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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산생의 재발견
포은 정몽주(13371.131392.4.26)는 용인 이 품고 있는 최고의 역사인물이며 정신가치 자산이다.
이 땅을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의 영향력과 위상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에 비견될만큼 크고 방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그에 대한 후세의 인식은 오히려 그에 못 미치는 감이 있다.
포은의 넋이 용인에 잠들어 있고 포은의 정신이 이곳에 깃들여어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시민 모두가 큰 자부심으로 여길 만하다.
2023년 1월7일 과 8일 이틀간 용인특례시 처인구 모현읍 능곡로 정몽주 선생 묘역에서 제19회 포은문화제가 열린다.
이 문화제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딱 20년 전인 2003년 정몽주는 문화관광부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이에 발맞춰 용인사와 용인문화원은 그해 6월21일 제1회 포은문화제를 개최한다.
이후 농번기에 하절기 날씨 문제로 야외행사 진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0월로 개최 시기를 바꿔 '가을 문화제'로 정착됐다.
용인 포은문화제는 그동안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종친회)에서 신령에게 알리는 제사인 고유제와 천장(묘지를 옮김) 행사를
지원해 왔다.
이제 성년(스므살)을 앞둔 문화제로서 의례에 무게를 둔 포은 추념행사는 진행하지 않는 대신 '포은의 진정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새기고 현재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용인르네상스'의 기반을 이루는 신개념의 인문 문화축제로 거듭날 예정이다.
10월7일 포은 묘역에서는 뮤지컬 '단심가-임향한 일편단심'과 국악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 아리랑'이 공연도니다.
또 포은학당에서는 '정몽주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강의가 있다.
선비의 예악(예절과 풍류)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어린이들을 위한 모바일 앱과 현장체험 '플레이 포은스쿨' 프로그램도 예정되어 있다.
'용인의 개혁혼', 2023년 '포은의 심장'이 뛰고 있다
영일 출신 정몽주의 묘소가 왜 용인에 있나
정봉주의 출생지는 영일(포항)이가.
(영일에서 태어나 얼마후 영천으로 옮겼더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묘소는 용인에 있을까.
그는 1392년 개성 선지교(나중에 선죽교로 이름을 바뀐다)에서 죽음을 맺은 뒤 다리 아레에 버려졌다.
인근의 승려들이 수습하여 개성의 충덕리에 묻는다.
1407년 경에 고향 영천으로 안장하고자 유골을 운구하여 용인 죽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맹정(죽은 이의 관직과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날아가 현재의 묘소가 있는 산중턱에 꽂혔다.
다시 상여를 옮기려 했으나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떄 어떤 풍수가가 나타나 하늘의 계시이니 깃발이 꽂힌 곳에 묻는 게 옳다고 권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상여가 움직였고 결국 지금의 묘자리(모현읍 능원리 산 3번지)에 묻었다고 한다.
포은이 스스로 이 자리를 택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왔다. (1985년 최상수 '조선민간전설의 연구' (성문각) 자료 참조)
조선은 정몽주가 죽고난 뒤 '의정부 영의정'이란벼슬을 추증했다.
용인ㄴ묘소에는 원래 그 벼슬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벼락이 쳐서 비석이 꺠져 무너졌다.
자손들은 이것이 '조선의 고나직'을 새긴 것에 대한 포은의 분노 떄문이라고 짐작했다.
이후 '고려 문하시중'이란 비를 다시 세웠다.
그 뒤로는 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정몽주 묘소에 서 있는 비석에는 조선이 나중에 준 벼슬을 적혀 있지 않고 '고려 문하시중'만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이중환의 '책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는 고려와 조선을 바꾼 개혁가였다.
그렇다면 정뭉주는 왜 그토록 당대와 후대의 추앙을 받아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일이 포은 정신을 용인의 심장에 두고 있는 우리가 선적으로 해야할 일이다.
정몽주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올라운드 플레이어이자 철학자, 개혁가 였다.
요즘 말로는 '프네상스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이 용인에 있는 것이 놀라운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왕국의 체제를 설계할 만큼 뛰어난 정치철학자이며 신념과 용기로 무장한 외교가였다.
전투를 치러 승전으로 이끈 장수이기도 했다.
다른 영역에서 워낙 빼어났기에 소홀히 여겨지는 점이 있지만 최고의 반열에 오른 시인이었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한 것들을 투철하게 실천하는 행동가였고 학문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지식인 이었다.
이 나라 성리학의 개척자
'정몽주는 동방 이학(성리학)의 비조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지식인으로 꼽혔던 목은 이색(1328~1396)이었다.
이 말을 한 1367년은 정몽주가 30세 되던 때였다.
그는 주위 지식인들의 혀를 내두르게 걸출한 천재였다.
목은은 정몽주보다 9살 위였다.
성리학 관련 책들이 드물던 때 정몽주는 경전의 구절들을 남김없이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의 강의를 듣는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떄도 있었는데 이후 중국에서 관련 서적들이 들어오면서 정몽주의 가르침이 모두
그것들과 일치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정몽주가 학문적으로 성장하던 무렵은 고려 공민왕 때였다.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로 당시 사원은 비대해졌고 불교행사의 낭비가 심해졌으며
승려는 세속화되어 백성이 수탈하는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 광종이래 도입한 과거 제도가 문장가를 선발하는 시스템처럼 되어 정치철학이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공민왕은 사대부를 등용하고 성균관을 복구하여 성리학을 진흥하는 개혁정치를 시행한다.
여기에 정몽주는 '성리학 중흥' 개혁을 주도하는 성균관의 강학 선생이었다.
이떄의 정몽주에 대한 감동을 당시 청년 정도전이 기록해 놓은 글이 있다.
'나라에서 과거시험을 보았을 때 정몽주 선생은 삼각산에서 내려와 연거푸 3번이나 1등을 차지해 명성이 자자했다.
내가 자주 뵈러갔더니 드디어 가르침을 내려주셨는데 평소에 듣지 못 했던 것을 들었다.
정몽주 선생은 대학과 중용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고 논어와 맹자의 자세함에서 조심하고 간직하며 함양하는
비결과 체험하여 확충하는 방법을 얻고 역경에 이르러 선천과 후천이 서로 본체와 작용이 됨을 알고, 서경에서 정일집중이
제왕의 심법을 전하던 것임을 알고 시경에서 만이물칙(사람의 도리와 만물의 법칙)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고,
춘추에서는 그 도의 (도의 마땅함)와 공리(공명과 이익)가 잘라지는 것을 분별하였으나
우리 오백년 동안 이렇게 이치를 지극하게 밝힌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느가?'
목은 이색이 정도전의 이런 말을 듣고 '정몽주는 명쾌하고 탁월하다.
세로로 말하든 가로로 말하든 모두 맞아서 타당하지 않은 게 없다'고 칭찬했다.
정몽주는 오랫동안 졍연관을 지내면서 임금들을 가르친다.
주로 서경의 '이훈(중국 은나라 를 세운 재상인 이윤의 가르침)'과 '열명(은나라 고종 때 재상인 부열의 언행록)' 편이었다.
임긍에게 유학의 경세제민의 덕목을 갖추게 하는 가르침이다.
그는 왕들에게 치국의 도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그는 적극적인 제도의 혁신으로 성리학을 실천하는 데에 도 총력을 기울였다.
왕도에 5부학당을 개섫고 지방에 향교를 설치했다.
불교적인 상제를 주자가례로 바꿨고 그가 부모상을 당했을 땐 여묘살이를 하여 실천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성리학의 발흥과 고려의 멸망으로 중단 되는듯 했다.
조선이 시작된 이후, 그는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전파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을 왕국의 지배이념으로 삼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용인에 묻혀있는 조광조는 정몽주의 성리학 지배체제를 조선의 정치질서로 확립하는 혁신의 한 챕터를 완성한 존재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조정치는 그 대부분이 고려의 정몽주가 닦아놓은 길을 넓혀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는 조선을 만든 고려였고 죽어서 이후 500년의 정치를 움직인 놀라운 성리철학자였다.
포은문화제는 '포은의 뜻'을 기리는 축제다
최고의 국가개혁가
성리학은 안방에 앉아 옛책이나 외우는 탁상공론의 학문이 아니다.
그 핵심은 국가개혁이며 제도의 정비에 있었다.
정몽주 개혁 제1호는 전제(농토 소유 제도)의 개혁이었다.
정권을 장악한 권문세가인 이인임 일파는 어마어마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국가 수입은 줄이고 농민 착취는 키웠다.
포은은 왕에게 사전(개인농토) 혁파를 건의해 관철시켰다.
개혁 제2호는 수탈을 자행하는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막는 것이었다.
수령의 자격을 엄격히 했고, 감사를 파견해 ㅂ정과 비리를 차단했다.
중앙에는 경력도사라는 직책을 두어 금전과 세무의 출납을 감시했다.
개혁 3호는 재해 방지와 국고 보전책이었다.
정몽주는 의창을 설립해 흉년 때 백성을 구제하도록 했고 수참(강에 설치한 역참)으로 세수 징수의 효율화를 기했다.
개혁 4호는 국가 법제의 확립이었다.
조정의 헤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중국(명나라와 원나라) 법제를 참고하여 신율을 편찬했다.
그의 개혁들은 경국제민(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함)의 실천이었으며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외교관 정몽주를 기억하라
'외교관 정몽주'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천재 유학자였고 비운의 최후를 맞은 강렬한 인상 떄문에 이점이 오히려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는 명나라에 3회, 일본에 1회, 모두 네 차례 사신ㅇ로 자녀왔다.
잘 다져진 외교 환경 속에서의 길이 아니라 모두 죽음을 무릎쓰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당시 고려는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몽골족 원나라를 북으로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한 명나라는 고려를 향해 복종을 요구하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다.
원나라의 부마국(사위국가)으로 근 100년을 지낸 고려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명나라의 자국이 보낸 사신이 고려인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압박을가해 오고 있었다.
명은 고려응 징벌하겠다고 위협하며 고려사신을 억류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말 5000픽과 금 500근, 은 50000냥과 5년 밀린 세공(해마다 바치는 공물)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1384년의 일이었다.
고려 우왕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진평중이 아파서 못 가겠다고 하여 경을 대신 보내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
정몽주는 말했다.
'군왕의 명은 물불이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성절에 맞춰가려면 60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경 8천리길은 90일이 거리라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어느 날 떠나겠는가?'
왕이 묻자 정몽주는 말했다.
'어찌 감히 머뭇거리겠습니까.'
이 말을 하며 바로 출발했다.
그는 밤낮으로 달려 성절 전에 명나라에 들어갔다.
정몽주는 명나라 태조를 설득하여, 고려 사신을 돌아오게 했으며 2년 뒤(1386년) 다시 사신으로 들어가 밀린 세공을 탕감했다.
일본행도 심각했다.
1377년 먼저 갔던 나홍유가 억류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런 때에 정몽주는 주저없이 일본사신으로 가서 외교의 이익을 설명하여 일본인들을 감화시켰다.
왜인들이 고려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1378년 정몽주는 다시일본으로 가서, 포로로 잡힌 고려인 수백명을 귀환하게 했다.
이후에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정몽주는 자신의 글을 지니고 가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일본인들은 정몽주를 추앙하기까지 했는데 그가 죽음을 맞았을 때 승려들이 제를 올리며 명복을 빌었다.
정몽주가 써준 '매창춘색조 판옥우성다(매화 핀 창앞은 봄빛 멀었는데 판잣집 빗소리가 요란하구나)' 한 구절은 오래도록 일본을 울린 절창이었다.
외교가 정몽주의 목숨을 건 결행은 심각한 국가 위기를 타개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가 다른 사건과 스토리에 가려져 제대로 읽히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그는 군인으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1380년(43세때) 이성계의 참모로 전라도 운봉으로 내려가 왜구를 쳐서 대승한기록이 있다.
문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선 몸을 아끼지 않는 용맹한 충정을 지닌 용감한 무인이기도 했다.
포은 바로 알기
정몽주에 대한 오해1 : '충신'을 넘어 국가경영의 대지식인
많은 이들이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이라고 한다.
이게 적합한 말일까.
그가 고려의 충정을 지킨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조선이 역성혁명(고려의 왕씨에서 조선의 이씨로 성을 바꿈)으로 탄생하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저지했던 존재였다.
고려의 충신이지만, 이어진 조선으로서는 역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런 태도에 태종이 되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그를 제거한 것이 선죽교의 참살이었다.
그가 고려왕조를 위해 죽음까지 감수했던 것이 우리가 저선을 지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기려야 할 이유가 될까.
정몽주가 충신으로 기려진 것은 그를 죽인 태종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적극적인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왜 조선 왕들은 고려의 충성자를그토록 높여 정신적인지주로 삼았을까.
그 까닭은 정몽주가 지키려고 했던 것이 고려 왕조 자체가 아니라 정치체계의 철학과 가치솬이었고 정몽주를 제거한 뒤
조선 왕조가 세우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 철학과 가치관이었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저항하는 몸'을 죽인 대신 그의 '정신'을 살려서 왕국을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조선의 의욕이 반영된 대목이다.
정몽주에 대한 오해2 : '일편단심' 시조는 , 포은의 마음 표현일 뿐
정몽주의 지조를 드러내는 일화로, 선죽교의 죽음이 있기 직전 이방원과 나눈 '시조 배틀'이 자주 거론된다.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를 읊자 포은은 즉석에서 단호하게 '이 몸이 죽고죽어'라는 단심가를 읊는다.
물론 정몽주가 뛰어난 시인인 만큼 그런 시를 즉흥적으로 옲을 능력이야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조를 지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당시 시조는 대개 민간에서 기생과 가인들이 즐기던 '소리(유행가요)' 장르였으며 한글 창제 이전이라 한글로 기록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신채호 선생이 밝혔듯 단심가는 백제시대 여성 한주(한구슬)가 읊었다고 전해지는 옛노래다.
단심가는 그때 즉석으로 지어 부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래 전해져 내려오던 것들을 빌어서 결연한 자신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이방원 시조 회유에 당연한 응수했을 뿐이다.
시조 '이 몸이 죽고죽어'의 작가로 정몽주를 가둬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그보다 훨씬 큰 사람이다.
죽음에 초연했던 그 탁월한 충정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포은을 모르면, 정몽주를 모른다
누구나 포은을 알지만 대개는 포은은 모른다.
이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 포은이 이 땅에서 손꼽을 만한 대시인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에도 있다.
빼어난 외교가로 중국을 집처럼 넘나들 때, 발닿는 곳곳 마음 닿는 처처에 시를 남겼다.
하나하나 성글지 않고 둔하지도 않다.
문재를 자랑삼은 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천성적인 기양을 지닌 시인이기 때문이다.
포은의 '음주'는, 스스로의 시적 본능을 숨김없이 그려놓은 사람냄새 나는 시다.
그를 끊임없이 끝없이 도발하고 자극하는 것은 시절과 풍경이다.
시공간의 변화를 느끼는 감관이 유난히 발달한 시인이다.
1.음주, 시 주머니를 찬 사람
출장길엔 봄바람이 미치도록 흥을 돋우네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네 (객로춘풍발홍광 매봉가처즉경상)
집에 돌아갈 때 돈 다 떨어졌다 자책 말게나
그 덕분에 비단주머니 가득 새 시를 담지 않았던가 (환가막과 황금진 잉득신시만금낭) 정몽주 '음주'
그렇다고 시가 술술 나오는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고심참담을고백한 시도 있다.
'음시(시 읊기)'가 그 장면이다.
아침내내 큰 소릴 읊어보다가 다시 조그마한 소리로 읊조려 보네 (종조고영우미음)
모래알을 문지르고 쇠를 달구는 듯 괴롭기 짝이 없구나 (고사피사욕련금)
시 짓느라 몸이 바싹 야위더라도 놀라지 마오 (막괴작시성태수)
아름다운 구절을 그때그때 찾아내는 게 어렵기 때문이라오 (지연가구매난심)
아무리 재능을 타고 났어도, 시는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시 짓느라 고심하다 홀쭉해진 포은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는 '신명'을 읽어내고 풀어내는 고통스런 신통이기 때문일까.
그의 시는 간명하면서도 깊고 정교하면서도 부드럽다.
구석구석 인간미와 애정이 숨어있고, 깊이 있는 자기 성찰이 무르녹아 있다.
읽을 때마다, 행간에 숨어 달콤한 숨을 쉬며 가만히 탄복하게 한다.
2. 봄비의 우주론적인 발견
피는봄
봄비가 가늘어 방울지지 못하더니 밤이 깊으니 가만히 소리가 들린다
눈이 녹으면 남쪽 계곡에 불이 붇고 풀잎들 조금씩돋아오르리
(춘우세부적 야중미유성 설진남계창 초아다소생) 정몽주 '춘'
정몽주의 시 가운데, 하나만 뽑으라면 이 시를 고르는 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봄' 혹은 '봄의 기쁨(춘홍)'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다.
쉽고 간결하지만 셈세한 통찰을 담은 시다.
계절을 일으키는 봄의 은밀한 힘을 이토록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드러낸 시가 또 있었을까.
봄비는 너무 가늘어서 방울을 맺지 못 한다는 것,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렇게 말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방울을 맺지 못한 만큼 분말처럼 흩어지는 비, 그런데 그것도 한밤 중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면 문득 추적추적 하는 소리로
모여 들린다.
방울을 맺지 못하는 봄비를 보는 눈과 소리를 맺지 못하는 밤비가 이윽고 조금 키운 듯한 빗소리를 듣는 귀,
여기서 그쳤다면 그냥 예민한 눈귀를 가진 시인에 그칠 수 있었을까.
포은은 저 미세한 봄비가 해놓은 일의 위대함을 향해 나아간다.
비가 오면, 산자락에 쌓인 눈들이 녹고 눈 녹은 물이 불어 계곡을 채운다.
그 보이지 않던 빗방울, 그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눈을 녹이고 계곡의 물을 불러 산의 생명을 적신다.
그 봄비의 밤이 이뤄낸 것은 바로 저것이다.
풀잎들이 땅을 뚫고 지상으로 올라와, 아 이제 좀 살만하네, 라며 기지개를 켜는 일.
우주와 세계와 세상과 일상에 일어나는 큰 일들은 이토록 작고 여리고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물꼬를 튼 것이라는 것.
그러나 그 처음의 기운과 새로운 시작을 잘 살피고 그 운행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이 간결한 시 한 편이 말없이 말하고 있는 그 우주론 한 권이다.
포은 정몽주가 이 나라가 기려야할 빼어난 시인이라는 건 이 시 한편으로도 충분하다.
(지는 봄)
저렇게 피어난 봄도, 어느새 지게 마련이다.
정몽주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초봄의 섬세한 감회를 쓸쓸하게 반납하는 듯한 시를 7언절구로 남겼다.
가을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봄바람이니
백년이 낮과 밤이 꿈 한자락일 뿐
추적추적 처마끝 밤새 내린 비
온마을에 조금씩 붉은 꽃 떨어뜨리리
(추풍과료우춘풍 백세광음일몽중 추창첨전야래우 만성다소낙화홍) 정몽주 '모춘'(저무는 봄)
초봄에는 풀잎이 돋우던 그 봄비가, 늦봄에는 꽃을 떨어뜨리는 봄비가 도니다.
어찌 봄비의 잘못이겠는가.
비는 떄를 만나 내리는 것일뿐.
그 비에 생명이 일어나고 지는 것은, 그 생명 속에 원인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풀잎을 돋을 땐, 참으로 고맙던 비도 고운 꽃을 떨어뜨리는 떄는 무정하고 무섭다.
봄바람은 가을바람 뒤에 온 '시간적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시인은 발견한다.
봄바람이 가을에 불었다면 가을바람인 것이다.
꽃을 피우는 바람이 생명을 쓰러뜨리는 바람이다.
백세광음은, 인간수명의 총체적 길이다.
백년을 산다는 건 스스로가 노력하고 열심히 숨을 쉬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는 힘이 죽이는 힘도 함께 지닌 것이다.
스스로가 피우고 스스로가 죽이니, 그 사이는 한바탕 꿈과도 같다.
이 시인은 이름이 '몽'이니, 삶도 죽음도 통째 꿈 속이 아니랴.
이를 벗어난 이, 있으면 나와보라.
봄바람 한 올에 피지 않고 가을바람 한 올에 지지 않는 꽃 있으면 나와보라.
만고의 위인이나, 이름없는 시간을 달팽이 몸 끌듯 지나간 허튼 '위인'이나, 지식에 대한 소박한 희망은 다를 바 없는 걸,
이 시에서 애톳하게 읽는다.
3. 종성아, 종본아, 나의 두 아들을 생각하며
백가지 생각이 모두 하얗게 사라지고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두 아들 뿐이구나 (백념구회멸 관심지앙아)
어미 품을 채 벗어나지도 못 했는데 이미 옛 시인의 시를 외웠다고? (미리자모양 이송고인시)
내가 착한 일을 쌓은 것도 별로 없으니 너희 이름 떨치는 건 너희 스스로 이루는 것 (적선오하유 양명여자기)
문득 내가 늙을 날을 계산해 보니 너희들 다 자란 떄를 볼 수 있을 것 같네 (지사쇠노일 급견장성시)
정몽주 '억종성종본양아)' 종성과 종본 두 아들을 생각하며
해준 것은 별로 없어도, 잘 자라준다는 것.
너희들 꿈 펼치는 날을 내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자식의 성장을 볼 수 있었지만 55세에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돌아갈 줄은 알수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