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제주(濟州)냐? [제1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비판(批判)한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현천철성【懸天鐵城 : 하늘에 매달린 철옹성(鐵瓮城=鐵甕城)이란 뜻으로, 매우 높고 튼튼하게 쌓은 성(城)을 일컫는다.】처럼 굳어진 20세기 이후(以後)에 만들어진 역사통설(歷史通說)을 깨뜨리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판단(判斷)에 따라 “왜, 무엇이, 어떻게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있는지를 하나하나 고찰(考察)하여, 제국주의(帝國主義) 어용(御用)사학자(史學者)들의 조선사(朝鮮史) 조작(造作)을 강력(强力)하게 비판(批判)하는 것을 목적(目的)으로 한 것이다.”」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냐?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비판(批判)한다.
○ 弘齋全書 51권 / 책문(策問) 4 갑인년(1794) / 탐라(耽羅) 제주(濟州) 세 고을 유생들의 시취(試取)【甲寅 / 耽羅 濟州三邑儒生試取 】【원문(原文)과 번역(飜譯)본 : 고전번역원db 인용】
〈본문(本文) 1〉 : 《王若曰。咨爾濟州子諸生。子諸生生長之地。古之九韓之一也。東瀛洲是已。星土也。風俗也。制置也。產植也。雖職方所不載。王會所不圖。其區分之次。淳漓之殊。因革之由。水陸之宜。子諸生。生於是鄕。長於是鄕。耳之得目所親。自有聞博而識明者。予欲問是州。不於子諸生而伊誰。: 왕은 말하노라. 아, 그대 제주의 제생아. 그대 제생이 생장한 땅은, 옛날 구한(九韓)의 하나인 동방 영주(瀛洲)가 이곳이다. 성좌와 토양과 풍속과 제도와 산물은 비록 직방기(職方記)에 기록된 것이 없고 왕회도(王會圖)에 그려진 것이 없다 하여도, 지역이 구분된 차례와 풍속의 순박하고 경박함과 연혁의 유래와 수륙의 알맞은 풍토에 대해서는, 그대 제생이 이 고을에서 태어났고, 이 고을에서 성장하며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자연히 듣는 것도 아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내가 이 고을에 대해 알고 싶은데 그대 제생이 아니면 누구에게 듣겠느냐.》
〈본문(本文) 2〉: 《洪惟我家。聖繼神承。干羽舞階。文德播遠。海隅出日。罔不率俾。粤在我太宗初載。耽羅來賓。請改爵號。以星主王子。爲左右都知管。而自是厥後。修制寖備。: 오직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방패와 깃털로 왕정에서 춤을 추면 문덕(文德)이 멀리 파급되어 해 뜨는 바닷가에까지 따르지 않는 곳이 없다. 옛날 우리 태종 초년에 탐라국에서 국빈으로 방문하여 관작의 호칭을 고쳐 주기를 청하여 성주(星主)와 왕자를 좌우 도지관(左右都知管)으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제도가 차츰 갖추어지게 되었다. 東西道之置大靜,旌義也。牧使之兼節制使也。判官之兼監牧都尉也。審藥倭學譯學之各具分職也。率皆視同內服。備加經理。: 동도와 서도에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을 두어 목사(牧使)는 절제사를 겸하게 하고 판관(判官)은 감목도위(監牧都尉)를 겸하게 하였으며, 심약(審藥)과 왜학(倭學)과 역학(譯學)을 각각 갖추어 직책을 분장한 것은, 모두 국내와 같이 관리하게 하였다. 年荒則輸粟往哺。無險風濤。貢至則挾纊以歸。輒加喣濡。列聖朝柔遠字恤之澤。謳吟在口。於乎不忘環一島。且幾百歲矣。: 흉년이 들면 바람과 파도를 무릅쓰고 곡식을 싣고 가 먹이고 공물이 도착하면 솜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여 따스한 은혜를 한층 더해 주니, 열성조의 먼 곳을 회유하고 사랑으로 어루만진 혜택을 온 섬 안에서 잊지 않고 입에 담아 노래하고 칭송한 지, 몇 백년이 되었다.》
〈본문(本文) 3〉: 《肆予否德。敉承丕緖。不敢不於先后之憲章。斯民之勞來也。夙夜盡心焉。: 이제 부덕한 내가 계통을 이어받았으니 선대 제왕의 헌장을 따라 이 백성을 위로하고 보호하는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而尙懼其九重邃矣。隱莫之達歟。萬姓衆矣。惠莫之究歟。人官有不能歟。物曲有不利歟。: 그러나 아직도 구중궁궐이 깊어서 숨은 폐단을 진달하지 못하지나 않은지, 백성의 무리가 많아서 혜택이 두루 미치지 못하지나 않은지, 관리들이 잘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사물의 곡절이 불리하지나 않은지를 늘 두려워하고 있다. 况以耽羅之僻處海中。厥產則有蠙珠曁魚橘柚驊騮之饒。厥民則有傷財困役。輕男重女之風。: 더구나 탐라도는 외진 바다 가운데 있으며, 산물은 진주 및 생선과 감귤ㆍ유자ㆍ준마 등이 풍요하고, 백성은 재물을 잃고 노역에 곤란을 당하여 사내를 경시하고 여인네를 중하게 여기는 풍속이 있다. 而比年以來。隔幷荐臻。饑饉頻仍。南顧一念。若恫在己。于斯時也。萬有一委貪狼以分憂之重。託碩鼠以百里之命。貨賄是求。箕斂恣行。則吏固無足言。將如我島氓之無告何哉。: 근년 이래로는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겹치고 흉년이 자주 드니 남방에 대한 염려가 마치 몸에 질병이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때에 만약 한 탐욕스러운 이에게 다스리는 중책을 맡기거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 관직을 주어 뇌물이나 찾게 하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자행하게 한다면,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섬 백성들은 호소할 길조차 없을 것이니 어떻게 하겠느냐.》
-------------------------------------------------------------------------------------
➊ 《况以耽羅之僻處海中.厥產則有蠙珠曁魚橘柚驊騮之饒.厥民則有傷財困役.輕男重女之風. : 더구나 탐라(耽羅)는 외진 바다 가운데 있으며, 산물은 진주 및 생선과 감귤ㆍ유자ㆍ준마 등이 풍요하고, 백성은 재물을 잃고 노역에 곤란을 당하여 사내를 경시하고 여인네를 중하게 여기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이를 고증(考證)한다거나 그 흔적(痕迹)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탐라(耽羅)의 동정귤(洞庭橘)은, 그 맛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하였는데, 탐라(耽羅)가 동정호(洞庭湖)에 있느냐? 동정귤(洞庭橘)은 그 중에서도 동정(洞庭) 서산(西山)의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탐라(耽羅)에 동정(洞庭) 서산(西山)이 있느냐?
➋ 탐라(耽羅)에서 산출(産出)되는 여러 가지 종류(種類)의 귤(橘)은 이미 고려(高麗)시대로부터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이르기까지 학자(學者), 관리들의 개인(個人)문집(文集), 왕조실록(王朝實錄)속에서도 수없이 등장(登場)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귤(橘)은 20세기 초(初)에 열도(列島)로부터 들어온 것이 시초(始初)라고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 이야긴가?
물론(勿論) 학자(學者)들은 제주도(濟州島)에 수백(數百)년 묵은 귤(橘)나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으라는 이야긴가? 조선왕조(朝鮮王朝) 때만 하더라도 귤(橘) 과원(果園)을 조정(朝廷)에서 직접(直接)관리(管理)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 제주도(濟州島)에서는 그 흔적(痕迹)은 없다. 상존(尙存)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正確)한 거다.
➌ 탐라(耽羅)의 ‘특산(特産)’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된 것이 여러 편이 있으므로 참고(參考)하면 될 것이다.
-------------------------------------------------------------------------------------
〈본문(本文) 4〉: 《夫天生時而地生財。人其用天而因地。無古今一也。: 대저 하늘은 시절을 낳고 땅은 재물을 낳는데, 사람이 하늘의 도리를 이용하고 땅의 이로움을 따르는 것은 고금에 관계없이 동일한 일이다. 耽羅之水事多而陸事寡。今亦古也。茅茨不編。踏畊特苦。今亦古也。絮綿不產。尺布如金。今亦古也。: 탐라도 바다에서의 일은 많고 육지의 일이 적은 것이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고, 띠풀의 이엉을 엮지 않고 씨앗을 심어서 밟아 주는 일이 특히 고된 것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으며, 면화가 생산되지 않아서 한 조각의 베나 비단을 황금과 같이 여기는 것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다. 而射石卜地之初。貲財之殷富如彼。休養生息之餘。民物之凋弊如此者。豈不由於古人所謂角而翼者歟。: 활을 쏘아 땅을 점치던 당시에는 재물의 풍요로움이 저러하였건만, 백성들을 쉬게 하고 안정시킨 뒤인데도 그들의 생활과 물산의 산출이 이처럼 쇠잔해진 것은 옛사람들의 이른바 ‘토끼 머리에 뿔이 돋고 소 옆구리에 날개가 나온다.’는 식의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조처에서 생긴 일이 아니겠느냐. 前制無追往之辜。後旨開自今之恕。悠悠世情。遂忽成法。爰命繡衣。往汝覈之。苟有犯也。: 전일의 제도에 대해서는 지난 잘못을 추궁하여 허물 잡는 일이 없고 후일의 명령은 지금부터 관용의 길을 열어 주었는데, 무심한 세상의 인정은 마침내 국법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어사에게 명하여 그대들에게 찾아가 바로잡게 하였으니, 진실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다면 국법이 있을 것이다. 常刑自有。而惟是窳政之孰爲當革。利事之孰爲當興。民欲之所必從。民窮之所必紓。不有以發策周諮。豈能使千里重溟魚欄蟹舍之情。戶庭不出而指掌可求哉。: 그러나 오직 잘못된 정치는 무엇을 고쳐야 하며, 이로운 일은 어느 것을 일으켜야 하고, 백성들의 하고 싶어 하는 것 중에 반드시 따라 주어야 할 것과 백성들의 곤경 가운데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책문을 내어 자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 리의 먼 바다 속 어란(魚欄), 해사(蟹舍)의 실정을 뜰에도 나가지 않고 손바닥을 가리키듯 알아볼 수 있겠느냐. 凡今對予問者。無非一方之俊乂。十室之忠信也。經歷審熟於土著。講磨厭飫於卷中。: 지금 나의 책문에 대해 대책을 내는 이는 모두가 한 지방의 준재이며 마을의 착실한 사람이 아닌 이가 없다. 토박이이니 경험은 익숙할 것이며 공부는 책 속에서 만족하게 하였을 것이다. 何以則蕞爾一島。物阜人安。天地之藏咸歸。尾閭之洩莫憂。而海波不揚。聲敎于訖歟。 : 어떻게 하여야 조그마한 섬에 산물은 풍성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천지의 보물이 모두 모이고 아래로 새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며, 바다의 물결도 조용하여 아름다운 교화가 만족하게 될 수 있겠느냐?》
〈본문(本文) 5〉: 《又有問於子諸生者曰。邑名耽羅。蓋因泊耽津而朝新羅。則或稱乇羅。或稱耽牟羅者。何所取義。豈乇亦津名。而牟乃語辭歟。: 또 그대 제생에게 묻노라. 고을 이름을 탐라라고 한 것은 대체로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에 조회한 것으로 인하였다고 하는데, 혹 탁라(乇羅)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은 탐모라(耽牟羅)라고 칭하기도 하는 것은 어디에서 취한 뜻이냐? 어쩌면 탁도 역시 나루 이름이고 모는 어조사인 것은 아니냐? 昌黎送序。歷數海外諸國。而流求扶南耽浮羅之屬。東南際天地。則雲笈所謂太上老君之降于浮羅嶽者。疑或此島。豈牟爲浮訛而嶽有可徵歟。: 한퇴지(韓退之)의 ‘친구를 전송하는 서문[送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꼽으면서 유구(流求)ㆍ부남(扶南)ㆍ탐부라(耽浮羅) 등속은 동남의 하늘 땅 끝에 있다고 하였으니, 운급(雲笈)에서 말하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嶽)에 하강하였다.”는 것이 혹시 이 섬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모(牟)가 부(浮)로 와전된 것이라면 산악이라는 악(嶽)은 증명할 만한 것이 있느냐? 曰老人星見。人多壽考。而老人星。卽恒星之一。則世以南極之爲天樞者。謂之老人。何其謬歟。 : 또한 노인성(老人星)을 본 사람은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노인성이라는 것은 바로 항성(恒星)의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천추(天樞)가 되는 남극성(南極星)을 노인성이라고 한다고 하니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
-------------------------------------------------------------------------------------
➊ 《又有問於子諸生者曰。邑名耽羅。蓋因泊耽津而朝新羅。則或稱乇羅。或稱耽牟羅者。何所取義。豈乇亦津名。而牟乃語辭歟。: 또 그대 제생에게 묻노라. 고을 이름을 탐라라고 한 것은 대체로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新羅)에 조회한 것으로 인하였다고 하는데, 혹 탁라(乇羅)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은 탐모라(耽牟羅)라고 칭하기도 하는 것은 어디에서 취한 뜻이냐? 어쩌면 탁도 역시 나루 이름이고 모는 어조사인 것은 아니냐?》하였는데,
탐라(耽羅)는 신라(新羅)에 복속(服屬)되기 그 이전(以前), 이미 백제(百濟)의 부용국(附庸國)이었기 때문에, “탐진(耽津)에 정박(碇泊)하여 신라(新羅)에 조회(朝會)한 것에서 연유(緣由)한다”는 말은 왜곡(歪曲)·조작(造作)된 것이다.
➋ 《昌黎送序。歷數海外諸國。而流求扶南耽浮羅之屬。東南際天地。則雲笈所謂太上老君之降于浮羅嶽者。疑或此島。豈牟爲浮訛而嶽有可徵歟。: 한퇴지(韓退之)의 ‘친구를 전송하는 서문[送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꼽으면서 유구(流求)ㆍ부남(扶南)ㆍ탐부라(耽浮羅) 등속은 동남의 하늘 땅 끝에 있다.》고 하였는데,
〈동남(東南)의 하늘 끝에 유구(琉球)와 부남(扶南)과 탐부라(耽浮羅)등이 있다〉고 하였다면 그 동남(東南)쪽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이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숨길 수 없다.
“유구(琉球)와 부남(扶南)이 동남(東南)쪽에 있다”는 말은, 「당시 한퇴지(韓退之)는 유구(琉球)와 부남(扶南)의 서북(西北)쪽 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유(韓愈, 대력 3년(768년)~장경 4년(824년)) / 위키백과 :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 · 정치가 · 사상가이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등주(鄧主)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출신이나, 그 자신은 창려(昌黎) 출신으로 자처했다.】고 전하고 있다.
➌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로 보면 : 부남(扶南)은 오늘날의 캄보디아(Cambodia)를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전(原典)기록을 보면 오늘날의 “방글라데시(Bangladesh)와 인도(印度) 일부(一部)지방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➌-1) 통전(通典) : 《扶南國,在日南郡之南,海西大島中,去日南可七千里,在林邑西南三千餘里.其境廣袤三千餘里.國俗本裸,文身被髮,不製衣裳.其先有女人為王,號曰柳葉,中略.氣候,風俗,物產大較與林邑同. : 부남(扶南)국은, 일남(日南)군의 남쪽에 있는데, 바다 서(西)쪽의 큰 섬 가운데 있다. 일남(日南)으로부터 7천리(千里)가량 떨어져 있으며, 임읍(林邑) 서남(西南) 3천여(千餘)에 있다. 그 나라의 지경은 세로(袤 :남북)로 넓어 3천여(千餘)리이다. 나라의 풍속은 본래 벌거벗고, 문신과 머리를 풀어헤치며, 의상(衣裳)은 만들지 않는다. 그 선대에 여인이 왕(王)이었는데, 이름이 “유엽(柳葉)”이었다. 중략(中略). 기후(氣候), 풍속(風俗), 물산(物産)은 크게 견주어 보면 임읍(林邑)과 같다.》고 하였는데,
● 부남(扶南)은,〈옛 왜(倭)와 아주 유사(類似)한 종족(種族)〉이라고 할 수 있다. 즉(卽) 「나체(裸體)로 활보(闊步)하고, 문신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의복이 없어 천으로 감고 다니며, 선대(先代)의 왕(王)은 여왕(女王)이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➌-2) 신당서(新唐書) / 《扶南,在日南之南七千里,中略.其人黑身,鬈發,夥行,俗不為寇盜.田一歲種,三歲獲. : 부남(扶南)은, 일남(日南)의 남쪽 7천리에 있다. 중략(中略). 그 사람들은 몸은 검으며(黑),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며, 패거리로 돌아다니는데(夥行), 풍속에 도적질은 않는다. 논에 한 번 종자를 뿌리면, 3번 수확한다.》고 하였다.
➌-3) 남제서(南齊書) / 《扶南國,在日南之南大海西蠻灣中,廣袤三千餘里,有大江水西流入海.其先有女人爲王,名柳葉. : 부남(扶南)국은, 일남(日南)의 남쪽 큰 바다의 서만(西蠻)의 만【灣 : 육지로 쑤욱 들어온 바다】가운데 있는데, 남북(袤:세로)이 넓어 3천여(千餘)리이며, 큰 강의 물이 서(西)쪽에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 나라의 선대(先代)에 여왕(女王)이 있었는데, 이름이 “유엽(柳葉)”이다.》
※ 연무(延袤) : 연(延)은 동서(東西), 무(袤)는 남북(南北)의 뜻으로 쓰인다.
➌-4) 진서(晉書) / 《扶南,西去林邑三千餘里,在海大灣中,其境廣袤三千里,有城邑宮室.人皆醜黑拳發,倮身跣行.性質直,不爲寇盜,以耕種爲務,一歲種,三歲獲.亦有書記府庫,文字有類于胡.喪葬婚姻略同林邑,其王本是女子,字葉柳. : 부남(扶南)은 임읍(林邑) 서쪽으로 3천여(千餘)떨어져 있고, 바다의 큰 만(灣)에 있는데, 그 지경이 세로(남북)가 넓어 3천리(千里)이다.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추하고 검으며(黑) 권발(拳髮)하며, 벌거벗고 맨발로 다닌다. 성질은 곧아 도적질을 하지 않으며, 씨를 뿌리고 밭가는 것을 권장하는데, 한 번 파종하면 3번 수확한다. 또한 서기(書記)가 있고, 관청에 창고가 있으며, 문자는 호(胡) 종류가 있다. 장사지내는 일과 상중(喪中)의 모든 것과 혼인(婚姻)에 대한 것들은 대략 임읍(林邑)과 같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여자인데, 자(字)가 “유엽(柳葉)”이다.》
➌-5) 남사(南史) / 《扶南國,在日南郡之南,海西大灣中,去日南可七千里.在林邑西南三千餘里.城去海五百里,有大江廣十里,從西流東入海.其國廣輪三千餘里,氣候風俗大較與林邑同. : 부남(扶南)국은, 일남(日南)군의 남쪽에 있는데, 바다 서쪽의 큰 만 가운데이며, 일남(日南)으로부터 대략 7천리이다. 임읍(林邑) 서남(西南) 3천여(千餘)리에 있다. 성(城)은 바다에서 5백리 떨어져 있는데, 큰 강은 넓어 10 리이며, 서쪽으로부터 따라 흘러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그 나라는 3천여(千餘)리로 크고 크다. 기후와 풍속은 크게 견주어보면 임읍(林邑)과 같다. 其南界三千餘里有頓遜國,在海崎上,地方千里.城去海十里.其西界接天竺,安息徼外諸國,往還交易.其市東西交會,日有萬餘人.扶南國俗本裸,文身被發,不制衣裳,以女人爲王,號曰柳葉. : 그 남쪽으로 3천여(千餘)리에 “돈손국(頓遜國)”이 있는데, 해기【海崎 : 바다로 길쭉하게 나온 땅】위에 있으며, 지방은 천리(千里)이다. 성(城)은 바다에서 십리(十里) 떨어져 있다. 그 서(西)쪽 경계에 천축(天竺)과 접(接)하는데, 안식(安息) 변방(邊方) 밖의 여러 나라와, 왕래하며 교역을 하는데, 저자는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만나는데, 하루에 만여(萬餘)인이나 된다. 부남(扶南)국의 풍속은 본래 벌거벗고, 문신(文身)하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의상(衣裳)을 만들지 않는다. 여인(女人)이 왕인데, 부르기를 “유엽(柳葉)”이라 하였다. 其國人皆醜黑拳發,中略.俗事天神,天神以銅爲像,二面者四手,四面者八手,手各有所持.或小兒,或鳥獸,或日月.國俗,居喪則剃除鬚髮.死者有四葬:水葬則投之江流,火葬則焚爲灰燼,土葬則瘞埋之,鳥葬則棄之中野. :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검고 추하며, 권발(拳髮)을 한다. 천신(天神)은 사회의 풍속인데, 천신(天神)을 구리(銅)로 상(象)을 만드는데, 얼굴이 두 개고 손은 네 개이며,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자는 여덟 개의 손을 가졌으며, 손 마다 여럿을 가지고 있는데, 혹은 어린아이, 혹은 새나 짐승, 혹은 해와 달이다. 나라의 풍속은, 상중일 때는 구레 나루와 머리를 모두 깎아 없앤다. 죽은 자는 네 종류로 장사를 지내는데 : 수장(水葬)은 강에 던져 떠내려 보내고, 화장(火葬)은 불태워 재로 하고, 토장(土葬)은 땅에 묻는 것이며(瘱埋), 조장(鳥葬)은 들판 가운데 내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도출처 : 두산백과
※ 위의 원전(原典)의 내용(內容)을 검토(檢討)해 보면 : “부남(扶南)”은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땅을 일컫는 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서(西)쪽에서 큰 강물이 와 바다로 들어간다.’는 곳은 인도(印度)북방(北方)【히말라아 산맥(山脈)의 남쪽지대】의 서(西)쪽으로부터 흘러들어와 방글라데시(Bangladesh) 남(南)쪽 바다로 들어가는 갠지스강(Ganges江)을 지칭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남(南)쪽의 큰 바다 서만(西蠻 : 西蠻夷)의 만【灣 : 육지로 쑤욱 들어온 바다】가운데 있다.[南大海西蠻灣中]고 하였고, 그 땅이 세로(무:袤)의 길이가 3천 여리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예(例)로 보면 〈동남(東南)의 하늘 끝에 유구(琉球)와 부남(扶南)과 탐부라(耽浮羅)등이 있다〉고 하였으니, 「유구(琉球)·부남(扶南)·탐부라(耽浮羅)=탐라(耽羅)」등은,
1)〈탐라(耽羅)는, 오늘날의 방글라데시(Bangladesh)의 동북방(東北方) 접경지대(接境地帶)에, 미얀마(Myanmar:舊 Buma)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운남성(雲南省) 서부(西部)의 접경지대(接境地帶)에 탐라(耽羅)가 있었다.〉고 판단(判斷)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 하나로 보면 : 당(唐)시대의 사회상(社會相)에서 “동남(東南) 하늘 끝에”라는 것을 상기(想起)한다면 해남도(海南島) 역시(亦是) 탐라(耽羅)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소(要素)가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탐라(耽羅)와 매우 유사(類似)한 곳이다.
특히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탐라(耽羅)는, 남송(南宋)과 일본(日本)과의 요충지(要衝地)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늘(恒常)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아야한다.」고 한 사실은 “해남도(海南島)”가 탐라(耽羅)일 가능성(可能性)이 많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例)는 자연환경(自然環境) 곧 지형지세(地形地勢), 풍속(風俗)등으로 본 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角度)의 이야기지만,
당(唐)나라 때의 한유(韓愈)가 말하는 동남(東南)지방에 「유구(琉球)·부남(扶南)·탐부라(耽浮羅)=탐라(耽羅)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당시(當時) 당(唐)나라의 서울(京)은, 동남(東南)의 반대방향(反對方向)인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방글라데시(Bangladesh)와 미얀마(Myanmar:舊 Buma) 및 운남성(雲南省) 서(西)쪽으로 부터 서북방(西北方)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남부(南部)다.」
● 위의 원전(原典)에 따르면, 반도(半島)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는, 조선(朝鮮) 역사서(歷史書)속의 탐라(耽羅)가 될 수 없다.
-------------------------------------------------------------------------------------
〈본문(本文) 6〉: 高襲星主。梁襲王子。而文昌佑得王子之爵。則志以王子之繼梁氏者。謂之繼高。得非誤耶。曰芮悉弗之告魏祖曰。金產夫餘。珂產涉羅。而爲百濟所幷。二品不登於府。涉羅。卽耽羅歟。고씨(高氏)는 성주(星主)를 세습하고 양씨(梁氏)는 왕자를 세습하였다. 문창우(文昌佑)가 왕자의 작호를 얻었는데 기록에는 양씨를 계승한 왕자를 고씨를 계승한 것으로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 예실불(芮悉弗)이 위조(魏祖)에게 고하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생산되고 마노(瑪瑙)는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데, 백제(百濟)에 합병되고 나서 두 물품이 왕부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섭라가 바로 탐라이냐?
● 《金產夫餘。珂產涉羅。而爲百濟所幷。二品不登於府。涉羅。卽耽羅歟。: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생산되고 마노(瑪瑙)는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데, 백제(百濟)에 합병되고 나서 두 물품이 왕부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섭라가 바로 탐라이냐?》하고 묻고 있는데,
오늘날 제주(濟州) 특산품(特産品)중에 마노(瑪瑙)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노(瑪瑙)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삼척(三陟) 곧 척주(陟州)의 토산품(土産品)으로 되어 있고,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전라도(全羅道) 임실현(任實縣)의 토산(土産)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디에서 근거(根據)한 것이냐?
-------------------------------------------------------------------------------------
〈본문(本文) 7〉: 塔羅赤之爲元使也。載牛馬駝驢羊來。牧于首山坪。駝羊今有種歟。曰達魯花赤府。何以遙管於中州。軍民安撫府。何以還隸於勝國。其地皆可指點。文林使倭而望洋統領。聘麗而識路故實。竝可揚扢歟。曰神人從地湧出。言猶河漢。自古有三姓之穴。紫衣齎糧送女。志在齊諧。至今傳石函之蹟者。何歟。탑라치(塔羅赤)가 원 나라 사신으로 올 때 소ㆍ말ㆍ낙타ㆍ당나귀ㆍ양 등을 싣고 와서 수산평(首山坪)에서 길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낙타와 양의 종자가 있느냐? 또는 달로화치부(達魯花赤府)는 어떻게 먼 곳에 있는 중국(中國)에서 관할하였으며 군민안무부(軍民安撫府)는 어떻게 하여 고려에 두게 되었는지 그 지역을 지적할 수 있겠느냐? 문림(文林)이 왜국으로 사신을 가면서 해양을 바라보고 통괄하여 알았다고 하고 고려에 초빙되어 가면서는 길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 고사를 아울러 들추어 보아라. 또한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마는 예로부터 삼성혈(三姓穴)이 전해 오고, 붉은 옷을 입은 사자가 곡식과 종자와 처녀를 보내왔다는 말이 《제해(齊諧)》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석함(石函)의 유적이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어쩐 일이냐?
➊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에 있는 말(馬)은 조랑말 수준임에도 이게 모두 옛 몽고(蒙古) 때 들여온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塔羅赤之爲元使也。載牛馬駝驢羊來。牧于首山坪。駝羊今有種歟。: 탑라치(塔羅赤)가 원 나라 사신으로 올 때 소ㆍ말ㆍ낙타ㆍ당나귀ㆍ양 등을 싣고 와서 수산평(首山坪)에서 길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낙타와 양의 종자가 있느냐?〉하는 것이다.
소(牛)와 말(馬), 낙타(駱駝)와 당나귀(驢), 양(羊)등을 대규모(大規模)로 사육(飼育)했다면, 그 종(種)들은 어디에 있으며, 그 흔적(痕迹)들을 찾아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글’로 만들어 놓은 소위(所謂) ‘해설서(解說書)’에만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거다.
-------------------------------------------------------------------------------------
〈본문(本文) 8〉: 曰星主王子之號。時世可稽。河幕兩道之設。本末可詳歟。曰雲漢若挐。鎭山以名。則嶽降之賢。且問幾人。溟渤無極。石壁環封。則水族之靈。亦多異聞歟。曰方嶽香飆。豓說神仙之遊。木槽零響。漫比風石之音。此淸虛者之所有事也。土性浮燥。從每每之新田。杵歌互答。和摻摻之舊曲。此風土記之所特書也。海上三神。天下其眞有耶。昇平百年。民物近何如也。曰高峰絶頂。往往多水貯之池。造化何其費精。雲際翠微點點。是江南之山。道里定云幾何歟。子諸生。其悉言乃聞乃識。以副予虛佇之意。予將親覽焉。또한 성주와 왕자의 호칭이 시작된 시대를 상고해 보며, 하(河)ㆍ막(幕) 양 도를 설치하게 된 본말을 자세히 말하여 보아라. 또한 구름 속의 은하수라도 잡을 수 있다고 하여 진산(鎭山)의 이름을 한라산(漢拏山)이라고 하였는데,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현인은 몇 사람이나 되느냐? 짙푸른 바다가 끝이 없고 암벽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수족(水族)의 신령함에 대한 많은 신기한 소문이 있지 않느냐? 또한 산악에서 향기가 나부끼면 신선이 노닌다고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나무 구유에서 물이 떨어지는 음향을 풍경 소리에 비하는데, 이러한 것은 청허(淸虛)한 자들에게 있는 일이다. 토양은 푸석하고 건조하여 매번 새 밭을 일구어야 하고, 절구질하며 주고받는 잔잔한 옛 노래는 이곳 풍토기에 특별히 기록된 것이다. 바다 위의 삼신산(三神山)이 천하에 진정 있는 것이냐? 태평 시절 백 년 동안에 백성과 사물은 근래에 어떠하냐? 또한 고봉 절정에 더러는 물이 담긴 연못이 많다고 하는데 조물주는 어쩌면 그리도 정력을 들였으며, 구름 사이에 푸른 점이 점점이 있는 것은 모두 강남의 산이라고 하는데 거리는 확실하게 얼마나 되느냐? 그대 제생은 듣고 본 것을 모두 말하여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보답하라. 내 친히 열람하리라. [출처(出處) : 원문(原文)·번역본(飜譯本) : 고전번역원db] -끝-
=====================================================================================
섭라(涉羅)가 탐라(耽羅)고,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냐?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비판(批判)한다.
○「탐라(耽羅)가 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가 될 수 없다.」는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을 보면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매국사학(賣國史學)을 또 다시 검증(檢證), 비판(批判)해보자.
즉(卽) 〈한글 해설서(解說書)〉가 아닌 옛 조선(朝鮮)의 많은 현인(賢人)들의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삼탄집(三灘集) 제6권 / 시(詩) / 제주로 부임하는 양 목사 ‘찬’를 전송하다〔送濟州梁牧使, 瓚〕
《탁라 섬은 멀리 바다 한복판에 있거니와 : 乇羅遙在海中央 / 들판 넓고 산 에워싸 한 마을이 되었구나 : 野曠山圍作一鄕 / 풍속 보면 주진 같아 백성 부리기가 쉽고 : 俗似朱陳民易使 / 땅을 보면 유기 같아 좋은 말이 많이 나네. : 地如幽冀馬多良 / 뽕과 삼엔 비 흡족해 집마다 다 기뻐하고 : 桑麻雨足家家喜 / 귤과 유자 서리 짙어 나무마다 향 풍기네. : 橘柚霜濃樹樹香 / 중략(中略).》
● 주-0002를 보면 : 〈탐라(耽羅)로, 지금의 제주도(濟州道)를 말한다. 탐모라(耽牟羅), 섭라(涉羅)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는데,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제주도(濟州島)의 토산물(土産物)은 귤(橘)과 유자(柚), 대모(玳瑁)등이라고 하였는데, 이건 고증(考證)을 할 수 없다. 곧 증거(證據)가 없다는 이야기다.
「동정귤(洞庭橘), 이 귤(橘)은, 오직 탐라(耽羅)외에는 없다. (洞庭橘. 此橘。耽羅外無之)」고 하였다. 이걸 깨뜨려야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탐라(耽羅)의 토산물(土産物)애 대한 것들은 우리 카페(Cafe)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揭載)되었으므로 오늘은 생략(省略)키로 한다.
(2) 해동역사(海東繹史)제6권 / 세기(世紀) 6 / 고구려(高句麗) 1 : 《 [주-D065] 섭라(涉羅) : 탐라(耽羅)를 말하는바, 지금의 제주도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탐라는 동성왕(東城王) 20년(498)에 백제에 복속하였다.》 고 하였으니, 탐라(耽羅)는 곧 섭라(涉羅)요, 탐모라(耽牟羅)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정말 반도(半島) 제주도(濟州島)일까?
(3) 임하필기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탐라(耽羅)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임읍(林邑) 남쪽 해변의 소국(小國)이라 하고, 위서(魏書)에는 섭라(涉羅)라 칭하였으며, 수서(隋書)에는 담모라(聃牟羅) 또는 담라(儋羅), 탁라(乇羅)라 하였다. 풍속이 질박하고 촌스러워 개와 돼지가죽 옷을 입었다. 여름에는 풀집[草屋]에서 살고 겨울에는 굴집[窟室]에서 살았다. 땅에는 오곡이 자라는데 밭갈이에 소를 사용할 줄 몰라서 철치(鐵齒 쇠스랑)로 땅을 고르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인용(引用)했다는 것은, 당시(當時)의 학자(學者)들은 책부원귀(冊府元龜)속에 들어있는 내용(內容)을 신뢰(信賴)했다는 뜻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
당시(當時)에 탐라(耽羅)는, 임읍(林邑) 남(南)쪽의 소국(小國)이며, 위서(魏書)에서는 섭라(涉羅), 수서(隋書)에서는 담모라(聃牟羅) 또는 담라(儋羅), 탁라(乇羅)등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임읍(林邑)」은 오늘날의 인도지나(印度支那)반도(半島) 땅에 있던 옛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탐라(耽羅)는 인도지나(印度支那) 반도(半島) 남(南)쪽의 바닷가에 있었던 소국(小國)이었다는 이야기다.
토질(土質)과 토산물(土産物)인 「여러 종류의 귤(橘)과, 대모(玳瑁)등의 해산물(海産物)과 장독(瘴毒), 향서(香鼠), 큰 지네」등이 난다는 곳은 아열대(亞熱帶) 기후(氣候)를 가진 곳에서나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반도(半島) 제주(濟州) 땅은 이런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충족(充足)시킬 수 없다. 곧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4) 高麗史節要 4권 / 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 / 갑술 3년(1034), 송 경우(景祐) 원년ㆍ거란 중희 3년 : 《宋商,東西蕃,耽羅,獻土物,賜坐,觀禮,後以爲常。송나라 상인과 동ㆍ서번(東西蕃)과 탐라가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앉아서 예식을 보게 해 주었는데 이후로 일정한 절차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고려(高麗)는 반도(半島) 땅에서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당시(當時)의 고려(高麗)는 속국(屬國)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았는데, 곧 번국(蕃國)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동쪽에 있는 속국(屬國)인 동번(東蕃)이요. 또 하나는 서(西)쪽에 있는 속국(屬國)인 서번(西蕃)이며, 또 하나의 속국(屬國)은 바로 탐라(耽羅)다.
위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른다면 고려(高麗)의 동(東)쪽과 서(西)쪽 어디에 속국(屬國)들이 있을 곳이 있었다는 말일까? 동번(東蕃)과 서번(西蕃)의 백성(百姓)들과 왕(王)은 아가미가 달린 별종(別種) 인간집단(人間集團)이었다는 것일까? 고려(高麗)가 반도(半島)가 아닌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5) 高麗史節要 21권 / 충렬왕 3(忠烈王三) / 정유 23년(1297), 원 대덕(大德) 원년 : 《11월에 상장군 김연수(金延壽)를 원 나라에 보내어 인삼과 탐라의 수유(酥油 우양(牛羊)의 젖을 달인 기름) 등의 물품을 바쳤다. : 十一月,遣上將軍金延壽,如元,獻人參及耽羅酥油等物.》
(6) 고려사절요 제23권 / 충선왕(忠宣王) / 기유 원년(1309), 원 지대 2년 :《원 나라에서 환자 이삼진(李三眞)을 보내 와서 탐라(耽羅)의 쇠고기 바치는 일을 폐지하였다. 元,遣宦者李三眞,來罷獻耽羅牛肉。》
➊ 탐라(耽羅)의 특산(特産) : 수유(酥油)와 우육(牛肉) : 오늘날을 보면, 소(牛)나 양(羊)등의 젖으로 만든 것으로 차(茶)와 함께 마시는데 이를 수유차(酥油茶)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토산물을 보면, 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경상도(慶尙道). 황해도(黃海道) 및 탐라(耽羅)등지에서 수유(酥油)가 생산(生産)된다고 하였음을 보면, 이들 지방에 유목민(遊牧民) 또는 대규모(大規模) 목장(牧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흔적(痕迹)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냐?
➋ 또 탐라(耽羅)의 특산(特産)으로 맛있는 소고기(牛肉)가 있다고 하여, 몽고(蒙古)인들조차 그 맛을 잊지 못해 요구(要求)했다고 전해진다. 반도(半島) 땅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탐라(耽羅)) 땅에 많은 소(牛)들이 길러졌다는 것일까?” 그 흔적(痕迹)이나 기록(記錄)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많은 토산품(土産品)들이 산출(産出)되었다고 수천(數千) 년 이야기하지만, 실제(實題) 그것들을 증명(證明) 또는 고증(考證)할 수 있는 자료(資料)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그저 땅의 이름(地名)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곳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7) 급암시집 제1권 / 고시(古詩) / 제주에 가는 계명숙 ‘진’ 을 보내며〔送季明叔之濟州, 晉〕
《탐라는 예부터 나라라고 일컬어졌으니 : 耽羅古稱國 / 산 기이하고 물 역시 빼어나네 : 山奇水亦秀 / 거주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순박하고 : 居民尙淳朴 / 그 공물은 오직 귤과 유자라네 : 厥貢惟橘柚 / 문신을 하고 사냥에 능하며 : 文身能射獵 / 갈옷 입고 밭 갈고 김맬 줄 아네 : 卉服知耕耨 / 준마 만 필이 모여 있으니 : 驊騮萬疋屯 / 지금 천자의 해외 마구간일세 : 今天子外廏 / 중략(中略)》 하였다.
(8) 기언 제32권 외편 / [서(序)] / 동사(東事) 서(序) : 탁라(乇羅)는 남해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로 좋은 말과 진주와 대모(玳瑁)가 산출된다. 처음 신라와 통교하여 국호를 탐라(耽羅)라고 하였다. 이에 신라 아래에 붙인다.
(9) 기언 제48권 속집 / 사방(四方) 2 / 탐라지(耽羅誌) : 그곳에서 재배되는 곡물은 기장, 피, 콩, 보리이고, 생산되는 물화는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이고, 잡히는 어물은 전복, 상어, 웅어인데 태생(胎生)이고 알로 낳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 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난다. (其穀宜黍,稷,菽,麥。其貨。璸珠,玳瑁,螺具。其魚。鰒魚,鮫魚,望魚。胎化無卵育。其果。橘,柚,橙,柑,梔,榧。產良馬.) 산기슭의 땅은 돌이 많고 흙이 적기 때문에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는 밭을 밟는다.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는 한 자 남짓한 크기이며, 향서(香鼠)가 난다. 섬사람들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해녀들은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 되는 베를 몸에 묶는다. (山麓之地。多石少土。耕種者踏田。多蟲蛇。蝍蛆尺餘。出香鼠. 島人皮服。海妻無裙。布繫一尺.)
● 위에 글(9) 내용(內容)을 보면, 본시(本是)의 ‘탐라(耽羅)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대에 있는 땅이었다.’는 것을 상식적(常識的)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등이 나오고,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는 한 자 남짓한 크기이며, 향서(香鼠)가 난다는 것만으로도 그 땅의 기후(氣候)를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상식적(常識的)인 이야기다. 이런 상식(常識)이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반도(半島) 땅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다.
이젠 정의(正義)와 상식(常識)이 통하는 사회(社會)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문 계속(繼續)〉: 《주(州)의 치소(治所)는 두무악(頭無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항상 북풍이 많아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기울어 있다. 정의와 대정 두 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남쪽 지역은 바람이 없고 장무(瘴霧)가 많아서 낮에도 어둡다.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인데, 또한 부악(釜嶽)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주의 치소에서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못이 있으며 지세가 평평하기 때문에 두무악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정상에 백록홍(白鹿泓)이 있고, 춘분과 추분 초저녁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州在頭無嶽北。北地常多北風。樹木之植。皆偃向南。旌義,大靜二縣。在嶽南。南地無風多瘴霧。晝晦。頭無嶽。漢挐別名。亦曰釜嶽。在州南二十里。衆峯。峯皆上有泓。地勢寬平。稱頭無嶽。其絶頂。有白鹿泓。春秋二分。夕見南極老人星)》
➊ 한라산(漢拏山)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라도 위 글에서 말하는 「여러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못(泓.沼)이 있다(峯皆上有泓)」는 것을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말하는 것은, 한라산(漢拏山) 줄기에 여러 개의 봉우리(峯)가 있고, 산(山) 정상(頂上)에는 못(池)이 있었다는 거다.
➋ 두무악(頭無嶽)의 남(南)쪽 지대(地帶)는, 「바람이 별로 없고 무더위에 울창한 산림(山林)과 습(濕)한 땅 때문에 늘 장무(瘴霧)가 끼어 있어 낮에도 어둡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수백(數百), 수천(數千)년 이어져왔을 것이며, 이에 토산물(土産物) 또한 그 땅에 알맞은 것들이 산출(産出)되는 것이다. 이게 자연(自然)의 순리(順理)다.
반도(半島) 제주도(濟州島) 땅은, 이런 자연환경(自然環境)이 만들어질 수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이런 자연(自然)의 순리(順理)가 통(通)하지 않는 무법천지(無法天地)의 나라다. 이 모두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한 농간(弄奸)으로 인한 불신풍조(不信風潮)가 만연(蔓延)되었기 때문이다.
(10) 다산시문집 제22권 / 잡문(雜文) / 탐진(耽津)에 대한 대답 : 북방 사람이 나를 위해 슬퍼하며 걱정하여 말하기를, “탐진(耽津)은 탐라(耽羅)의 나루이며 장독(瘴毒)이 서린 고장으로서 죄인을 귀양보내는 곳이다. 그대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 장독(瘴毒)은 : 위의 글 (9)의 장무(瘴霧)와 관계(關係)가 깊은 것으로, 장독(瘴毒)이니, 장무(瘴霧)니 하는 것들의 현상(現象)은, 그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장독(瘴毒) : 지대가 낮고 습(濕)한 고장에서 봄과 여름 사이에 풍독(風毒)이 치성(熾盛)하고 또 산에 있는 물이 증화(蒸化)되어 장독을 많이 발생시키므로 풍습(風濕)의 독기(毒氣)가 땅으로부터 일어나 사람을 상(傷)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대륙(大陸)의 장강(長江)이남(以南)과 서남(西南)지방에서 발생(發生)한다고 하였다.
〈한국전통지식포탈의 장독(瘴毒)에서는, 더운 지방의 산과 숲, 안개가 짙은 곳에서 습열(濕熱)이 위로 올라갈 때에 생기는 나쁜 기운으로 전염을 일으키는 사기의 하나이다.〉라고 하며, 주로 아열대(亞熱帶)의 습지(濕地)에서 발생하는 악성 말라리아 따위의 전염병을 말한다고 한다.
택리지(擇里志)에서는, 〈靈巖東南海上有八邑,中略,冬月草木不凋,蟲不蟄,山嵐海氣蒸爲瘴癘且密邇日本,土雖膏沃非可居樂土也 : 영암(靈巖) 동남 해상에 여덟 고을이 있는데, 중략(中略), 겨울철에도 초목이 시들지 않고, 벌레가 움츠려 들지 않는다. 산 아지랑이와 바닷바람이 찌는 듯 무더워 장독(瘴毒)과 염병이 있고 일본과는 매우 가까이에 있는데, 토양(土壤)은 비록 비옥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낙토(樂土)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게 반도(半島) 남(南)쪽 땅 이야기가 맞느냐?」
(11) 동국이상국후집 제2권 / 고율시(古律詩) / 제주 태수(濟州太守) 최안(崔安)이 동정귤(洞庭橘)을 보내왔기에, 시로 사례하다 3수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 : 除却耽羅見尙難 【此橘。耽羅外無之。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 遠來何況水程艱 /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 : 貴人門閥猶稀得 / 해마다 늙은 사람 생각해줌이 고맙네 : 最感年年及老殘》하였다.
➊ 〈此橘。耽羅外無之。: 동정귤(洞庭橘)은 탐라(耽羅)가 아닌 곳에는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인데,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에서는 가짜뉴스로 치부될 만 한 이야기다. 왜냐… …동정귤(洞庭橘)이란 말에서 ‘동정(洞庭)’이라함은 곧 동정호(洞庭湖)를 말하는 것이고, 이곳 호(湖) 주변 땅에서 자라는 귤(橘)나무의 열매를 동정귤(洞庭橘)이라고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한다.
왜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동정귤(洞庭橘)을 제주귤(濟州橘)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이지…대한민국(大韓民國)이 불신사회(不信社會)가 되어 누구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태(世態)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동정귤(洞庭橘)은 당연(當然)히 동정호(洞庭湖) 주변에서 나는 귤(橘)이다. 이런 상식(常識)이 우리 사회(社會)에서는 통하지 않는 불신사회(不信社會)가 되어버린 것은 바로 일제(日帝)와 매국노(賣國奴)들 때문이다. 동정귤(洞庭橘)은 탐라(耽羅)에서만이 산출(産出)된다는 이규보(李奎報)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21세기(世紀)를 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가 잘못된 것이냐? 정답(正答)은 후자(後者)다. 우리 사회(社會)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➋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 遠來何況水程艱〉라고 번역(飜譯) 하였지만, 원문(原文)을 보면 “더구나 머나먼 물길로 어렵게 왔음에야” 라고 하였다. 제주도(濟州島)로부터 바닷길로 온 것이 아니라 강(江)의 물길(水程)로 왔다는 뜻이라고 본다.
○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좁디좁은 반도(半島) 땅에 처넣은 당사자(當事者)들인 일제(日帝) 제국주의(帝國主義) 어용(御用) 학자(學者)들과 이들에게 포섭(包攝)되어 야합(野合)한 반도(半島) 땅의 매국노(賣國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들의 몫이다.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를 매국노(賣國奴)들과 함께 신봉(信奉)하며, 식민지(植民地)백성(百姓)으로, 자칭(自稱) 천손(天孫)의 후예(後裔)들에게 지배(支配)를 받으며, 이등(二等) 국민(國民)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아 ‘조선인(朝鮮人)=한국인(韓國人)’을 위한 역사(歷史)를 찾아 행성(行星)안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大)제국(帝國)을 건설했던 후예(後裔)들로 자긍심(自矜心)과 자존심(自尊心)을 되찾고, 나라 발전을 이끌며, 살아갈 것인가?
이젠 작금(昨今)을 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의 몫이란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가! [제1편/끝] 2019년 11월 07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부남(扶南)에 대해서는
(1) 오늘날의 캄보디아 일대
(2)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일대
(3) 오늘날의 서남아세아 곧 인도 대륙과 그 서(西)쪽등으로 조금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데,
부남(扶南)의 지형지세와 천축이 가까이 있다, 서(西)쪽으로부터 큰 물이 흘러와 남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등의 조건으로 보면, 인도 대륙의 동쪽 벵갈만의 방글라데시 일대와 인도 일부 땅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이런 혼란이 생긴는 것이다라고 봅니다.
캄보디아 땅이든, 벵갈만 북쪽의 땅이든 큰 차이는 없다라고 보아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내용 계속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