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세형동검기의 특징적인 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탁이라 불리우는 유물이다. 세형동검문화기만을 기준으로 할 때, 이른바 '동탁'은 방울머리 위에 끈을 매달아 걸 수 있는 반환형 걸개고리가 있고, 신부에 종장방형·횡장방형·정방형·원형 등의 소형 천공이 있을 뿐 일체의 장식이 없으며, 신부 안쪽에 령설이 내장되어 있다.
예전부터 세형동검문화기의 유물을 검토하면서 늘 궁금했던 것은 기존에, 그리고 지금까지 동탁이라 부르는 유물이 전통시대 이래 동탁이라 부르던 것과는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유물을 처음 동탁이라 명명한 것은 일본 연구자들이었다. 일본학계에서 이를 동탁이라 부른 까닭은 당연히 이 유물이 중국 고대, 특히 선진시대의 동탁과 같은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진시대 또는 고대 중국의 관련 문헌에는 “탁은 큰 방울이다” (說文解字, 金部. “鐸, 大鈴也”; 周禮, 地官, <鼓人>. ‘以金鐸通鼓’에 대한 鄭玄의 注. “鐸, 大鈴也”), “이는 쇠혀가 있는 쇠로 만든 방울로, 그러한 까닭에 금탁이라고 한 것이다”(周禮, 地官, 「鼓人」. ‘以金鐸通鼓’에 대한 賈公彦의 疏. “此是金鈴金舌, 故曰金鐸”)라는 내용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괴정동유형의 문제의 유물을 동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선진시대의 전적 등에 군사 훈련을 하거나 군대를 움직일 때 사마가 탁을 흔들어 군사들의 움직임을 통제하였다든지(周禮, 「夏官」, <大司馬>. “中秋, 敎治兵, 如振旅之陳. ……司馬振鐸”; 戰國策, 「趙策」 3. “秦攻趙, 鼓鐸之音聞於北堂”), 또는 국가의 새로운 정령을 반포할 때 목탁을 흔들어 백성들을 주목케 하였다든지(周禮, 「天官」, <小宰>. ‘徇以木鐸’에 대한 鄭玄의 注. “古者, 將有新令, 必奮木鐸以警衆, 使明德也. 木鐸, 木舌也, 文事奮木鐸, 武事奮金鐸”)는 등의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탁은 사용자가 동탁의 손잡이를 손에 쥐고 위 아래로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는 군용 신호기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동탁은 끈을 걸어 현수한 다음 타격하여 소리를 내게 하는 괴정동유형의 유물과는 발성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바로 선진시대 해당 기물이 '탁'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입증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현재 중국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는 ‘□外卒’銘 銅鐸과 ‘□郢率’銘 銅鐸이다.
'외졸’명 동탁은 방울혀가 내장되어 있고, ‘영솔’명 동탁은 방울혀가 없는데, 이를 통해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동탁 가운데 방울혀가 없는 것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 경우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에 타격구를 잡고서 신부를 두드려 소리를 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둘 다 동탁 머리부에 수직의 공부가 있는 방형 자루꽂이가 있어 여기에 나무손잡이를 삽입하여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고학적인 출토물로는 ‘외졸’명 동탁과 유사한 동탁으로 浙江省 紹興市 印山의 춘추시대 말기 월나라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있고, 방울혀가 내장되어 있지 않은 ‘영솔’명 동탁과 유사한 것으로는 安徽省 靑陽縣 廟前鎭 龍崗의 춘추시대 후기 1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靑陽縣 廟前鎭 龍崗 1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동탁은 탁신 내부에 방울혀를 걸기 위한 ‘梁’이라 불리우는 구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방울혀가 장착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유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조사 성과를 통해서 볼 때에도, 요령∼한반도 지역에서 폭 넓게 발견되고 있는 문제의 유물을 기존과 같이 '동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청동기시대 요령 지역의 문제의 유물 가운데는 외형이 한국학계 등에서 기존에 동탁으로 분류한 것들과 유사한 유물들이 있다. 遼寧省 凌源市 三官甸 석곽묘와 五道河子 토광묘에서 출토된 것 가운데 일부가 그러한데, 신부 내부에 방울혀가 내장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동탁으로 불리우는 것들과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위 무덤의 보고자들은 해당 유물들을 '뉴종' 또는 '종'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오도하자 1호 토광묘에서 신부에 2구획의 반리문대가 장식되어 있으면서 크기가 점차 감소되어 있는 전형적인 편종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수긍된다.
그런데 삼관전과 오도하자의 출토물 전체를 보고자의 견해대로 선뜻 종(뉴종)으로 단정하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 무덤의 부장품 가운데에는 중국 내지의 전형적인 종(뉴종)과는 뚜렷하게 다른 속성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관전과 오도하자 3호 토광묘의 것은 방울머리 상부에 방울머리 전체에 걸친 반환형 환뉴가 달려 있는데, 이러한 뉴는 뉴종이 아닌 기존에 동탁이라 불리운 유물에서 전형적으로 확인되는 속성이다. 신부의 구체적인 형태와 문양대의 있고 없음에서도 괴정동류와 흡사할 뿐만 아니라 구부가 만입되어 있지 않고 평직한 것 또한 종(뉴종)과는 전혀 다른 속성들이다.
동종은 종머리 위에 있는 甬 또는 鈕에 끈을 꿰어 편종틀에 매단 후 타격구로 신부 하단(鼓)을 타격하여 소리를 내는 청동예악기이다. 형태적 속성은 신부 머리 위에 있는 용 또는 뉴, 신부 상단으로부터 중하단에 이르는 부위의 장식 문양대(鉦部의 枚와 篆), 만입 구부, 평면 행인형 구부, 구부 양측의 예각(銑部)으로 요약된다.
동종과 청동방울의 근본적인 차이는 방울혀의 내장 여부이지만, 이외 동종은 신부 외면에 상대적으로 규칙적인 장식문양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체 기고가 20∼50cm인 반면, 괴정동유형의 문제의 유물은 무문인데다 20cm 이하의 소형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동종의 양대 형식 가운데 하나인 뉴종은 상나라 말기의 銅鐃를 직접적인 기원으로 하여 서주 전기 후엽에 발생한 甬鍾(섬서성 寶鷄市 竹園溝 7호 목곽묘 등)과는 달리 鈕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청동방울과 일부 근접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 고고학적 조사 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 뉴종에 속하는 河南省 陝縣 上村嶺 1052호 서주 말기∼춘추 초기의 괵태자묘에서 출토된 뉴종에는 “鈴鍾”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관련 학계에서는 서주 전기와 중기의 전통적인 예악기인 용종에 청동방울의 속성이 일부 결합되어 뉴종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뉴종의 뉴가 괴정동류 청동방울 등과 같이 방울 머리 전체에 걸친 반환형의 구조와 형태를 갖고 있지는 않다.
뉴종의 뉴는 저부의 면적이 종의 중심부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용종의 용처럼 위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뉴종의 뉴가 비록 청동방울의 일부 속성을 결합시켰다 할지라도, 큰 틀에서는 동종의 원형이자 전형인 용종의 전통적인 형태 속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뉴종은 괴정동유형의 문제의 유물과는 달리 신부에 청동예악기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복잡한 문양 장식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구부 또한 크게 만입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삼관전과 오도하자의 문제의 기물은 중원식 뉴종을 요서 지역의 집단이 현지의 기술적 제약과 편의에 따라 청동방울의 형태를 상당히 참작하여 개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개량은 중원식 편종의 절주식 음향 효과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뿐 아니라 현수 방식의 차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중원식 뉴종이 편가틀에 기다란 뉴를 끼워 넣어 현수하는 반면, 삼관전의 기물은 편가틀 상단에 끈을 길게 드려 문제의 기물을 현수하게 된다. 이렇게 현수하게 되면, 타격할 때 기물이 심하게 요동치게 되어 고정적인 음율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 말기∼초기 철기시대 요령과 한반도 지역의 기존에 '동탁'이라 불렀던 유물은 동탁이 아닌 현수식 청동방울류에 속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문점을 조직화하여 몇년 전 "호서고고학"에 발표한 것이 바로 아래의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위의 분석에 따라 기존에 동탁이라 불렀던 유물을 청동방울류로 보고 구조적 속성을 고려하여 '환뉴무문동령'이라 명명하였다.
아울러 삼관전과 오도하자 등에서 출토된 문제의 유물은 방울혀의 내장 여부와 구조 및 형태적 속성을 고려할 때, 중원식 뉴종을 현지 집단이 환뉴무문동령의 속성을 대폭 반영하여 개량한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를 '鈴式鍾'으로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