분명 연락이 올 거다. 혹은 리오스를 운반책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 정도면 만족하겠나?”
「알았다. 아직은 당신이 내 주인. 거절할 권한도, 힘도 없다.」
“역시 넌…… 정이 안 가는 녀석이야. 말을 어쩌면 그렇게 얄밉게 하는지 궁금하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더 앉아있던 리엘은 책을 펼쳤다.
“헬리오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책을 한참 넘기더니 접혀있는 페이지를 찾아서 펼쳤다.
“검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다. 네가 방패를 부수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네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아마도…….”
책에는 복잡한 문양이 각인된 검과 그것을 쥐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게 검을 넘긴 것이겠지…….”
그리고 그는 허공으로 손을 뻗쳤다.
마치 보이지 않는 주머니에 들어간 듯, 팔의 팔꿈치 부분까지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팔이 다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책에 그려져 있던 검이 쥐어진 채로.
“듀랜달(durandal)……. 환상. 영웅의 검. 네가 이걸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피식 미소를 자아냈다.
“하긴, 그 사람 말고 이걸 다루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능력은 충분하겠지.”
그렇게 정처 없이 뛰고 있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인지한 건 벌써 흠뻑 젖은 다음이었다.
그냥 젖기만 한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작은 생채기들이 보였다.
아프지는 않았다.
이런 조그만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두 달을 지내는 사이 카사는 많이 위태로워져 있을 게 분명한데 의미없는 수련 따위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까 막막했다.
또 다시 후작의 저택으로 갈까?
“그런 바보짓……. 다신 할 수 없어.”
아마 의식도 없겠지만 카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리엘은 그저 불쌍하다고 느낄 뿐, 그녀에 대한 집착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편이 나한테는 좋지만…….
멀리 후작의 거대한 저택이 보인다.
젖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린다. 머리카락만이 아니다.
점점 눈이 감겨 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바보였나 보다.
희미해진 의식 사이로 내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진다.
그 바보 의사의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자식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나를 핀잔주던 그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젠장할…….”
빗물에 섞여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어느새… 어느새 그도 내겐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상황, 낯이 익다.
카사와 처음 만난 날, 그 날은 비가 아니라 눈이 내렸었지만 그 때에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비가 눈을 녹인다.
눈이 녹아 바닥이 흥건해지고, 이미 젖어버린 내 옷을 더욱 적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내 마음에도 스며들어 미칠 것 같은 이 감정을 진정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엄습해오는 어둠에 나는 몸을 맡긴다.
어둠이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차가운 바닥이 분명할진데 따뜻함이 나를 감싼다.
그리고 눈을 뜬 곳은 또 다른 곳이다.
그리고 내 눈 앞을 작은 무언가가 활강한다.
그 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 피부에 검은 턱시도를 입고 흰 나비넥타이를 멘 그 조그마한 인간은 등에 두 쌍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렇게 인형처럼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은 조그만 인간이 입을 달싹이며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무슨 울림처럼 퍼져 들어왔다.
「깨어났는가?」
분명히 깜짝 놀라기에 충분한 일인데, 내 마음은 이상하게 착 가라앉아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죠?”
그저 담담히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 이상한 작은 인간은 약간 당황하는 듯 했다.
「놀랍지 않은가?」
“제가 놀라워해야 하나요? 충분히 놀랍습니다. 주먹보다 작은 날개달린 인간을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요. 게다가 옷도 갈아입혀 주셨군요?”
새 옷에서만 느껴지는 빳빳함에 나는 무심코 덧붙였다.
칼라는 풀을 잔뜩 먹여 날카롭게 서있었고 셔츠도 얼룩이 없는 걸로 보아 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가? 아무래도 좋다. 난 그냥 전령일 뿐.」
“당신이 정령인가요?”
「그렇다. 덧붙이자면 나는 인도하는 바람의 정령, 리오스다. 나의 물주의 지시에 따라 당신을 인도하고자 왔다.」
“당신의 물주라는 자가 누구인지 대강 짐작이 갑니다. 그는 날 쫓아내고 또 무슨 볼일로 당신을 연결했습니까?”
「대답할 수 없다.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리지 않는다. 나는 주인의 의도를 알 권한이 없다. 그저 그가 내리는 임무만 수행하는 것이 나의 역할. 그가 날 버린다면 난 버려지는 것이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위해 나를 희생하려 한다면, 나는 희생당할 뿐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힘든 일이겠네요. 정령이란 거.”
「내가 그의 정령이 된 것은 필연. 운명의 톱니가 그와 맞닿아 있었을 뿐이지,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은 정령으로서 자부심 같은걸 가지고 있나 보군요.”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옳은가?」
“난 내 목숨 따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목숨 내던져버려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왔죠.”
나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 떠도는 나에 대한 질책을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했다.
“……회피해 왔던 거죠. 나의 나약함을 그럴듯한 이유를 통해 합리화 시켰던 거였어요. 그래, 당신의 물주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현명한 해결법을 내놓았으니까요. 내가, 내가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보같이 그를 무시하고 파멸의 길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갑갑했다.
크게 한번 소리를 질러버리고 이 울분을 삭히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꾹 눌러 담아본다.
“분명…… 저택 안에서 나를 구한 것도 당신이겠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뇌까렸다.
「모든 것은 그의 지시였다.」
“…하하하.”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미칠 정도로 괴로운 마음뿐이었는데 갑자기 못 견디게 우스웠다.
“하하하! 아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을 때가 되었을 때야 나는 숨을 헐떡이며 털썩 주저앉았다.
“우습지 않습니까? 그의 수련을 받으면서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병사 두 명을 이기지 못하고 또 그가 제 목숨을 살렸습니다! 내던져버린 목숨을 그가 주워다 줬습니다! 전 대체 어디에 이 목숨을 바쳐야 합니까? 카사를 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살다가 죽어야 합니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대체 뭡니까!”
그 작은 인간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당신은 참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부정하지 않았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그걸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이미 마음속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해놓았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당신이 정한 그 선택지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의 날개가 어깨를 감싸더니 땅에 내려앉았다.
그는 날개에 가려진 틈으로 입을 실룩이며 말했다.
「충실히 해나가면 될 뿐이다. 스스로 정하기 어렵다면… 당신의 안에서 내린 명령을 따라라.」
순간 마음속에 안개가 걷힌 것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밤의 고요를 깨고 나타나는 한줄기 햇빛처럼 그 말은 나의 가슴에 꽂혔다.
“힘이, 힘이 필요합니다.”
한참 만에 내가 혼잣말을 하듯이 한 말이었다.
“그 약을 구할만한 힘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어요. 나는 지금껏 어리광을 부렸던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리엘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앞장서요!”
나는 그를 재촉했다.
그의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주위의 배경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흰 색의,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간에 나와 그, 둘 만이 있었다.
그리고 유리가 깨지듯 그 투명한 공간에 금이 가더니 깨어져 다시 나는 리엘의 응접실에 서 있었다. 리엘은 보이지 않았다.
리엘은 지하의 침실에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프레이……. 시간이 없다……. 서둘러!” 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Never Ending Story - 카산드라 끝. 듀랜달에 계속. -
드디어 카산드라가 끝났습니다. 듀랜달은 다들 알다시피 '롤랑의 노래'에 잘 알려져 있죠. 롤랑의 검으로 알려져 있는 명검인데 아버지 가늘롱의 술수에 빠져 위기에 처한 롤랑이 샤를마뉴 대제에게 하사받은 듀랜달을 적에게 넘길 수 없다 판단하여 부수기 위해 돌을 내리쳤는데 돌을 자르고 박혔다는 일화도 전해지죠. 이름도 괜찮고 롱소드 스타일의 검이기 때문에 이걸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스씨 블로그에 다녀갔었습니다. 그림 잘 그리시던데요. 어쨌든 카산드라는 후회가 많이 남는 습작이었습니다. 본의아니게 대화가 너무 많고 전투가 좀 더 섬세하게 묘사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저도 조금은 더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쓸 내용이 생각보다 많이 떠올라 기쁘기도 했습니다. 되도록이면 지금까지 있던 기존의 판타지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자연계의 실프, 샐러맨더 같은 개성이 없는 정령을 피했습니다.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지만 왠지 우울해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네요. 2편 듀랜달에서는 카산드라의 후편인 약초의 행방과 헬리오스와의 결전, 리엘의 정체, 듀랜달의 실체, 그리고 주인공 프레이의 기억 등 여러 가지가 나오면서 첫번째 이야기가 종결될 예정입니다. 연작식으로 만들 예정이고 한 이야기는 약 두 편 분량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어익후. 후기가 너무 길었네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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