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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초중고를 나온 사람들이면 국사시간에 한번 즈음은 들어보았을 세종대 대마도 정벌.
뭐 계획을 입안하고 병력을 추진하는 등의 실질적인 모든 일들은 병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 지휘를 하였죠. 1419년 (음력)6월 중순에서 7월 초라는 비교적 짧은 사이에 벌어진 군사행동이었는데, 약 7개월 뒤 대마도주는 정식으로 귀순의사를 밝히고 조선이 그를 승낙하는 형식으로 일은 마무리가 됩니다(뒤에 또 한차례 외교적 분쟁이 있었고 재 정벌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건 넘어가고).
우리가 알다시피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몽골의 일본정벌 당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고, 1389년 박위의 공격, 그리고 1397년 김사형과 남재의 대마도 정벌이 있었죠. 하지만 저 두 시기 대마도 정벌은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했고, 왜구의 침략도 그치지 않았던 반면, 세종대 정벌은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왜구의 침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죠. 그렇다는 건 세종대 대마도 정벌은 두 시기와 큰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1389년에 벌어진 박위의 대마도 공격은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300척의 배와 해안의 집들을 불태우고 백여명의 포로를 구출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두막과 배를 불태웠을 뿐 실제로 포로로 잡은 왜적은 없다” 였던 것을 보면, 큰 전투는 없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고, 대마도에 있던 세력에게 큰 인적 타격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1396년 김사형의 대마도 정벌은 아예 전투 기록조차 없죠. 양촌 권근의 글에서
“동정(東征, 대마도 정벌)할 적에는 위덕(威德)이 닿는 곳마다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하며 투항하는 자가 잇닿아 해구(海寇 왜적(倭賊))가 영원히 소탕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편안하게 웃고 즐기면서 정신으로 적을 막아 내는 사람이라 하겠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전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사형이 이끌고 간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하였다”는 것을 볼 때 적어도 박위의 대마도 정벌보다 적은 규모는 아니었을 겁니다(세종대 정벌군 규모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4도의 병선을 모아서 공격한 것임). 김사형이 한강에서 발선하고 나서부터 왜구 두목 나가온(임온), 구육(등육) 등이 줄지어 항복하는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해안에 모인 조선군의 규모를 보고 한반도를 치려던 왜구들이 항복하였고, 조선에서도 이에 만족하고 굳이 대마도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왜구는 그치지 않았고요.
그렇다면 뭐가 달랐을까? 세종대 원정이 군사적으로 그렇게 큰 승리를 거두었을까?
사실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다지 큰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전과는
적선 1백 29척 탈취(사용할 만한 배 20척은 끌고가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움)
가옥 1천 9백 39호 소개,
1백 14명 참수, 21명 포획
중국인 남녀 1백 31명 구출이었습니다.
뭐 “왜구 수천명을 참살 하였다” 와 같은 드라마틱한 전과는 없었다는 거죠. 되려 나중에 복병을 만나서 좌군에서 180명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인명 손실이 발생하고서 보름만에 철수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세종조차도 나중에 “그 일이 비록 마음에 만족스럽지는 못하였으나, 뒤에 적(賊)들이 마침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는 평가를 내릴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는 이 때의 충격이 꽤 오래도록 남아있었기 때문에 항복의사를 나타낸 거죠. 나중에 시간좀 지났는데도 내이포에 거주하던 왜인이 대마도에 "조선이 대마도 공격하려고 한다"고 거짓 소문을 내자 대마도 전체가 혼란에 빠질 정도.
그렇다면 세종대의 정벌은 뭐가 그렇게 달라서 대마도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졌을까. 저는 전후처리과정에서 조선이 우위를 점했다 봅니다.
대마도주의 사신이 정식으로 항복의사를 나타내기전, 조선군이 회군한 그해 9월에 대마도의 사자가 조선에 와서 외교교섭을 진행하였습니다. 다만 조선은 그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고, 10월에 대마도 사자가 돌아가려고 하자, 태종은 대마도 재정벌을 하려는 제스처를 취해서, 사신을 동요시키려 했습니다.
일본은 명나라나 조선과 달리 봉건제 사회였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섰다고는 하나 무로마치 막부는 (에도막부는 택도 없고) 가마쿠라 막부 시기보다도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습니다. 당연히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도 거의 각자도생(...)이었죠;; 뭐 애초에 몽골의 2차에 걸친 침입때에도 가마쿠라 막부는 큐슈방어만 신경썼지 대마도나 이키가 도륙당하는 건 전혀 신경 안쓰기도 했고요.
만약 조선이 재정벌을 하게 될 경우 대마도는 원군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데(주력은 한반도 거쳐서 요동 갔다가 죄다 미국(?)갔음. 망해과 대첩)직접적으로 원군을 파견할 수 있는 세력은 크게 3세력이 있었습니다. 남북조 합일이후 막부로부터 큐슈탄다이 직을 임명받은 시부카와(渋川)씨(조선왕조실록에서의 원도진), 가마쿠라 시기부터 북큐슈에 자리잡고 있던 다이묘 쇼니(少貳)씨(조선왕조실록에서의 소이전), 남북조 시기부터 북큐슈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다이묘 오오우치(大內)씨(조선왕조실록에서의 대내전)
근데 이 중에서 대마도주 종씨와 깊은 연이 있는 쇼니(少貳)씨를 제외 하고서는 아무도 대마도를 도와줄 생각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조선이 대마도 정벌 사전작업으로 조선에 체류중인 대마도인을 잡아서 지방에 유배 보낼 때 큐슈사람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고, 대마도 정벌을 진행하고 있을때 조선에 온 큐슈탄다이의 사신 정우에게도 이번 원정의 목적은 대마도의 해적행위를 처벌하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시부카와씨로서는 막부측으로부터 명령이 있지 않는바에야 대마도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거의 없는 만큼 이 분쟁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죠.
오오우치씨는 고려말부터 한반도와 외교 하면서 적극적으로 왜구토벌에 협력하고 있던 세력이었고, 정종대에는 백제왕실의 후손으로서 토지 하사를 요구하는 등의 좀 황당한 행보까지 보였습니다. 이런 세력이 대마도를 도와서 조선에 대항 할리가 없었죠.
쇼니(少貳)씨는 남북조내란 거치면서 큐슈탄다이와 오오우치씨에의해 큐슈내 입지가 많이 줄어든 상태여서, 대마도 정벌 직후 막부에다가 중국과 조선이 일본을 치려고 대마도를 공격했다는 등 거짓 보고하면서 어떻게든 한/일대결로 끌고 가려 했지만, 대마도 정벌 직후 조선측에서 송희경을 쿄토에 파견하여 대마도 정벌의 경위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함으로서 그 노력 또한 물거품이 되었고요.
무엇보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의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츠(義持)대에는 두번이나 막부가 나서서 대마도 해적을 소탕한 일이 있었습니다. 1397년 조선태조는 박돈지를 일본에 보냈는데 박돈지가 일본에 가서 대장군과 면담하여 삼도(대마 일기 송포)의 해적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하자 대장군은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했고, 이때 오오우치씨가 큰 활약을 하죠. 그리고 1399년 박돈지는 일본 대장군의 사신 및 조선인 남녀 1백명과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1404년에 대마도와 이키섬의 해적이 이번에는 중국 절강성을 경유하여 현 중국 상해지방을 약탈하는데, 다음해인 1405년에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이 해적 수괴들을 잡아다가 명나라로 송환합니다. 이 일이 매우 감격스러웠는지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영락제는 1406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해동의 나라 중에 일본만큼 현명한 나라가 없다”는 표현을 할 정도(조선: 와 ㅆㅂ. 형 바람피는 거야?)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막부차원에서 대마도 해적을 토벌하기도 했을 만큼 결코 막부와 대마도의 관계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뭐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와는 철저히 다른 행보를 걷기는 했습니다만, 그것과 대마도에 대한 지원은 다른 문제.
더구나 이러한 상황은 대마도 내부적으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마도내부도 철저하게 봉건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었고, 전혀 통일되지 않고 있는 처지였죠.
대마도주가 항복을 요청하는 서신에서 “나는 일가 사람들이 수호 자리를 빼앗으려고 엿보는 것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도 적었는데 이건 핑계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대마도수호(守護)의 직위도 언제든지 다른 일족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일 수도 있죠.
그리고 대마도도 봉건제로 굴러가는 만큼 당연히 조선군이 쳐들어왔을 때 섬 내 각 지역 유력계층이 병력을 동원하고 그들이 지휘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전쟁직후 대마도의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이 조선에다가, 우리는 조선군에 화살하나 쏘지 않았고, 관군이 물을 길어 가는 것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네 지역에서 잡혀간 포로들과 선박을 돌려달라 요청합니다.
좌위문(사에이몬)이라는 것은 관직 이름이고 그 관직을 사마(司馬)씨 마냥 자기 성으로 쓰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쇼니씨의 쇼니도 관직명 다자이후쇼니(太宰府少弐)에서 온 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가시포를 다스리는 호군 정가문수계에 대해서 “아버지는 적도(賊徒)의 괴수 정대랑(井大郞)인데, 기해년(1419, 세종 원년)에 동정(東征)했을 때 공이 있었다….임오년(1462, 세조 8)에 아비의 관직을 세습하였다.” 라 적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좌위문대랑이 아마도 해동제국기에 나오는 정대랑 같은데, 우리 기준으로 따지면 나중에 대마도에서 처벌받던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 아들대까지 잘 살고 있죠?
주력군은 다 미국감, 대마도를 구하러 올 일본내 세력 없음, 그 와중에 친족이라는 것들은 이 기회에 수호자리 노림, 다른 도내 지역인사 중에는 대놓고 조선측에 호의 적인 인물도 나타남, 이러한 제반 상황하에서 조선측이 소모전으로 가면서 재출병을 하려 한다? 대마도주가 계산기 두드려 봤을 때 체급이 다른 조선과 대마도가 소모전으로 가면 이건 절대 못이긴다고 판단했고 종합적인 결론 끝에 항복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죠.
전투적인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전략 및 외교적 측면에서는 조선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게 대마도의 항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런 체급이 다른 육지와 섬 간의 대결, 바로 우리 옆동네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은데말이죠;; 물론 미국은 일터지면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과 다르게 뒷짐 지려고는 안 할 거라 생각은 하는데 만약에 트럼프가 재집권 한다던가 하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고 또 대만 국민당은 대놓고 친중행보 하고 있고(얼마전 국민당 전임 총리 중국 갔음). 물론 전쟁나면 우크라이나 전임대통령 처럼하겠지만서도…… 그나마 다행(?)인 건 중국 습 아조씨는 조선과는 다르게 주변세력과 외교적인 마찰을 많이 일으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태라는거.
어쨌든 전쟁이라는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겁니다만.
첫댓글 적어도 그렇게 큰 나라가 처들어 오면 저같아도 납짝 엎드려서 살려줍쇼 할거 같은데... 해안만 봉쇄해도 굶어 D지잖아요.
일본 본토가 제대로 지원하면 그게 불가능 하니까요 ㅎ 더구나 일본은 그 유명한 태풍도 있고. 참고로 조선이 대마도 정벌 할때도 이키 송포에 다가 원군을 요청했었습니다. 근데 안온거….
@배달의 민족 봉건영주들이 다 그렇죠 뭐.
14~15세기만해도 황해 건너 무역하고 사신왕래하고 해적질하는게 당연했나 보네요
해적들이 상하이까지 가다니
인천에서 산동반도나 바로 발해만 다이렉트로 꽂으면 길어야 몇주일에 물량도 훨씬 많을거 같은데
굳이 몇달 걸려 육로로 빙 돌아가는게...
예전에 방통대의 이영 교수 책&논문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가 동아시아 버전 바이킹의 대침략 급인 상황이었어서요...
고려가 조금만 더 상태가 안좋았으면 한반도에 동아시아 버전 노르망디 공국, 시칠리아 왕국이 생길 판이었죠.
당시 항해가 해류 바람 등 자연조건이 맞아야만 배가 출발할 수 있어서 한반도 - 중국간 왕래가 많게는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ㅜㅜ 명나라 성립초기 개경 - 남경간 사신 왕래도 보통 3-4개월이 걸렸고, 사신들이 죽고 표류하는 사건도 번번히 일어났죠.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 가장 먹음직 스러운(?)약탈지는 엄밀히 말하면 요동이나 산동보다는 동남쪽인 복건 절강 강소 쪽 이기는 했습니다. 경제력이 가장 발전한 동네가 그쪽 이었으니 ㅎ
왜선 300척을 불태우지말고 조선으로 가지 왔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