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돌팔매
다카기가 다녀간 지 2, 3일이 지났다.
“요코, 이리 와서 잠깐 입어 봐.”
그 날 밤 나쓰에는 요코에게 입힐 겨울 스웨터를 완성한 참이었다.
“네.”
소파에 기대어 동화책을 읽고 있던 요코가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요코의 얼굴이 약간 파리해 보였다. 그러나 나쓰에는 방금 다 뜬 스웨터를 만족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요코의 안색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코는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 왜 그래? 어디 아프니?”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코는 희미하게 웃었으나 옷을 벗는 행동이 어딘지 거북해 보였다. 나쓰에는 거들어 주면서 말했다.
“살갖이 쓸려서 아픈 거 아니야? 어디 엄마한테 보여줘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코는 약간 뒤로 물러섰다. 그 얼굴빛이 다른 때보다 생기가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쓰에는 당황하여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나쓰에는 다시 자기 이마를 요코의 이마에 갖다 대어 보았다.
“요코, 어디 아파?”
공부를 하던 도오루가 돌아보았다.
“이상한데. 너 팔을 다쳤나 보구나. 팔을 위로 올려 봐.”
요코는 입술을 꽉 깨물고 양팔을 들어올리려고 했으나 왼손이 잘 올라가지 않았다. 나쓰에는 더럭 겁이 나서 요코의 윗도리를 살짝 벗겼다. 그러고는 나쓰에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 어떻게 된 거야, 요코?”
요코의 도톰한 흰 어깨가 시커멓게 멍이 들고 부어 있었다.
“어머, 이러니 아플 수밖에. 가엾어라!”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오루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몰라.”
“모를 리가 없잖아?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나쓰에는 요코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에 부딪쳤니?”
도오루는 자기 자신이 아프기나 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
요코는 도오루에게 웃어 보이려고 했으나 눈썹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나쓰에는 요코에게 잠옷을 갈아 입히면서 말했다.
“날마다 스키장에 갔다 오니 그냥 얌전히 책을 읽고 있는 줄 알았지.”
나쓰에는 요코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모르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다쳤으면 즉시 말을 했어야지.”
“네.”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쓰에의 어깨에 뺨을 갖다댔다.
“여보, 요코 좀 봐주시겠어요? 다쳤어요.”
나쓰에는 이층을 향해 게이조에게 소리쳤다.
“뭐? 다쳤다고?”
게이조가 이층에서 되물었다.
“어깨가 시커멓게 부어 있어요.”
게이조는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상처를 보이자 그는,
“이거 많이 다쳤구나. 타박상이야. 어쩌면 어깨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아프지?”
하고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 조금.”
“조금 아픈 정도가 아니야, 이건……..”
하고 게이조는 나쓰에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당신, 모르고 있었소?”
어느 정도 힐난하는 듯한 어조였다.
“미안해요. 요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저녁밥을 먹을 때도 알아차리지 못했군. 요코, 누구한테 얻어맞았니, 아니면 어디서 다쳤니?”
게이조는 요코의 참을성에 놀라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애가 탔다.
“몰라요.”
“몰라?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구한테 맞은 거야?”
요코의 선량한 눈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아플 때는 아프다고 바로 말해야 해. 여보, 빨리 차를 불러요.”
하고 약간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외과의사인 마쓰다는 쓰지구치 병원 뒤편에 살고 있었다.
X레이 사진을 찍어본 결과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큰일날 뻔했군요. 굉장히 아팠을 거예요.”
마쓰다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요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쎄. 울지도 않는군.”
게이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참을성이 강한 따님이군요.”
“어때요? 신경 계통의 환자 같은데.”
농담처럼 나온 자신의 말에서 게이조는 뭔가 모를 독기를 느꼈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나쓰에와 도오루가 달려 나와 맞아 주었다.
“어때요, 뼈는?”
“응.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소.”
“정말 다행이군요, 요코.”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야, 요코는!”
게이조는 갑자기 피곤한 듯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바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요코는 정말 장했어요. 실은 말이에요, 여보…….”
나쓰에의 말을 가로채듯이 도오루가 흥분해서 말했다.
“이토오 새끼, 내가 실컷 때려 줄 거야!”
“뭐? 왜 그래?”
게이조는 도오루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오루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게이조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물었다.
“저, 실은 조금 전에 이웃에 사는 이토오 씨 부인이 애를 데리고 사과하러 왔어요. 그 애가 글쎄 요코에게 돌이 든 눈뭉치를 던졌다지 뭐예요. 요코, 그렇지?”
요코는 말없이 어깨에 손을 댔다.
“그 애는 부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무 씨가 그걸 보았대요.”
“응, 그래서?”
“스스무 씨는 요코가 몹시 아픈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말하더래요. 그래서 깜짝 놀라 사과하러 온 거예요.”
게이조는 새삼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 그 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었다는 요코의 아픔이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는,
“신경 계통의 환자 같은데.”
하고 아까 무심코 던진 자신의 말이 생각났다.
“요코, 어째서 말하지 않았니?”
게이조가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 애가 야단을 맞으면 어떡해요?”
“나쁜 짓을 한 아이는 야단을 맞아도 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언젠가 그 애는 저한테 색종이를 준 적이 있는 걸요.”
역성을 들려는 것이 아니라 요코는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 요코!”
나쓰에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말했다.
“도오루는 요코가 가엾다고 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어요.”
그날 밤에 게이조는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남의 말도 며칠씩 마음에 새겨 두고 원망할 때가 있다. 난 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요코만도 못하구나.’
게이조는 요코가 기어다니기 시작할 무렵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정전이 되었다. 게이조는 뭔가 찾을 게 있어 촛불을 들고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요코가 어둠 속에서 혼자 기어다니고 있었다. 요코는 게이조를 보고 방긋 웃고 나서 다시 신이 나서 기어다녔다.
그때 게이조는 어쩐지 소름이 쫙 끼쳤다. 생후 7,8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가 어둠 속에서 울지도 않고 신나게 기어다닌다는 것은 분명히 섬뜩한 일이었다.
게이조는 그때의 요코와 오늘 보여준 요코의 행동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다. 요코는 천성이 두려움이나 악의를 갖지 않고 태어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남의 미움을 짊어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참으로 이상한 아이야.’
게이조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누었다.
“당신도 잠이 안 오세요?”
게이조는 요코에게 느낀 자신의 감동을 나쓰에가 알아차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 잠이 안 오는군. 커피를 너무 마신 모양이오.”
나쓰에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요코 말이에요, 정말 굉장한 아이예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게이조는 나쓰에의 말에 순순히 맞장구를 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사람을 미워할 줄 몰라요.”
‘사이시의 자식에게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면 곤란하지.’
게이조는 요코에 대한 감동이 금새 사그라들었다. 자신으로서도 놀라운 마음의 변화엿다.
‘누구의 자식이든 그 아이에게 죄가 있을 리 없다. 장한 것을 장하다고 왜 나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 없을까?’
“여보.”
“응.”
“요코의 부모는 어떤 분들일까요?”
“……..”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인 게 틀림없어요.”
“훌륭한 사람이 왜 자식을 버리겠소?”
“하지만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어요?”
‘루리코를 죽인 놈의 딸이야.’
게이조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을 간신히 누르고 다시 돌아누웠다. 이때 갑자기 요코가 정말 사이시의 자식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다카기를 믿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그러세요?”
나쓰에도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 갑자기 뭐 조사해볼 게 생각났소. 당신은 그만 자요.”
게이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를 수 없었다.
서재로 들어간 게이조는 책상 왼쪽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랍 밑바닥에 네 번 접은 신문이 석장 들어 있었다. 모두 루리코의 피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신문이었다.
게이조는 그 중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거기에는 사이시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게이조는 사이시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음.”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지금까지는 요코의 눈썹 근처가 사이시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잇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머리 모양이나 얼굴 윤곽까지 꼭 닮아 있었다.
게이조는 중대한 일에 대해 다카기를 의심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보.”
밖에서 게이조를 부르는 나쓰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게이조는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얼른 신문을 서랍 속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