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경전(니까야)에서 비구들이 마지막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붓다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나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렇게 알고 보았을 때 감각적 욕망, 존재, 무명에서 일어나는 번뇌에서 해탈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해탈지견)가 생겼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할 일은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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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멸도 사성제는 거의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흔히 피상적으로 고집멸도에 대한 얇은 이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머리로 이해한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가슴으로, 온 몸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의 수행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이 거의 끊어지고 고요와 평온이 마음의 지배적인 요소가 되면 위빠사나 사마디가 저절로 순일하게 이어집니다.
그때 한 생각이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아마도 일생을 그 하나의 최애 대상을 가지고 몸으로 마음으로 즐겨왔던 그 대상으로, 또 다시 그 대상을 가지고 즐기려고 생각이 일어나려고 할 때,
그때 평소와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구나!"
평생을 좋아하고, 늘 그 생각만 하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게 해주었던, 그 생각에 대해 처음으로 반역적인, 나의 정신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적인 인식이 일어납니다.
이제까지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인식해왔는데, 그때는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그것이 괴로움이라고 배워왔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괴로움이라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구나!"
온 몸으로 그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정신을 지배해왔던 마음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존재를 구성하고 유지해왔던 정신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욕망의 노예에서 풀려납니다.
존재의 노예에서 풀려납니다.
몰라서 끄달리고, 알면서도 끄달리고,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끄달리던 그 무명에서 해탈합니다.
영원한 소멸, 해탈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해탈했다는 반조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아, 내가 공부를 마쳤구나!"
이것이 고집멸도 사성제를 온 몸으로 이해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