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막내 동생이 시골서 차를 타고 월아산 벚꽃길을 지나면서 동영상을 찍어 보내왔다.
길가에 벚꽃이 활짝 피어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상춘객들이 줄을 섰을텐데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벚꽃길이라면 하동과 남해도 있지 않은가. 몇년전 카메라를 들고 하동 벚꽃십리길을 간 적이 있었다. 푸른 보리밭을 배경으로 축 늘어진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이 봄바람에 사푼사푼 휘날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애를 썼던 모습도 떠오른다.
월아산은 진주시 문산면과 진성면, 사봉면에 걸쳐 있는 산인데 주변에서는 방어산, 오봉산과 더불어 제법 높은 산에 속한다.
산봉우리는 전라도 월출산처럼 여자의 젖무덤 같이 쌍봉인데 차들이 없었던 옛날에는 사봉에서 문산으로 갈 때는 쌍봉 사이에 나 있는 오솔길을 걸어갔다. 나도 금산 외가에 갔다가 그 고갯길로 혼자서 걸어오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호랑이도 나왔다는 제법 험한 곳이기도 하였다.
내가 자란 까막골에도 어머니가 시집 오시기 전 할머니가 사셨을 때는 밤마다 호랑이가 집앞 대밭에서 눈에 퍼런 불을 켜고 어슬렁거리고 있어 무서워서 방안에서 바깥을 나오지도 못했다고 했다. 해가 지면 개도 개집에 잡아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가야 했다. 그래도 염소나 송아지를 물고 갔다는 데, 얼마니 힘이 센지 담을 훌쩍 뛰어 넘어 들어와 외양간에 있는 송아지를 물고 나오다가 담장 위로 휙 던져 놓고 자기도 담을 뛰어 넘어 송아지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도로 입으로 받아 물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한 번은 평촌에 사는 머슴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보러 왔다가 마다에서 용변을 보는 데 호랑이가 나타나나 덥썩 물고 가는 것을 주인이 보고 바아 작대기를 들고 쫓아가 아이를 빼앗았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고 한다.
까막골 할머니 남동생(가실 할배) 아들인 조함 아재가 군북장에 소구루마에 나무를 싣고 가서 팔고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었는 데 방어산 어시재에서 소가 가다가 멈춰 서서 더 이상 가지 않더라고 하였다. 어스름속에서 살펴보니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떠억 버티고 서 있어더라는 것이다. 마침 막대기를 하나 쥐고 있다가 호랑이가 덤비자 막대기로 험것 내리쳤다. 호랑이 발톱에 두꺼운 외투가 찢어졌다. 호랑이는 더 이상 덤비지 않고 사라지자 혼비백산한 아재는 무사히 동네까지 와서는 집안 식구들에게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고 난리를 쳤다 한다.
월아산은 우리가 어릴 때는 달음산이라고 불렀다. 달음산에는 나무꾼들이 땔감 나무하러 자주 갔던 곳이다. 문산이나 금산에서는 넓은 벌판이라 나무를 할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나뭇꾼들이 나무하러 갔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어흥!'하면서 범이 나타났던 것이다. 나뭇군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중에서 나이 많은 친구가, 이러다간 우리 모두 다 죽게 생겼으니 호랑이 밥으로 한 사람만 희생하면 나머지는 살 수 있으니, "호랑이 앞에 윗옷을 벗어 던져 보자!, 호랑이가 앞발로 그 옷을 받으면 그 사람만 호랑이 밥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들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한 사람씩 윗옷을 벗어 던지기로 하였다. 그러자 나뭇꾼중에서 제일 덩치가 크고 강하게 생긴 나뭇꾼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판사판이니 한번 싸워보자고 호랑이와 맞붙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는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쳐서 동네로 달려가 동네사람들을 데리고 도끼와 괭이를 들고 꽹과리를 치면서 산으로 올라가보니 호랑이와 사람 둘 다 죽어있더라고 했다.
원래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토끼전)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하나다
용왕님의 병환을 고치는 약에 쓰려고 토끼를 찾으러 절벽을 오르다가 온 힘을 다 쓰고만 별주부(자라)가 마침내 절벽에 올라 저 멀리 토끼를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에 “토선생!”하고 부른다는 게 그만 힘이 빠져 “호선생!” 하고 발음이 새 버렸다. 마침 그때 호랑이(범)가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자라 한 마리가 있지 않은가. 몸에 좋다는 자라로 용봉탕을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신이 나 한 달음에 산을 내달린다. 이를 보고 겁에 질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자라가 부르는 노래가 ‘범 내려온다’다. 판소리 가사를 읊어보면 다음과 같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 양 귀는 찢어지고, 쇠낫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는 쭉 찢어지고,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개같은 앞다리 전동같은 뒷다리, 새 낫 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 좌르르르르르르 흩이고, 주홍 입 쩍 벌리고 자라 앞에 가 우뚝 서, '홍앵앵앵 '허는 소리 산천이 뒤덮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라가 깜짝 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제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작년 여름 한국관광공사가 해외홍보용으로 제작한 ‘한국의 리듬을 느끼세요(Feel the Rhythm of Korea)’ 영상은 그저 단지 한국 홍보 캠페인일 뿐인데 소셜미디어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이날치 밴드가 노래 부르고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춤을 춘 이 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합산 조회 수 3억 회를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수궁가의 '범 내려온다'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취급하던 판소리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K팝열풍에 힘입어 전세계의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 일으킬 줄을 감히 누가 알았으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