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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계산을 끝내놓고 그놈의 핸드폰과 키홀더를 챙겨들곤 팔을 잡아끌었다.
“가를 데불고 가것써? 어데 가차운데 가서 재워야제?”
주인할머니는 걱정이 되시는지 한마디 거드셨다.
“차가 요 앞에 있으니까 거기까지만 데려가야죠.”
“가! 가자고.”
“네?”
“혼자보단 둘이 나을 것 아녀? 언능 서둘러.”
주인할머니와 어깨 하나씩을 맞잡고 그놈의 차 앞까지 용케 도착했다.
그놈을 차 보닛 위에 잠깐 기대어 놓고 차 문을 열었다. 주인 할머니는 한 쪽 팔로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계셨다.
“기적지가 길어서 근가, 겁나게 힘들어.”
“죄송해요. 적당히 먹였어야 했는데.”
“지가 알아서 퍼 마시두만, 작정하고 먹었는 갑서. 꼬셔 불라고.”
“할머니도 참. 아무튼 감사해요. 담에 또 들를게요.”
“그랴, 언능 가!”
그놈을 태우고 일단 집으로 향했다. 데리고 가도 문제였다. 아파트 동 입구에 경비아저씨가 떡하니 버티고 계실 텐데,
거기다 인사도 몇 차례 주고받아 안면을 터놓은 상황에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나 운전을 하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아파트 앞에 도착을 했는데도 운전하는 동안 잠이 들었는지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경비아저씨께 도움을 청했다. 어려보이는 그의 외모를 이용해 거짓말로 둘러댔다.
“사촌동생인데, 낼 모레 군대 간다고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네요. 집이 좀 멀어서 저희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아저씨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말없이 집 앞에까지 함께 부축해 주셨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놈은 현관 입구에 푹 쓰러져 버렸다. 오늘도 곱게 자긴 튼 듯 했다.
현관입구에서 거실까지 끌고 오는 사이 내 몸에 남아있던 힘이 쫙 빠졌다.
소파 위에 있던 쿠션으로 대충 머리를 받쳐주고 무릎 덮개로 배만 슬쩍 덮어주고는 나도 방으로 곧장 직행했다.
씻기도 귀찮을 정도로 녹초가 된 나는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춰오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안구의 움직임을 따라 반쯤 감긴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난 귀를 쫑긋거리며 까치발을 하고 문 앞으로 다가섰고, 이내 도둑이 든 줄 착각했던 불안감에서 벗어났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그놈은 언제 샤워까지 마쳤는지 촉촉이 젖은 머리와
셔츠를 벗고 민소매에 목에 수건을 두룬 채로 한 숨을 푹푹 내쉬며 서있었다.
“대책이 없네. 대책이?”
식탁 위에는 냉장고에서 꺼낸 온갖 음식들로 널브러져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김빠진 사이다에 뜯어놓은 요구르트, 유통기한 6개월 지난 맛살에 쉬어빠진 김밥, 말라비틀어진 깻잎에
시들한 오이, 거기다 곰팡이 핀 된장까지. 와우! 아무리 바빠도 여자가 살림을 어떻게 이렇게 살아요?”
“재워줬음 곱게 갈 것이지, 남에 집 냉장고는 왜 다 헤집어놔?”
“물 좀 마시려고 열었는데 한 숨 밖에 안 나오네요. 겉만 번지르르하면 뭐해요? 들여다보면 말짱 꽝인데.”
“너 어제 술 취한 애 맞니?”
“나 그 정도론 안 취해요.”
“뭐?”
“내 작전은 어제 부터였는데, 자연스럽게 동침하기.”
“너 그럼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일부러는 아니고, 일종의 테스트라고나 할까? 나도 상대를 봐 가면서 계획을 짜야할 거 아니에요. 근데, 어제
씻지도 않고 잔거예요? 난 어제 연기한다고 못 씻어서 일어나자마자 씻었는데. 하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놈은 식탁위에 음식들을 툭툭 건들며 말했다.
“나 어제 너 끌고 온다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빠졌었거든!”
“여잔 잠들기 전보다 일어나서가 더 중요한 건데. 거울 한 번 보면
지금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 못 할 걸요.”
“나 화장 별로 진하게 안 해서 그냥 자고 일어나도 별로 안 흉하거든!”
호언장담 큰소리까지 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정말이지 흉했다.
마스카라에 들러붙은 눈썹하며 볼에 그려진 베개 자국, 한쪽으로 들뜬 머리까지 정말 내가 보아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크린싱크림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지우고 샤워를 끝낸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놈은 소파에 떡하니 누워 홈쇼핑의 속옷광고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놈은 양념게장 광고로 채널을 돌렸다.
티브이 전원을 확 꺼버리자 쇼호스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도 뚝 끊겼다. 그놈은 자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맨 얼굴 그렇게 막 보여줘도 돼요?”
난 얼굴을 매만지며 당당히 물었다.
“못 보여줄 건 또 뭔데?”
“자신 있다는 건가?”
그놈은 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까지 꼴깍 삼키며 서있었다.
천천히 내 머리에서부터 목덜미까지 훑어 내리는 입김에 내 몸의 모든 촉각이 곤두섰다. 나는 세차게 밀쳐냈다.
“뭐하는 짓이야?”
“허브향이네.”
“너 나 놀리는 게 재밌니?”
그는 거칠게 나를 벽으로 몰아 붙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 처음부터 이럼 맥 빠지죠.”
잽싸게 다시 밀치고는 눈을 있는 대로 흘겼다.
“우리 그냥 말 놓죠. 그래야 좀 더 편하게 다가가죠.”
“말은 누구 맘대로 놓고 내기는 누구 맘대로 하는데?”
“왜요? 질까봐 겁나요?”
“뭐? 어머, 얘 봐?”
“흥분하지 마요. 흥분은 앞으로도 실컷 할 테니까.”
“참, 어이상실이다.”
“난 전화 통화하는 거 별로니까 할 말 있음 문자로 해요. 뭐 문자도 잘 안 보지만.”
“내가 너한테 전화를 왜 해?”
“벌써부터 꼬랑지 내리는 거예요? 우리 내기한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저기, 내가 실은 그 간호사 때문에…….”
“끝난 사람 얘긴 그만하죠. 이만 갈게요, 쉬세요.”
그놈은 셔츠를 걸쳐 입고 현관 앞에 서서 거울을 비춰보고 있었다.
“차 어디다 주차 해놨는지 알아?”
“나 취한 척 한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놈은 어제 내가 깜빡하고 현관 앞에다 던져 놓은 자신의 키홀더와 핸드폰을 챙겨 들곤 현관문을 나섰다.
‘쾅’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알 수 없는 정적이 찾아 들었다.
카펫위에 어제 그놈의 머리를 받쳐줬던 쿠션을 걷어 올리는 순간, 쿠션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남자를 데리고 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봤다.
거실 바닥을 손으로 훑었다. 긴 내 머리카락이 딸려 나왔고, 낚아챈 내 머리카락과 그놈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위에 올려놓았다.
그놈이 남긴 흔적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청승맞은 생각이 들어 입바람을 불어 공중에 날려 버렸다.
어차피 쉬는 날을 이용해 대대적인 청소를 할 생각이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소파위에 놓인 물기 젖은 수건을 들었다. 허브향을 가득 머금은 그 수건과 내 살 냄새를 번갈아 맡는데
좀 전에 내게 다가와 향기를 맡던 그 아찔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안하던 행동을 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식탁 위를 보는데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냉장고 안에 꽁꽁 감추어져 있을 땐 몰랐었다.
실체를 드러내놓고 보니 좀 전에 그놈이 그런 표정을 지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찾아 상한 음식들을 담고 냉장고에 선반까지 다 들어내고 청소를 했다.
냉장고를 새로 바꾸고 처음 하는 청소였다. 냄새는 그리 고약하지 않았지만, 얼룩이 제법 많이 껴 있었다.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그놈의 말이 귓전에 자꾸 맴돌았다.
침대 시트도 갈아 끼우고 가구 사이사이 먼지도 훔치고 스팀청소기로 한바탕 밀고 나니 하루 중 반나절이 사라져 버렸다.
불현듯 허기가 밀려왔고 나는 일단 무선주전자에 전원을 올렸다.
수납장에서 꺼낸 컵라면에 비닐을 뜯는 내 손이 덩달아 바빠졌다. 그때였다.
현관 벨이 울렸고 인터폰 모니터 속에는 대형할인매장 직원유니폼을 입은 한 사내가 서있었다.
문을 열자 그 사내는 커다란 ‘아레카야자’를 현관 안으로 들여놓았다.
영수증 하단에 주문자 ‘민준혁’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명을 끝내고 돌아선 순간 화분을 감싼 포장지 속에 작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여의치 않은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느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몸은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자꾸만 힘이 빠져갑니다 ㅠㅠ
수그러드는 마음을 다잡아 열정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드네요.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한글을 열어두고도 글이 좀체 써지지 않는 걸 보면
기력이 많이 떨어진 듯해요. 떨치고 일어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는데도 말이죠.
관심 가져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분들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음 편은 좀 더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요위와↑↓ 요밑에는 6월의 탄생석 입니다^^
첫댓글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너무 재미있었는걸요! ㅋㅋ 잘려다가(헉! 이시간에~) 새로 올라온 글을 읽었어요. 점점 얘기가 너무 재밌게 흘러가네요. 메모에는 무슨 말이 남겨져 있었을까요?? 아~ 궁금해요. 그래도 몸 좀 회복하시고 글 올려주세요~!! 기다릴께요. 그리고요 저도 요즘 잠이 많이 부족해서 체력이 딸리네요. 한글 켜놓고 글이 안써진다는 말 저도 실감나요 ㅠ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글이면서 써지지도 않다니 저 어쩜 좋아요 ㅠㅠ
아이코! redhan님 응원에 힘이 많이 났어요. 뒤늦게 이렇게 답글을 다네요. 정말 글 안 써질 때 한글 켜놓고 멍 때리고 있는 것도 사람 할 짓 못 되더라구요. redhan님 글,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 많으니까 님도 힘내세요!!! 정성스런 댓글 너무 감사해요~
잘 읽었어요....그럼 준혁이가 술 취한척을 했군요.....이런 그것도 모르고 낑낑 힘들게 업고왔는데....마지막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다음편도...아직도 아프다고 하니 걱정쓰럽네요.....
아이코! 친절한 Benjamin님 아니십니까^^ 이번 편도 간단히 요약해 주셨군요. 한결같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염려 덕분으로 몸도 마음도 많이 회복이 된 듯 하구요. Benjamin님의 댓글에 기운이 마구마구 솟아요~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열심히 읽고 있어요. 몸조심하시고요. 일교차가 커서 더 안 좋을 거예요, 화이팅!!!!
아이코! 혼트님~ 매번 답글로 닉네임을 붙이다 보니 자꾸 정이 드네요^^ 응원의 메시지 감사히 받아서 더 열심히 쓸게요. 항상 고마운 마음 가지고 있는 거 아시죠~~
힘내세요!!! 매번 읽을때마다 재미있는걸요, 항상 재미있게 보고간답니당, 오늘 날씨가 덥네요.. 으.. 얇은긴팔입었는데 좀 덥네요, 헤헷 담소설도 기대하고 있을께요..... 힘내세요 밀꾸루시님 아자아자!
아이코! 달콤한초콜릿a님은 제 마음의 교주세요^^ 님의 응원에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막 힘이 뻗치는 걸 보니 말이에요. 항상 따듯하게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저에게 힘을 좀 북돋아 주세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