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프란츠 카프카
여린 사람, 혹은 우유부단한 사람의 삶은 항상 무기력하고 우울한 법이다. 친구와 절교해야 할 때도, 그리고 애인
과 이별해야 할 때도 , 너무나 여리기 때문에 쓸데없는 번뇌에 쉽게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가 충격을 받지 않을
까. 혹은 그녀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도 아니다. 이미 헤어지기로 작정했다면, 상대가 힘이 들든
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을 때 행복하지 않기 위해서 헤어지려고 하는 것인데 말이
다. 때로는 이별과 결별이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행복해지기 위해 상대방에게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여리기에 이별 통보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
무것도 모른 채 카페에 해맑게 웃으며 앉아 있는 아이와 같은 저 착한 사람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에서다.
단호한 결별에 주저하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우울할 수밖에 없다. 기쁨과 활기가 아니라 슬픔과 우울을 가져다주
는 사람과 결별하지 못하고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울하지 않은 수 있을까.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남
이 상처받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마는 여린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계속 무기력과 우울함을 보이면서 지속적으로
“당신과 함께 있어서 나는 불행해요“
라는 암시를 송출하니끼 말이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이별을 선언하기보다
“피곤한가 봐요”
라든가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라며 암호를 해독하지 못할 수 있다. 결국 어떤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남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하
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일뿐이다. 어쨌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카프카만큼 우유부단한 작가가 또 있을까?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지만, 카프카는 그런 의지를 관철시키기에는 너무나 나약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원치 않던 변호사가
된 것도 모두 아버지로부터 그나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원하는 것을 해 주면 작
게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구멍이라도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결별을 스스로 선언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먼저 결별을 요구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나약함을 드러낸다. 언제 올지
모를 결별 선언을 기다리며 우울함을 감내한 카프카 주인공들의 모습은 그래서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언
젠가 어느 순간 상대방이 결별을 선언할 깨는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넌 이제 너 이외에도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어. 지금까지 넌 너밖에 몰랐지. 정확히 말하면 넌 순진한 아이였지. 하지
만 더 정확히 말하면 넌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알아 둬.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
게오르크는 쫓기듯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귓전에는 아버지가 뒤에서 침대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층계에서
그는 마치 경사진 편면을 미끄러져 내려가듯 계단을 달리다가 하녀와 부딪혔다. 아침 청소를 하려고 올라가던 참이었
다. 그녀가
“맙소사!”
라고 소리치면서 앞치마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게오르크는 문을 뛰쳐나와 차도를 지나 강
으로 달려갔다. 그는 굶주린 자가 음식물을 움켜잡듯이 난간을 꽉 잡았다. 소년 시절에는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는 뛰
어난 체조 선수였던 그는 그때와 같은 체조 솜씨로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점점 힘이 빠져 가는 손으로 아직 난간을
잡고 있는 그는 난간 기둥 사이로 자기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를 쉽사리 들리지 않게 해 줄 것 같은 버스를 보면서,
“부모님, 전 당신들을 언제나 사랑했습니다.”
라고 나지막이 외치며 떨어졌다.
방금 읽은 것은 『판결(Das Urteil)』( 『변신 • 시골의사』에 수록 된)이라는 단편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결말 부분이
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게오르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날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으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판결』은 현실의 논리가 아니라 꿈의 논리로 읽어야 한다.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던가? 꿈은 억압된 것의 실현이라고. 아들이 죽으면 아버지도 죽는다. 하긴 아버지는 아
들이 있는 존재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던 카프
카의 분신 게오르크를 지금 아버지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별에 우유부단했던 사람에게 상대방이 먼저 결별
을 선언해 주는 순간이다.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다. 환희의 송가가 나올 정도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겠는가. 스피노자는 환희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환희(gaudium)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무엇인가를 희망했다. 그런데 그 희망했던 것보다 사태가 더 좋게 펼쳐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환희를 느
낀다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옳은 지적이다. 신춘문예에 원고를 제출한 시인을 떠올려 보자. 최종 심사에라도
오르기를 희망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시가 최종대상으로 뽑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럴 때 환희라
는 감정이 우리를 감사하게 한다. 혹은 여러 명이 함께하는 동아리 안에 한 선배가 있어서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선배가 내게 이성으로서 프러포즈를 해온다. 기쁨을 넘어서 우리는 환희로 전율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작
은 소망이 정말로 실현되어, 그것도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내게 주어질 때, 바로 이 순간 환희의 감정은 우리
를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별로 바라고 있지 않았는데도 선물을 받을 때 우리는 더 감격스러워한다. 기대 이상의
선물과 같은 느낌, 예측 불가능성이 환희라는 감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게오르크에게 더 좋게 된 쪽이 아버지여도 좋고, 아니면 자신이 아니어도 좋다. 아들에게 물에 빠져 죽을 것을 선
고하고 쓰러지는 아버지여도 좋고, 아버지가 선고를 철회할까 두려워 서둘러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아들이어도
좋다. 어쨌든 이제 부자(父子) 관계라는 굴레를 벗어 던졌고, 아들도 죽어서 이제 게오르크는 자유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침대에서 쓰러지는 장면과 아들도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죽어야 다
시 탄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어떻게 환희의 기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할 준비를 다 갖춘
자식, 그렇지만 어려서 부모에게 결별을 선언하지 못하는 자식에게 어느 날 부모가
“당장 나가!”
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보다 더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자식은 부모가 명령을
철회하기 전에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집을 떠나야만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부모는 다시
“어딜 나가!”
라며 시치미를 뗄 수도 있으니까.
이제 아버지의 선고가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는 게오르크의 마음이 짐작되는가? 그래서 게오르크
의 마지막 말
“부모님, 전 당신들을 언제나 사랑했습니다.”
라는 말에 그로테스크한 데가 있다. 부모님을 사랑했다니 정말일까? 아니다. 자신이 끊지 못했던 부자지간의 연
을 대신 끊어 준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땡큐! 이제 저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숨겨진 유머였던 것이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현실일 수는 없다. 불행히도 카프카에게 환
희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환희의 순
간을 기다리면서 카프카는 부단히 환희를 꿈꾸었고, 그 결과 우리는 그의 수많은 걸작들을 손에 쥘 수가 있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