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중순 일이다. 독일 외무장관이 자국 공군 항공기를 타고 호주·뉴질랜드·피지 순방에 나섰다가 중간 기착지인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귀국해야 했다.
노후 항공기가 고장 났는데 고칠 수가 없었다. 제조업 강국 독일이 망신을 당했다. 요즘 독일에선 열차 지연이 잦아 인접국인 스위스 철도망에서 독일 열차가 배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독일, 다시 유럽의 환자 되나’라는 기사에서 이를 독일병의 사례로 거론했다.
독일 경제는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 둘 다 제조업 강국이고 수출 비중이 높다. 독일은 제조업 생산액 기준으로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 우리는 인도와 5, 6위를 다툰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이 독일 50.3%, 우리는 48.3%다.
수출 주도 경제로는 주요 20개국(G20)에서 독일과 우리가 1, 2위다. 그만큼 중국과도 무역을 많이 했다. 우리도 독일도 중국 개방 이후 수십 년간 중국 특수를 누렸고 튼튼한 제조업 기반의 경제 덕분에 글로벌 금융위기는 가뿐하게 넘겼다.
요즘 독일 경제는 세 분기 연속으로 뒷걸음쳤거나 제자리걸음 중이다. 올해 연간으로 주요국 중에서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앞으로도 걱정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향후 5년간 독일 성장률이 미국·영국·프랑스·스페인을 밑돌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 경제가 다시 ‘유럽의 환자’가 된 원인을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분석한다. 제조업 성공에 취해 정보기술(IT) 투자를 게을리 했다. 독일 GDP에서 IT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과 프랑스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창업 허가를 받는 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의 두 배인 120일이나 걸릴 정도로 관료제 폐해가 심하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크다. 중국과의 무역액이 3140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대중 의존도가 높다. 제조업 특성상 에너지를 과소비하는데 이제는 저렴한 러시아 천연가스를 쓸 수 없다. 인구 고령화로 기술 인력은 점점 부족해졌다. 이런 골칫거리는 독일 얘기만이 아니다. 과도한 중국 의존과 지정학적 위험, 저탄소 경제에 어울리지 않는 에너지 과소비 체질, 인구 고령화는 정확히 우리 문제이기도 하다.
위험을 예상할 수 있는데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당하는 위험을 ‘회색 코뿔소’라고 한다. 코뿔소는 커다란 덩치니 저 앞에 잘 보이지만 적당히 거리만 유지하면 괜찮을 것으로 방심하다 사고가 난다. 중국 부동산 경기가 꺼지면서 ‘중국판 리먼 사태’가 거론될 정도로 불안하다.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거의 주말마다 만나 거시·금융 현안을 논의하는 이른바 ‘F4’가 지난 일요일에도 열렸다. 경제수석까지 참석했다. F4 간담회의 메시지는 ‘아직 괜찮다’였다. 중국 부동산 불안과 미국 국채 금리 상승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했다.
F4 진단이 맞았으면 좋겠지만 외환시장은 더 튼튼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 올해 말 종료되는 국민연금의 외환시장 안정화 조치를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길 바란다.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뛰면 국민연금이 헤지를 위해 선물환을 매도하도록 하는 조치가 지난해 12월 마련됐다. 달러가 자동으로 시장에 쏟아지는 효과가 있다.
F4 멤버들은 F4 회의체가 위기 대응에 나름 성과를 냈다고 자평한다. “지금 멤버가 베스트”라며 서로를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레고랜드나 새마을금고 사태를 발 빠르게 정리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일 터지고 수습하는 걸 넘어서 가계부채나 차이나 리스크 같은 회색 코뿔소 대응을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이 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들 한다. 민간 주도의 경제를 표방하기 때문이라고? 속 편한 생각이다. 경제 체질을 바꿔 성장 동력을 높이고 미래를 대비하는 대표 정책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게 해야 한다.>중앙일보. 서경호 논설위원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우리 앞의 회색 코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