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특히 우왕 시기에 왜구의 침입이 극성이었고, 왜구가 고려의 5도 양계 중에 침입을 안 한 곳이 없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왜구는 기본적으로 배 타고 바다를 건너서 왔고, 그렇기에 일차적으로 조운선과 바닷가 연해지역의 조운창 및 연해 고을이 약탈 대상이 되었으나, 이 즈음이 되면 하도 털어먹어서 그것 만으로는 여의치 않는 지경이 되어 내륙 지역까지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았죠.
왜구가 배를 타고 왔고, 해안에 배를 대고 상륙을 하여 육로를 통해 내륙을 침략하기도 하였지만, 강을 통해 배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에는, 수로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감조하천이며 폭도 넓어서 조선시대 세선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뭐 조선시대에 관리들 녹봉 출납하는 광흥창이 지금 서울 마포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죠 ㅎㅎ
그리고 당연히(?) 왜구의 배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고요 ㅜㅜ
1435년 세종이 양로연을 베풀었을 때 참석한 전직관리 이귀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 90세였는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왜구(倭寇)가 쳐들어와서 한강(漢江)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사방의 국경이 편안하니, 늙은 신하는 비록 죽더라도 진실로 마음이 편안하겠습니다.”
왜구의 본격적인 침입은 1350년부터 이루어졌고 이귀령이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면 이미 왜구의 참화가 가장 극심했을 시기였습니다. 왜구의 침입을 몸소 겪었던 사람으로 1435년의 평화기를 맞이하여 저런 이야기가 나온 것 이겠죠.
그렇다면 왜구가 언제 한강에 쳐들어왔을까? 1373년 6월 왜구가 동강과 서강에 집결한 뒤 양천을 침구한 다음, 한양부에 쳐들어왔습니다. 서울시 양천구가(당시 양천이 지금의 행정구역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략) 한강 중-하류에 위치하니, 인천과 경기도 고양시를 지나 양천을 침략하고 서울시 강북지역까지 찍고 간 것 이겠죠.
그리고 왜구의 한강침입은 이 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5년뒤인 1378년 2월에 왜구가 안산, 인주, 부평, 금주를 침략합니다. 서해안을 배타고 돌아다니면서 안산시, 인천시, 부평을 찍고 다시 한강에 진입하여 서울시 금천구에 까지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황해도 연안부와 해주를 침략하고 뒤이어 양천과 금천을 침략하고요. 근데 이 해에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430년 병조참의 박안신은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무오년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해풍(海豐)에 배를 대고 서울을 침략하고자 하며, 또 배가 한강을 지나 드디어 월계(月溪)에 닿았으니…”
무오년은 1378년에 해당합니다. 1378년 2월과 8월에 왜구가 양천과 금천을 침략했다고 했죠? 근데 박안신의 발언에 따르면 이때 왜구가 거기서 끝난게 아니라 배타고 한강에 들어가서 월계(月溪)에까지 침입을 했다는 겁니다(어느 달에 월계까지 갔는지는 불명).
월계라는 지명을 보고 서울시 1호선 월계역이 생각나시는 분들은 서울 중심주의에 빠진 분들이십니다~(근데 저도 처음에 월계역 생각났다는 건 안 함정 ㅜㅜ).
지금의 월계 쪽에 중랑천이 흐른다고 해도 왜구 배가 작은 하천까지 들어가기는 힘들죠. 뭐 보통 왜구 배에는 작은 소형함선도 갖추고 있으니 배 대놓고 그거 타고 들어가려면 어떻게든 들어 갈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 시절에 거기에 털어먹을 것도 없는데 갈 이유가…
여기서 말하는 월계는 현재 경기도 양평을 말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근군> 에 따르면
“월계천(月溪遷)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산 중턱에 꾸불꾸불 둘려 있어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월계원(月溪院) 월계천(月溪遷) 북쪽에 있다.”
현 양평군이 일제시절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쳐서 양평군이 되었고, 현 양평군에는 양근향교가 있습니다. 이 양평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중간에 위치하며 근처에 유명한 팔당호수와 댐이 있죠. 한때 남한강을 월계강이라고까지 불렀다니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알 만하죠.
즉 왜구가 배를 타고 “한강 중류를 지나서 남한강 어귀까지 들어갔다”는 이야기…
왜구의 침공지역을 대충 이어보면 연안부(연안군) 해풍군(개풍군) 양천 및 금천 그리고 양평군 월계로 이어집니다 ^^;;
다들 아시다시피 북한강과 남한강은 육로운송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 내륙 수운으로 많이 활용되었던 강이죠.
고려사 조운에 따르면 양근군에 조운 창고는 딱히 언급은 없지만, 충주시에 덕흥창이 있었고 이 덕흥창은 고려의 13조창 중 가장 넓은 수세(收稅) 구역을 보유한 조창이었습니다.
성종 11년(992). 개경까지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에 지불할 배 삯을 다음과 같이 책정하였는데, 10석에 운반비가 1석인 곳… 양원포(陽原浦)【과거명칭은 황진포(荒津浦)이다】·화제포(花梯浦)【과거명칭은 화련제포(花連梯浦)이다】·은파포(恩波浦)【과거명칭은 구지진(仇知津)이다】·우산포(虞山浦)【과거명칭은 산척포(山尺浦)이다】·신어포(神魚浦)【과거명칭은 소신사포(小神寺浦)이다. 이상은 모두 양근군(楊根郡)이다】.
충주에서 조세를 모아 남한강을 타고서 양근군을 지나 개경까지 갔겠죠. 월계도 당연히 지나갔을 거고요.
월계가 수운의 요지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문인들도 배를 타고 가면서 관련시를 꽤나 남겼습니다.
김종직은 <배 안에서 여러 가지 흥취를 읊다[舟中雜興]> 에서
협곡 어귀 겨우 지나서 다시 월계가 나오니 / 峽口纔經復月溪
월계의 바위 가에서 자고새가 우는구나 / 月溪巖畔鷓鴣啼
평생에 습감을 부질없이 외기만 하였으니 / 平生習坎空能誦
어찌 평탄한 길에 야윈 나귀 모는 것만하랴 / 爭似夷途策瘦驢
성종시절 문인 박은 또한 <계축(癸丑)에 배를 타고 옮겨 가며 癸丑移舟> 에서
산은 비 갠 뒤의 자태 고요하고 / 山凝雨餘態
강은 바람 앞에 물결이 솟구친다 / 江湧風前浪
멀리 뵈는 나무들은 절로 작고 작으며 / 遠樹自短短
보금자리 찾는 새들은 쌍쌍이 나누나 / 宿羽迷兩兩
땅은 양근군과 잇닿아 있는데 / 地接楊根郡
배는 월계 위로 옮겨 가도다 / 舟移月溪上
라고 하였고
노수신도 <월계의 배 안에서〔月溪舟中〕>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백 길 밧줄로 바람 부는 포구의 배를 끌어 / 百丈牽風浦
외로운 배로 월계를 거슬러 올라가니 / 孤篷泝月溪
텅 비고 밝음은 위아래가 한가지이고 / 空明同上下
구름 안개는 동쪽과 서쪽이 반반일세 / 煙靄半東西
…
라고 하는 등 나름 유명인사들이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월계와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이 지역 유명인사로는 노비출신 나무꾼 시인으로 정초부(鄭樵夫)가 있는데, 그 정초부가 “부용산 근처에서 나무 베어다가 동대문 근처에 가서 팔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월계마을 사진출처 http://www.kyeonggi.com/2384781
그래서 정초부도 배 타고 나무 팔고 오면서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신세(翰墨餘生老採樵)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滿肩秋色動蕭蕭)
동풍이 장안 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東風吹送長安路)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曉踏靑門第二橋)
동호의 봄물은 쪽빛보다 푸르러 (東湖春水碧於藍)
백조는 선명하게 두세 마리 보이네 (白鳥分明見兩三)
노 젓는 소리에 모두들 날아가고 (搖櫓一聲飛去盡)
노을 지는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夕陽山色滿空潭)
라며 시를 읇조리기도 했죠. 그 만큼 전근대에 남한강 수운이 매우 활발히 활용되었다는 겁니다. 고려말에 왜구가 월계까지 침입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남한강 수운을 통한 물자유통이 제법 활발했다는 것(왜구는 보통 털어먹을 곳이 많은 곳으로 가니까)도 알 수 있고요. 뭐 이런 식으로 다시 확인을 한다는 것이 매우 씁쓸하긴 합니다만…
첫댓글 고려말 왜구침략이 갠적으론 임란보다 더 악독했다고 느끼는 입장이라
무슨 전염병돌듯 꾸준히 침략한 왜구들 끈질김이 소름돋고
저런 애들을 상대로 반지의제왕 로하임 찍어대며 처바른 이성계도 대단하고
이정도는 되어야 왕조를 개창하는구나 싶네요...
진심 나라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당시 고려왕조가 버티는 난이도는 유로파에서 비잔틴 제국 살리는 거 보다 더 하드코어라 생각합니다.....;;
왜구라고 통칭하다보니 고려를 단순 해적 집단에 털린 ㅂㅅ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사실 고려말 왜구쯤 되면 일본 내 지역군벌과 같은 체계적인 세력인데 말이죠.
도적집단이 약탈이야 일사분란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규군에 맞서 체계적인 전투는 되도록 피하죠. 그래서 고려말 왜구를 일본 남조 잔당이나 구주쪽 지방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리히티 더구나 고려시절에는 대규모 해양세력 침입에 대한 방어체계 구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말이죠;;
사실 이 전까지 침략이 전무하다 시피 했으니 사실 그런 체계가 구축 되어 있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 입니다만....
재미있는 건 중국에서도 "해양 방어(海防)" 개념이 "홍무 연간" 에 등장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당연히 왜구(...) 땜시롱;;
양평까지 왜구가 침략했다니 피해가 엄청났네요 고려정부는 무능했군요
왜구가 침략하기 전 원나라의 침략과 원 간섭기로 체제 자체가 이미..... ㅜㅜ
@배달의 민족 ㅇㅇ 그렇군요 원나라의 침략과 원 간섭기를 겪은 탓에 고려 조정에서 손을 쓸 수가 없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이 군사력의 확보를 강조했던 이유를 알겠군요. 참 고려말은 어려운 시대였고, 그 고난 만큼 혁신의 시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500년 내내 예산 아끼는데 심혈을 기울인 자린고비 조선 조정이 괜히 수군에 그렇게 돈을 때려 박은게 아니죠 ㅎㅎ
근데 이충무공이후 예산 달라니까 왕이 "이충무공은 예산 안 받고도 잘 했잖아~" 이런 반응 ^^;;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당~ ㅎ
저때 왜구의 대대적 침략이 가능? 혹은 촉발됐던 이유가 있을까요
왜구의 본격적 침입이 1350년 부터인데, 이때 일본이 남북조 내란기였고, 이 시기 왜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한국학자 이영 교수님은 당시 큐슈 다이묘들이 내란에 필요한 재화를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는 설을 제기하셨죠. 일본에서는 그에 대해서 영주층이 아니라 영주의 직접적 지배에서 벗어난 악당(惡黨) 들이라는 설이 주류고..... 누가 되었든 일본의 남북조라는 혼란기가 왜구의 침입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맞죠. 그리고 일본이 전국시대까지 끝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나 가서야 최종적으로 왜구집단의 출현이 종식 되죠 ^^;;
어후. 한강까지 들어온 줄은 몰랐네요ㄷㄷ
조선이 경기도에 까지 수군 배치하고, 경강주사대장(京江舟師大將)이라는 직위까지 둔 게 다 이유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