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하러 가는 전후 과정에 집중하면서 그의 간결한 과거 묘사, 주변인물(우덕순, 안분도, 안준생, 김아려, 뮈텔 주교, 빌렘 신부, 이토, 순종, 이은, 안정근, 미조부치 검찰등)들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무엇이 그를 하얼빈으로 데리고 갔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줍니다.
글 첫부분에 나오는 황태자 이은과 이토.. 순종, 일본제국에 부역하는 고관대작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그들은 일본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장군이 거사를 행한 직후 이은이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나 순종이 이토에게 ‘문충공’ 이라는 시호를 내리거나 메이지에게 위로 전보를 보내는 것을 보며 깊은 탄식이 절로 나왔고, 나아가 이토의 영혼을 위로해야한다며 무당이 굿판을 벌이고 사과조문을 하러 가야한다는 배신자들의 행동을 보니 요 몇년간의 일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피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일반백성이나 지배계급인 유자들도 싸움도 하지 않고 서류 몇장 서명에 나라를 넘기는 저 무능한 왕이 이해가 되지 않은 듯 하네요.
저격 장면에서는 머리 보다는 타고난 헌터로서의 본능이 빛을 발합니다. 내가 쏜 놈이 이토가 아닐수 있으니 옆에 있는 일본인 수행원에게 쏘는 치밀함은 덤입니다. 그러면서 러시아 군인들을 단 한명도 피해주지 않고 ‘꼬레아, 우라’를 외치죠.
일본제국은 당황하면서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으니 문명개화국?으로서의 절차를 지키기 위해 짜여진 재판을 진행합니다.
고마츠 모토코 기자의 재판 삽화
사형장에서 마지막 묘사(바스락거리는 하얀 종이 모자를 쓰고)와 유언, 빌렘 신부에게 하는 성사등을 보며 마음이 참 무거웠고…
일본제국은 그의 시신을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았군요. 성역화될까봐… ’하얼빈에 묻히고 싶고 독립하면 한국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거부하며 뤼순 감옥내 수형자 묘지 그냥 묻어 버립니다. 이름도 비석도 쓰지 않았겠지요.
브라우닝 권총, 7발 탄창, 100루블, 무직, 포수, 황해도 유지 안태훈의 아들, 천주교도, 토마스…
후기에 나오는 안중근 가족들의 간략한 기록들을 몇번씩 보게 됩니다.
첫댓글 참고로 2019년 KBS 시사기획 ‘창’ 밀정 편에서 밀정의 이름들을 공개하였고 여기서 1920년대 일제가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조선인민회’ 회장이 우덕순 임을 밝혔습니다. 변절한 것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