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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연대 (2003~2009 자유청년연대 / 2011~13 애국주의연대)
 
 
 
카페 게시글
◈ 언론 보도 스크랩 나~이제는 말한다 (1)
유격전사 추천 0 조회 32 06.12.11 12: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양시.벽제동에 조그마한 납골당에서 (전)구월산유격대장 (김종벽) 여대장 (이정숙)쉬고있다

 

 

             구월산유격부대의 모체는 육군 첩보부대였다.

 

  개요 .

구월산 유격대의 창설은 지난 50년12월7일 당시 옹진 지구 첩보부대 김종벽

대위는 6.25당시 북진 과정에서 고향인 황해도.은율군.장연면 고향에서 구월

산의 인민군.패잔병들이 양민 학살과 납치.약탈로 치안이 마비되여있는 상태

에서 첩보전을 병행하여 구월산의 인민군 잔당소탕 작전과 공산당원의 전멸이 조국통일의 길이라고 판단한 김종벽대위는 구월부대을 창설하여 인민군 잔당

소탕중 아군이 1.4후퇴가 시작음 당시 김대위는 고향사수.아군이 즉각 반격이 있을거시라고 판단하여 남진하는 인민군들과 구월산에 인민군 잔당과 기나긴

전투을 하게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 23여단 정규군을 전멸시키고 44사단과의 전투을하여 김일성이가 놀라며 대대적인 구월산 유격대의 활약이 지리산의 빨찌들을 능가하는

유격전을 중시함으로서 구월산에는 남한의 유격대가 존제하고 지리산에는 북한괴래의 빨지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양대산맥의)축이되었다...

 

이.과정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전사.중상을 당해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죄의식이 앞선다 그들에게는 훈장하나 밭은자 업다...

오로지 민족과 국가을 사랑하여 목슴을버린 그들에게 당시 부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그들은 조국이 부르지도 안았다 공산 정권이 실어고 김일성 도당에 만행의 추악함을느껴 하나.둘씩 모여들어 2700명까지 부대의 규모는 커저갔다 특히(편남.함경.황해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뭉처서 구월산으로 모여들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강적으로 부상하여 44사단의 주력부대와 전투을 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전과을 올리는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도 만았다....

 

그리하여 자구책으로 대동강 하류의 피도.추라도.(서해리반도)앞.응도.청량도

석도.초도 철수하며 재편성하여 8개연대의 대규모 전투력을 확보하여 서해을

장악함으로서 해군 함정과 해병대는 저항업시 서해 제도서에 주둔함으로서 아군에 전진기지을 확보하여 육군본부에 보고되어 51년5월5일 육군첩보부대에

복귀 부대장 김종벽 대위는 소령진급과 여대장 이정숙은 정일권 총참모장으로

표창장을 밭고 51.7.9일 첩보부대의 특수임무을 재차 명밭아음..

 

그러나 아직도국방부와 정보사에서는 그.자체을 인정하지않고 있다

구월산 유격대는 김종벽소령 업시 구월산 부대원들과 피난민 구제을위한 자구책으로 (미)8240부대로부터 제반 보급.장비 작전등에 지원을 밭고있었다 (똥키

2편입) 하지만 이일로인해 한국유격전 사상 가장치욕스런 일들이벌어젔다

구월산유격대을 반란군으로 몰고 173명의 정예대원들이 서해의 (수중고혼)이

되고 143명의 대원들은 반란군의 포로가되어 거제 반공포로수용소에서 1년여을 친공과 반공포로들간에 죽고.죽이는 참상이 벌어젔고 당시 (미)극동군 백령도 지구 사령관인 버커소령(미.육군소장)예편이 추악스런 일들이 벌어진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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