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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 선교사의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그가 한국 기독교 초기 문헌들을 소중하게 간직하였다가 그 가치를 알아줄 곳에 기증하였고, 현재 잉글랜드 케임브릿지 대학교 도서관의 훌륭한 시설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드류 선교사는 안식년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한국에서 무리하게 사역한 탓에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가 1902년에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거쳐 고국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심신이 지친 그에게 고향만큼 좋은 안식처가 있었을까 싶다.
버클리 대학과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
필자가 오랫동안 오가고 있는 곳이지만, 드류 선교사에 초점을 맞추어 리서치를 하기는 처음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모를일이다. 잉글랜드의 케임브릿지 대학도 그렇고, 버클리 대학도 마찬가지로 내 본연의 관심 분야, 즉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회사 위주로 연구를 해 왔으니 말이다. 십 수년전 호남지방에 내한했던 선교사 제위의 유지를 받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 오고는 있었으나, 드류 선교사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 밖이었고 그의 이름이 세간에 하도 많이 회자되어 충분히 연구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군산 근대의료선교 역사를 기술하다가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특히 의료 선교사들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한 의료 선교사 자신들의 글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이고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가 제대로 내려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서 말이다. 이런 견지에서 드류 선교사는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 |
버클리 대학의 거의 모든 면모에 대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관계로 구태여 부언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은 외연과 내연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수도 있을 법하다. 총 5개층으로 되어 있는데 손상이 우려되는 희귀문서를 제외하고는 개방서고 방식으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구조다. 이미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어버린 희귀자료의 디지털화도 상당히 진일보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만족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사실 필자가 드류 선교사의 미국 사역을 리서치 하면서 디지털화 된 원사료를 접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부분이 누락되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 콜만 펑 센터 |
이번에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의 자료들을 검색하고 직접 찾아가서 자료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유익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드류 선교사와 연관된 1차 사료와 2차 자료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활동들을 접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샌프란시스코 도착과 활동, 그리고 드류 선교사
도산 안창호 선생의 평전이나 기타 자료에서 몇몇 책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자연스럽게 드류 선교사와의 만남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기념관과 세계한민족문화대전과 같은 주요 온라인 자료에서도 도산 안창호 선생과 드류 선교사와의 관계를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다. 이혜련 여사에 대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기록에서도 드류 선교사가 언급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유리방황 할 때, 드류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그만큼 드류 선교사는 도산 안창호로 하여금 미국을 발판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튼실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드류 선교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지 두 달도 안된 시점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일간지 기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터뷰를 주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드류 선교사의 사랑과 배려에 대하여 어떤 저자들은 약간 오해하는 듯 하여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심지어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가 만났던 선교사들과 갈등이나 반미의식이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어 그 저의가 의심될 정도이다. 드류 선교사는 한국에서,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서 초지일관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보이며 활동하였다. 그가 한국인들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였다면, 무일품 신세요 노숙자를 방불할 정도로 삶의 위기를 맞았던 젊은 부부를 굳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사랑방을 내어줄 이유가 있었겠는가! 아무리 이해관계를 따져보아도 드류 선교사 가족만해도 6명이 북적거리며 살고 있던 셋집에서 무일품인 두명을 기거하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다수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에 대한 기록에서 드류 선교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드류 선교사가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의 미국 안착에 결정적인 협력을 하면서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공립협회가 조직되었고 기관지인 공립신보가 1905년 11월 20일에 창간되었다. |
드류 선교사가 내준 사랑방에서 기거하던 안창호 선생 부부에 대하여 다소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하는 저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일부는 안창호 청년 부부가 드류 선교사 집에서 무슨 저급하고 종속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기도 하다. 드류 선교사의 식구만 해도 여섯명이 셋집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는데 그 한켠을 젊은 부부에게 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도산 선생이 선각자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그저 신세만 지고 살 성품도 아니었고 자신들도 무엇인가를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선생의 삶과 인격에 부합하지 않은가! 편향된 시각으로 드류 선교사의 배려와 도산 선생의 한국적인 삶의 태도를 왜곡해서도 안되고 대결구도로 설정해도 곤란한 것이다. 전체적인 정황으로 볼 때, 도산 부부는 드류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적어도 1년 이상을 기거하며 미국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도산 부부가 드류 선교사의 집에서 얼마 안 있다가 거처를 금방 옮긴 것처럼 서술한 내용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기술하는 저의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1908년 3월 23일 친일외교관 스트븐스를 대한보국회 장인환 의사와 함께 처단했던 전명운 의사도 공립협회 초창기부터 회원이 되어 맡은바 소임을 다했다(공립신보) |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일제의 책략, 그리고 드류 선교사
1906년 4월 18일에 발생했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도시의 80% 이상이 파괴되었고 한인들도 거처를 잃게 되는데 분국 대한매일신보에서 모금한 구제금을 드류 선교사의 주도하에 배분하였다(공립신보) |
필자도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 자료들을 비교 분석하기 전에는, 드류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구호금을 배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은 원사료의 확인없이 기존의 서술들을 가감없이 인용한 필자의 잘못이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필자가 원사료들을 살펴본 결과, 고종 황제가 하사하는 구제금을 가지고 일제가 책략을 꾸몄음을 알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후, 대한제국 정부가 하사한 구제금을 샌프란시스코 일본 영사관을 통해 한인들에게 배분함으로, 명실공히 일제가 외교권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만방에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일본 영사관을 통해 공립협회로 하여금 배분토록 하려고 시도했으나, 공립협회가 일제의 저의를 간파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고종 황제가 하사한 구제금은 낙글린 선교사를 통하여 분배하였다 (공립신보) |
일제의 책략이 드러나면서 고종 황제의 하사금은 낙글린 선교사를 통하여 배분하게 되면서, 공립협회를 비롯한 한인들은 한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일제의 위상을 만천하에 알리려고 했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앞에서 밝힌대로, 드류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구제금을 분배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는 드류 선교사가 일제의 계략과 연관하여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고,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드류 선교사가 구제금을 배분하는 주요 내용(공립신보) |
드류 선교사 주도로 본국에서 답지한 구호금을 배분하는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공립신보) |
왜 미국인 드류라고 했을까?
필자는 공립신보에 게시된 드류 선교사의 광고 내용이나 향후 그의 활동에 대하여 공립신보가 언급한 내용들을 통해 ‘미국인 드류’라고 한 점에 대하여 잘 납득이 가지 않았고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드류 선교사가 한국명인 유대모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 했고 그가 소장한 서적들에 유대모 라는 인장을 꼭 찍어놓을 정도로 한국적인 애착이 강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적인 정체성이 분명한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에 보란 듯이 ‘미국인 드류’라고 명시를 했으니 다소 충격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다음가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사료된다.
첫 번째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캘리포니아의 인종차별 관련 법령들이 20세기 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었고, 노골적인 아시아인 차별과 비하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아야 한다. 드류 선교사가 ‘미국인’이라고 했을 때, 이는 당시 미국의 주류인 ‘백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인종차별의 주체인 ‘미국인’이 외교권까지 일제에 강탈당한 한국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자체만으로 조소와 비아냥의 표적이 되고도 남았다. 당시 드류 선교사는 거의 모든 백인들이 모여 살던 오클랜드 힐스(Oakland Hills)가 아닌, 악명이 높은 이스트 오클랜드에서 셋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오클랜드 힐스에 사는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대명사와 같았던 쿠 클럭스 클랜(KKK)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인들의 신문에 드류 선교사가 ‘미국인 드류’라고 명기한 것은 대단한 용기와 한국에 대한 존경이 아닐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드류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구제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려는 일제의 계략을 알고 있었다는 견지에서, 외교정치적인 책략에 이용당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대한매일신보가 민간 차원에서 모금한 구호금을 배분하는 일에 나섰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민간 차원의 모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드류 선교사는 혹여나 일제의 책략이 개입할 것을 배제하기 위해 ‘미국인 드류’라는 명칭을 강조해서 사용함으로 그 어떤 외교정치적인 계략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정황상 거의 그렇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세 번째로, 드류 선교사와 공립신보가 사전에 협의라도 한 것처럼, 공립신보도 기사에서 ‘미국인 드류’라고 정확하게 명기하며 불순세력들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공립신보의 분위기가 드류 선교사에 대하여 노골적이라고 할 정도로 호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드류 선교사를 ‘미국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당시의 대다수 인종차별적인 미국인들에게 보란 듯이 과시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고, 드류 선교사 자신도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드류 선교사가 굳이 자신을 ‘미국인 드류’라고 했을 때, 자신을 향한 동족, 즉 인종차별적인 백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했다는 것이고, 아울러 그들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도 되었고, 한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주는 백인 신사, 즉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았다.
입국 비용 지불, 신체검사 편의 제공
드류 선교사는 의사로서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에서 공중보건과 방역관련 일을 하면서, 당시 하와이 등지에서 보다 나은 대우를 해 주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한인들과 기타 한인 이민자들을 위해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중에서 드류 선교사는 입국 경비를 못내는 한인들을 위해 비용을 대신 지불키도 하였고, 입국 수속에 필요한 신체검사의 과정에서도 도움을 주었다. 이같은 사실은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 소상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종 황제가 하사한 구제금 배분의 책임을 맡은 낙글린 선교사의 광고(공립신보) |
본국 대한매일신보가 모금하여 보내온 구제의연금을 구체적으로 분배한 내용에 대한 드류 선교사의 광고(공립신보) |
드류 선교사 주도의 구제금 분배와 미수령자들에 대한 안내 광고(공립신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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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대학의 중앙도서관과 새더 타워 |
드류 선교사의 셋집에 들러서 군산에 세워질 드류 선교사 가묘에 묻을 흙을 채취하였다. |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의 미니어처 |
이상과 같이, 버클리 동아시아 도서관 자료들을 통하여 드류 선교사의 새로운 행적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앞으로 여건이 되는대로 버클리 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드류 선교사의 새로운 행적의 실마리가 있는 곳들을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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