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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29)】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29
나를 당신의 뜻에 복종하게
지식이 한없이 도덕적으로 수양을 한없이 했다고 해도 역시 죽음이라는 순간을 이렇게 직면을 하면 “아이구 이걸 제발 면했으면” 그러니까 평상시에 이거는 무사한 때고 이제 이따가 잘못되면 그제야 죽게 되는 시간이 오겠지 그러는 것은 우리가 이제 직면을 하려고 잘못 생각해 그렇지 생을 철저하게 살자 그런다면 이 순간이 곧 내 죽는 순간이라, 이 순간을 내가 넘어 갈 수가 없어. 그래 수년 전에 한 말입니다만 그래서 이 인생을 살 때는 될수록은 절대적으로 토막을 쳐서 살아야 된다. 그 말이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어진 선생님들마다 참된 살림을 하려면 현재에 충실하라. 현재라 하는 시간에 충실하라는 얘길 했다고 하는 그게 그 가르침. 사람이란 건 미래를 봐야 사람이지 미래 없는 것 사람이겠어요. 그렇지만 또 다른 면에서 하면 말이야 미래라 하는 생각에 현재를 희생을 시켜가지곤 인간 없다 그 말이야.
지금은 시대적으로 그렇습니다마는 옛날 젊은 시대라 하는 건 다 뭐라 하는고 하니 이다음에 오는 준비시대로 보지 않았어요. 이다음에 준비시대로 봤기 때문에 살림의 내용이 없어요. 옛날 젊은이처럼 불쌍한 거 없어. 근데 지금은 그 방법으로 하면 뭔고 하니 젊은이 젊은이대로서의 자기 자주하는 거지 말이야 결코 젊은이를 어른을 위해 수단으로 보지 말아라. 또 그것만을 강조하니까 요샌 또 저 꼴이 돼가요. 그러니까 그거는 두 면이 다 있어야 돼. 미래 몰라도 사람 아니고 현재 몰라도 사람이라고 과거 몰라도 사람 아니고 그런 건데 그 어느 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나. 그때는 따라 다른 거예요. 근데 참되게 살아가는 살림 이 세속적인 이 살림 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사람들이 공연히 거길 바라보고 허망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여기 충실치 못해. 사실 살림은 이 시간이라고 하는 시간에 있는데 뒤에 말은 산에 올라가거든 산에, 그러기만 하면서 산에 올라가려면 한 발걸음 한 발걸음 산이 어디 있나 산이 요 발 앞에 있다 저기 있는 건 저기 있는 산만 보는 건 괜히 허망한 산이지 실지 산은 정말 걸음마다 걸음마다에 있다.
이제 산은 내 한 걸음 한 걸음에서 올라가야 그게 정말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현재에 충실하라 현재 충실히 들어다보면 모든 시간이 똑같아 어느 시간은 행복스럽고 어느 시간은 불행하고 어느 시간은 사는 시간 어느 시간은 죽는 시간이 아니라 산다는 시간마다 다 사는 시간이요, 죽는다는 시간마다 다 죽는 시간이야. 죽는 것이 곧 사는 것, 사는 것이 곧 죽는 것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아는 거 그래서 현재의 이 시간을 면하고 이거는 자꾸 반복합니다만 이거는 물론 예수님께서 이제 눈앞에 다가온 이 특별한 십자가의 2천 년에 역사상에 나타나던 십자가라 하는 걸 바라보고 거기 그 의미의 그 무서운 굉장한 의미에 놀라서 “아버지여 이 시간을 면해 주십시오.” 그랬지만 그걸 깊이 생각을 하면 그건 무슨 뜻이냐. 그런 일은 왜 있었냐. 그러면 반복해 하는 말입니다만 인생의 모든 시간이 십자가의 시간이야. 모든 시간이 죽음의 시간이야. 그러기 때문에 그 일이 있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떡하면 시간마다에 시간마다에 있는 이 십자가의 이 죽음을 이길 수가 있나. 거기 예수의 십자가에 나타난 그 의미를 거기서 배우면서야만 이 시간을 면할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바꿔하면 십자가를 어떡하는 것만이 믿는 것이냐 시간마다 시간마다 시시각각에서 십자가를 직면을 해보게 되는 게, 그게 십자가 믿는 거지. 그다음에 십자가를 믿는다, 그러면서 현재의 내 시간을 조금도 죽을 줄을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고 있는 거 무엇이 그게 믿는 거냐.
그런데가 그 괜히 추상적으로 마음을 관념적으로 믿었지. 실지 믿음이 없는 증겁니다. 그래 그렇게 특수하게 실천적인 역사상에 있었던 일과 우리 인간의 이 성격과에 관련시켜서 이럭해야 그게 이치가 살아오지 어느 그 수천 년 전에 있던 그 일만을 설명을 해서 그렇게 하면 껍데기야 그렇게 보니까 아까 얘기대로 예수님이 그만 조금 잘못하면 우상이 돼버려. 그래 그저 힘만 능력만 믿어서 우리는 거저 가자하는 그렇게 되면 그건 우상, 우리의 이 구원에서 윤리적인 성격이 빠져버려요. 그러니까 썩 잘한대도 한 요술처럼 마술처럼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해서 좋은 이득을 봤다고 하는 그건 아주 옛날에 유치하던 시대의 생각입니다.
그 생각밖에 남는 게 없다 그 말이야. 그래 이제 여기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이 시간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담말로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시간에 있는 것이니” 그게 정말 바로보고 그렇지만 한편에 예수님의 생각에서 “아휴 이걸 면했으면” 면했으면 하는 것이 그것이 고 인간대로, 인간으로써의 생각이야. 그렇지만 또 다른 면에서 또 자길 생각할 때 아이 그렇지만 나야말로 바로 이 시간에 요걸 위해서 내가 온 거지.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시간에 이른 것이며” 이런 저런 힘 그러니까 요 모순이 그 속에 그게 역리가 패러독스로 되는 게 그래서 될 수밖에 없어요. 요렇게 모순되는 새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시간에 이른 것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그 다음에 기도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거는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는 이 말은 다른 복음에 나타난 걸로 하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말과 해당하는 말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아버지의 이름이 이 영광스러워져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러워 질려면 어떻게 하나 그의 뜻대로 온전히 이루어져야 영광스러워 또 그것은 또 다른 말로 대답해야 된다면 주기도에 있는 첫마디가 해당할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우리가 새삼스럽게 이름이 거룩해지라고 하지 않아도 거룩 아니에요. 하나님 자체로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 그것이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님은 바로 아셨다고 하면 내가 참 안 된말 입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래 있는 겁니다. 이 말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있다는 말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나님을 위해하는 말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 우리자체가 살기위해, 그건 그럼 내 생각으론 이기주의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 질려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함이 없이 거룩해 질 리가 어디 있어요?
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가 기도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래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 그래서만 하나님의 영광일 수 있다는 거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영광대로 가지지 인간이 영광스러워 주십시사 한다고 해서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마라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일점일획을 가감을 할 수가 없어.
하나님보다 높일 수도 없고 하나님보다 낮출 수도 없고. 우리가 높여서 높일 수 있는 거라면 우리가 더 위대했지 하나님이 위대해요. 우리가 낮춰서 낮아질 수 있은 거라면 내거지 왜 하나님이라 할 거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에는 일점일획을 가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어요. 그런 건데 왜 그럼 우리가 기도를 하냐하면 하나님이 이 속에 계셔 내 속에 내가 나를 위해서 이속에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 영광스러워지이다 그러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러면 나를 당신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게 해 주십사 그 기도입니다. 번역을 해 말하면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줄을 모르고 그저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러워지이다.” 그런다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데가 텅 빈 내용이 없는 말. 여기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 영광스러워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도 되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절대 그러니까 한편 자기생각으로 어떡하면 이 시간을 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 그러나 이 시간에 있는 거야말로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그 때문에 내가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기도하고 그런 거니까 자기 속에 그렇게 둘이 갈라져서 두 뜻이 있는 데가 이 고민이 있는데야요.
내 마음이 초조해서 갈라진 곳이 없다 그런다면 그건 하나님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또 무슨 아무것도 아니다 생명이 아무것도 없는 거지. 그 둘 중에 어느 것일 겁니다. 인간의 마음엔 갈라져 있는 거예요. 그게 사실 그러니까 그 둘 중 가운데 있어서 하는 기도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이 당초 없다면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다 지유의지를 철학적으로 토론을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다 자유 의지를 주었소. 인간에게다 자유를 주었으니 인간이 그럼 뭐 선도 없고 악도 악을 행할 수 있게 했다면 하나님이 완전히 못한 거 아니요. 그런 말 하지만 그건 제법 그럴듯한 말이면서도 그건 모르는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인간적인 우리 마음이 있으니 그렇지 인간적인 마음이 인간적인 이 마음이라고 한다면 벌써 이 뭐 자유한다 선악의 선택이 있는 거니까 마음이 갈라지게만 마련입니다. 이렇게 있습니다. 그건 이 가운데 갈라졌다고 하는 것은 벌써 무엇이냐 그러면 갈라진 이것은 지향을 해서 갈라지지 않는 데를 가자고 하는 법이 거기 들어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둘로 느껴질 때 둘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그 말 다시 이렇게 종합을 해보면 그러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간의 의지는 인간은 우리는 인간의 의지가 있을수록 우리의 고민이야 의지가 없다면 고민 없었을 것이야.
그거는 인간은 아니지만 고민은 없지만 그 대신에 인격적인 것도 없었을 것이야 아무 보람이 없어요. 사람은 역시 고민하는 데가 사람이야 고민하는 것은 벌써 사람보다 낮은 상태에서 벗어 나와서 위로 올라가자는 노력 때문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건 왜 그럴까 할 수 있어,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걸로 하면 아니 나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지만 갈라지는 것이 없다. 그런다면 인간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점에 비관할 것 아니고 그 대신에 갈라진 건 무엇이냐? 갈라진 건 벌서 이기고 그 이상을 올라가자 하는 게 거기에 있어.
그러니까 인간의 인간적인 마음이란 무엇이냐 그러면 인간적인 마음 이상에 올라가자는 얘기. 그래 내 전번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인간은 인간 이상이 되자는 노력해서만 인간적일 수가 있지 인간이상이 되자는 노력을 그만두면 인간노릇도 못하고 떨어진다. 자꾸 이렇게 부단히 기어 올라가자는 힘을 올라가자는 힘을 쓰니깐 지금 이 상태도 여기 여기 물론 한다면 어떡하든지 요걸 넘어서 올라가는 여기 이 무슨 뭐라 그러지 인력권, 인력권을 넘어서 거기에 물력 상태까지 거기 올라가자는데 목적이지 말이야 적어도 여기서 시간마다 이 인력과 싸우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섰으니까 이것으로 아무것도 일 안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거는 모르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지 물리학을 조금 배운 사람이라면 이럭하고 있는 것이 이게 계속해서 내가 일하고 있는 거 내가 55Kg인데 55Kg 무게를 순간마다 매 어느 초든 쉴 새 없이 지금 쳐들고 올리는 것 계속해 올려. 만일 지구의 인력이 없었다면 말이야 내가 지금 오늘 하루 동안에도 굉장한 높이로 올라갔을 거예요. 시간마다 내 힘쯤으로 55Kg뿐 지구에서 인력 때문에 이게 이렇게 상쇄가 돼서 서로 이게 이렇게 되니까 가만히 있는 것 같지 말이야.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가만히 저놈의 헬리콥터가 가만히 있다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떨어져 시간마다 시간마다 속력을 올라가는 속력이 있으니까 그 자리에 있어 꼭 인간의 모양이 그렇다. 저것 사람이로군 사람이 시간마다 시간마다 인간 이상이 되자는 노력을 하니까 인간모양 이대로, 소원은 이제 곧 선을 모아서 정말 저게 올라가는 그 자리에 그게 아주 어렵습니다. 껍데기를 완전히 벗고 올라가는 말이야 인력권을 벗어나는 우리 마음에서 하면 말이야 이 인간이하의 짐승 같은 성격이 요게 자꾸 있어서 내 올라가자는 노력을 상쇄를 시켰기 때문에 이게 올라도 못가고 떨어지지도 않고 요 인간대로 요럭하고 있는 될 수 있다면, 고 떨어지는 순간 좀 올라가요.
인간이상이 되자는 노력
그러니 우리가 반성을 해보면 인간이라는 건 모순된 말인 거 같지만 인간이상이 되자는 노력을 해서만 인간이 될 수가 있다. 그걸 그만 두는 한 논리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상이 돼. 인간이 인간이고 인간이상은 인간이상이지 자기 이상이 되나 너 암만 노력을 해봐 너 이상은 못 된다. 그래 이론으로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오늘부터 인간이상 되는 거 그만 둔다. 그럭하면 그날 저녁부터 그 사람은 짐승으로 떨어질 겁니다. 그건 뭐 틀림없이 떨어질 겁니다. 교회가기도 그만두고 책보기도 그만두고 도덕도 그만두고 인간은 아무래도 인간이지 별거 없다. 인간이 예수가 되더라도 소용없다. 석가가 되더라도 소용없다. 소크라테스가 되더라도 소용없고 나는 나대로 그러면 그날 저녁부터 떨어져 틀림없이 떨어질 거예요.
그건 다 우리가 경험해 아는 거. 거기가 이 논리로만 아니라 영이라는 그 말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되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은 나를 자꾸 그게 벌써 지금 나를 자꾸 쳐드는 거야. 이 끊는 이 힘에서 이렇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 그 말이 다른데서 나온 말씀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지 그게 이 세상 사람에게 맞지 않는 말이야. 이 헬라사람 계통에 사람에겐 이 세상만은 넣어줘 여기로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 말로 뭘 그래. 와 우리대로 해야지. 인간의 의지대로 해야 인간이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라는 거 어디 있냐? 그런 그 허망한 그런 거 옛날 미신이 하던 소리 그러는 데가 이 현대문명의 특색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현대문명이라는 건 인간이 인간 노릇을 해야된다하는 걸 강조한 거. 이 한 백여 년 그걸 강조를 한 결과가 지금 자꾸 인간 이하로 떨어져가고 있는 거. 그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거.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하면 고기가 요점이야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는 그거는 강한 우리의 의지를 활동시키는 겁니다. 그래 여기서 내가 첨부 해, 폐단일 수 있습니다만 말하고 싶은 제발 그 감정의 종교에 감정의 종교 아주 그만둘 수 없습니다. 지금 종교는 뭐냐 그러고 큰백과사전을 찾아보시오. 뭐 대영백과사전이니 센츄리 신학 그래 저 그레뉼이니 에딕슨 다 훌륭한 건데 거기 가보면 종교라는 건 복잡한 정서라고 그래요.
이모션(emotion) 복잡한 그건 이제 옛날 종교를 말하면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요. 종교 아닌 게 아니라 참 복잡한 우리 정서가 활동하고 있는 거. 하지만 대체로 다른 사람 다 어떻게 학자도 그렇게 하고 하지만 난 내가 그만 내 판단으로 한다면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렇게 내려오고 올라가는 인류의 종교에 역사를 보면 말이야, 거기 있는 게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하다가 그 다음에는 인간의 감정이 종교의 중요한 요소 노릇을 해요. 그러다가 점점 갈수록 이것이 의지의 종교가 되고 의지가 중요한 요걸 해 가는 거 아니냐? 거보다는 또 의지는 처음부터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의지가 이성이 점점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이성을 움직여가게 되는 그런 거 아닌가? 그 얼마나 오니 어째서 성신 받는다하면서 인간에 상식에도 어그러지는 그 일이 있냐? 그러면 그게 주로 감정적으로 놀아서 그래요. 그래 웬만한 사람 다 한국기독교는 아주 센티멘탈(sentimental)이라고 그래요. 감상주의라고 그러지 않아요.
감상주의지 십자가 소리 듣고 눈물 쭐쭐 울지만 말이야 거기서만 눈물 흘리나 다른데 가면 또 다른데서 눈물 흘리지. 그러기 때문에 눈물 흘리는 거 반드시 잘하는 아니에요. 눈물 흘리면 진짠거 같지만 안 그렀습니다. 나부터도 가짜 눈물도 얼마든지 흘릴 수 있어요. 배우노릇을 하면 눈물 쭐쭐 흘리는데 무슨 그까짓 거 눈물 흘린다고 진짜지 조금도 거기 속지마세요. 그러는데 얼마나 우리나라의 종교가 이 눈물의 종교냐. 그건 눈물이 좋은 눈물 물론 있지요. 참 바로 되면 참 순전해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만, 이 부흥사가 와서 사람 속이는데, 거 눈물 흘리며 우는 체, 우는 소리 하는데서 속지 않는다 그 말이야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건 인간의 감정도 중요한 요소지만 말야. 감정에만 호소하는 그보다는 여하튼 굉장히 의지의 종교 될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종교는 그만두고 합시다. 나이 어릴 땔수록 감정이 주로 활동 하다가 차차 이성이 활동을 하고 나이 많아서 아주 장년이 되 없으면 의지로 철저하게 내가 생각해서 어려움이 있는 데로 불구하고 의지로 굳세게 결정을 해가서 목적을 보고 나오게 되는 데가 그게 인격이 완전히 되는 거지. 감정을 움직이는 것만이 물론 감정 없이 인간 아니지. 감정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때 많이 있습니다만 그건 조건이 붙어 이성에 의해서 이렇게 판단이 되가지고 우리 의지를 옳은 곳으로 움직여 간다하는데 있어서만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그런 판단이 이성의 판단이 없을 때에 감정이란 우리를 자꾸 잘못 만들어요.
분위기를 따라가는 옅은 생각
그렇게 옛날의 종교일수록 아주 감정적이야 정말 감정이 무당이 제일이여. 무당의 종류가 제일 감정 뭐 신나는 걸로 하면 그게 제일 아니야. 하지만 그것이 어떤 건줄 우리가 알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종교가 이름만 무당이 아니지 실제 무당이 얼마나 많으냐? 그것가지고 한동안의 흥분을 시킬 수가 있지만 내 영혼을 구원을 못해. 또 나라 구원은 못 한다 그 말이야. 내 영혼이나 내 사회를 구원을 못해. 그거는 아주 분명이 알아야 돼. 그런데 지금도 공부를 했다하는 사람도 종교적인 분위기 때문에 거 어딜 가면 종교적인 그 분위기가 분위기를 따라서 간다고 하는 데가 생각이 옅은 뎁니다.
분위기가 물론 중요도 하지만 분위기가 문제가 되지를 않아. 그보다는 굉장히 그 아주 그 연구를 하고 이성을 활동을 시켜가지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주 의지를 가지고 나가는 이 앞에 종교 점점 더 그럴 것 아닌가. 난 그렇게 이제 강조를 하고 싶다 그 말입니다. 그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데 그게 높은 데가 있어.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셨더라 그러하신 분이더라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지금까지 오는데도 영광스럽게 했지 말하자면 그걸 이쪽으로 예수님 편으로 하면 지금까지 오는데도 네가 내 뜻에 복종했지. 하지만 이 앞으로도 네가 더 내 뜻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네가 그럴 줄을 안다. 네가 그렇게 할 거다.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라 하는 거나 지금까지에 온 거, 또 이 앞으로도 그럴 거라 하는 거나 그 서로 응하는 말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와서 들렸다고 그래 거기가 좀 알 수 없는 지금으로는 알기 어려운 정말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그건 예수님이 들으셨다 하는 건 문제가 없어요.
종교적인 체험 지금도 얼마든지 무슨 다른 사람은 모두 모르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은 건 종교적인 체험이야요. 이 속에 체험, 근데 이건 다른 사람도 옆에서 들었데 그러는데 그 반응이 서로 달라요. 어떤 사람은 어유 우레질 한다. 어떤 사람은 천사가 뭐라고 말을 하네. 그랬는데 예수님은 그것과 다르게 해서 그건 나를 위해 난거 아니라 너희를 위해 난거라, 그랬다고 하는 그 지경은 알 수가 없어요. 근데 다 뭐 시대를 두고 말을 한다면 옛날일수록 이런 말이 있고 뭐 이렇단다고 이건 그때 소리가 안 난 걸 괜히 그렇게는 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럼 그때 지금도 꼭 그렇습니까? 무슨 하나님 말씀은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날겁니까? 그건 그럴 수 없어요. 안 그럴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럴 그러지 않을 거라는 하는 말 내가 물론 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볼 때에 지금은 별로 그런 걸 우리가 듣지 못합니다. 또 이렇게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도 개인만이 아니야요. 단체적으로도 그렇게도 됩니다. 5백 명이 한꺼번에 들었는데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 체험했다고 그러니까 그럴 때엔 뭐 저 집에 가는데 길거리 저기 지나가는 사람 다 보리만큼 나타나셨다는 거는 아니에요. 어이 거기 있던 사람만이 그 체험을 어떻게 했지. 그러니까 원체 이런 건 참 말로하기 어려운 겁니다. 또 그러고 종교적인 문헌이라 뭐 성경에 꼭 내가 그랬다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성경을 볼 때는 그 주의는 해야 되요.
옛날엔 지금과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이 아니고는 지금 쓰지 않지만 옛날은 자기마음에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그 종교적인 표현을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해서도 그게 거짓말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령 실례를 들면 말이야. 지금은 내가 한소리는 내가 한소리라고 그러고 베드로가 한소리는 베드로가 한소리라고 하지만 옛날에 사람은 무슨 나쁜 내 명예 얻자는 거도 아니고 남을 속이자는 거 아니라 생각은 내가 했지만 이것이 베드로가 한말이라 그렇고 효과가 더 있을 거라 해서 베드로라 하는 이름으로 발표를 하는 그런 수도 있어요. 그건 지금과는 대단히 다릇습니다. 그런 거는 미리 그런 것도 있는 줄 아시고 그걸 꼭 기대를 하면 그 다음에 이걸로 걸려서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요. 그러니까 그런 때 참고하시라 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도 이렇게 소리가 날겁니까 안 날겁니까? 몰라 그건 난 대개 아마 안 날거라고 난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단다고 이건 그럼 잘못입니까 그런 건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다 소리가 나긴 났는데 예수님의 귀에 들리신 것 다른 사람이 또 들은 말이 달라 다른 사람이 뭐라하니 생각이 것밖에 못 들어서 무슨 우레 소리 나는 것 같다고 하기도하고 천사와 예수님하고 중얼중얼 말씀을 하시네 그렇게 본 정도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어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 위해 난 것이다.” 아까 말씀대로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자신하고 영광 네가 나를 찬송을 한다고 내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날 욕을 한다고 내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이러거나 저러거나 간에 나는 나대로 마땅히 응당히 하나님입니다마는 너를 위해서 이런 찬송도 해보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니까 이게 너라 하는 그런데가 예수님의 생각하신 종교가 어떤 건지를 왜 예수님이 우리더러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와야 된다 할 때에 무슨 말씀을 한건지 보통 믿는다면, 그저 우린 못생긴 거니까 암만 봐도 죄인이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우린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참 아주 열심 있는 아주 제일 잘하는 신잔 거 같은데 예수님의 생각은 하심은 뭔고 하니, 나 위해 난 소리냐 너 위해 난건데 너 들으라 하는 소린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자녀를 위해 울어라. 내가 죽는 게 불쌍하냐 네가 불쌍하지 그런데 사람이 어찌 제 걱정 걱정이 있다면 제 걱정을 해야겠는데 제 걱정도 안하고 남의 걱정을 어찌 그리 많이 하냐?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뭔고 하니 제 걱정은 아니하고 남의 걱정을 많이 해 남의 걱정을 하기 때문에 괜히 세상에 말썽이 많습니다. 근데 남의 걱정도 하는 게 안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요.
물론 그렇지 제 걱정만 하면 되겠어요. 남의 걱정하지만 그 남의 걱정한다고 하는 데가 그게 무슨 말이냐? 이게 예수님도 아유 우리 예수님이지 아무 죄도 없이 저 나쁜 놈들에게 돌아가셨군 그러고 아주 하는 게 예수님한테 정신이 있는 것 같이 열심히 울지만 예수님더러 생각을 하면 “야 나를 위해 울 것 있냐. 네가 문젠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어라” 그러는 거는 자기의 십자가에 돌아가는 거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 그러는 말이야. 나쁘다 잘못 되서 그렇다고 그러는 거 아니라 근본문제가 어디 있는 거, 자기의 십자가가 예수님이 죽은 줄로 알아 그런 게 아니라 너가 죽는 건데 지금 너가 죽는 건데 그 문제를 그렇게 봐야할 건데, 저기 지금 저이는 무슨 아무 죄도 없이 죽는구나. 그래 우리 선생님 참 좋은 선생님 있더니 오늘은 돌아가게 되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날까지는 모르는 거라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걸 깨치자는 그러니까 “아유 저 예수님이라는 저이가 있는데 저이하고 천사가 말을 한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는 한은 무슨 소릴 들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 말이야. 그것이 자기 속에 뭘로 들리나 예수님이 어떻게 듣나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듣나 저소리가 무슨 뜻 뭐냐 내가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열심히 믿는다고 할수록 자꾸 예수님이 계셔야 그래야만 그래. 나이 어릴 때에는 호랑이가 오면 선생님 등 뒤로만 갈 거예요. 그건 그래야만 될 것 같으니까 그러지만 낫살이 든 다음에는 호랑이가 오면 제가 저 홀로 해야지 선생님 등 뒤로 어디가고 있겠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종교라는 거야말로 제가 제 노릇을 하게끔 되자는 게 종교일건데 그 종교라는 게 어쩌면 잘못 생각을 해 가지고 말이야.
예수님 걱정을 하고 있는 위에 있는 불쌍하게 운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 걱정을 하는 거, 자기 딴엔 하나님 걱정을 하는 거 다른 말로하면 말이야 우리 교회, 교회걱정 하지 말라 그 말이야 혹은 더 이럭하면 이 세상에 진리가 다 없어지지 않습니까. 진리 걱정 하지 말라. 진리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구해 갈거야. 나는 내 걱정 그걸 우리의 지금 현실 문제에다 대하면 뭔고하니 “야 나라 걱정하지 말고 말이야. 나라 걱정은 무슨 걱정 무슨 나라걱정 너는 네 걱정을 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봐 그러지만 이 나라는 이 나라대로 저 갈데로 갈거야 저 갈데로 틀림없이 갈건데 네가 네 노릇을 하나 못하나 문제 너만 투표를 하나 못하나 문제 너만 투표를 하겠냐 안하겠냐.
박정희가 좋다나 안 좋잖나 네 마음속에 판단을 내릴 거지. 이 나라가 어떻게 너 할 건 생각 안 하고 남의 걱정은 왜 하냐? 남의 걱정을 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거저 저할 노릇은 안하고 저기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슬금슬금 다 빼가 다 빼가 뭐 여기서도 이거 신민당에서 이런다, 공화당에서 이런다, 이 나라가 이러 이러고 있는 동안에 우리 자유 쑥쑥 다 빼가고 그러고 해먹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저 이런 이 나라 걱정 하는 사람의 많은 나라일수록 해먹기가 좋아. 근데 사람들이 다 저 하려고 딱 눈 바로 뜨고 저 하려고 있는데 어디가 물샐 틈이 하나 있나 속이긴 어딜 감히 속여. 아 요놈들이 내 세금 받아갔는데 말이야 세금 받아 갔으면 여기 얼마 쓰고 여기 얼마 쓰고 어떻게 했겠는데 어째서 요렇게 주나 그걸 따지는데 어떻게 속여먹어요. 그런 건 모르고 말이야 막걸리 사와서 아유 고맙다 거저 주니깐 네네, 내 밑창으로 가져간 돈으로 사온 줄 알지 못하고 고맙다고 생각해.
그런 데가 나라 걱정하는 사이에 내 걱정 할 줄은 모르면서 내가 참 나 할 건 내가 내 노릇부터 나를 또 다른 말로 바꿔하면 나라가 저기 허공에 있는 거 아니라 중앙청에 나라가 가 있는 거 아니라, 국회의사당에 있는 거 아니라 나라 이 안에 있다. 적어도 박정희가 여기서는 내쫒아야 되는 거야요. 뭐하려고 가둬도? 그러기 때문에 그런 건데 그 생각을 당초 그렇게 안 해. 박정희가 문제겠소? 그야 어떤데 박정희란 이름이 있으니까 남이 있으면 김 아무개 이름 썼다. 이 아무개 이름 썼다. 대표로 중간에 징발이고 상관이 없어요. 저거 더 살겠어요? 몇 십 년 죽으면 딴 사람이 또 갖다 쓰지 상관이 있어. (녹음29, 3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