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여기지 말라(딤전 4:14)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말은 특히 나에게 목사 안수를 받던 날을 기억나게 한다. 나는 신학교 동기생들보다 훨씬 늦게 목사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만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안수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마침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축도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귀한 직분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송구스러워서 축도의 첫 마디를 꺼내놓고는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목이 메어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다보니 지금은 그때의 감격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첫 마음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처음 축도 감격 못 잊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개역개정)고 권면한다. “네 속에 있는 은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문맥상 목회의 은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앞 단락에서 목회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디모데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신자들에게 명하고 가르쳐야 하며(11),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하고(12), 성경을 연구하여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13). 이런 모든 행위는 목회를 가리킨다. 목회는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은사이다. 디모데는 목회라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네 속에 있는 은사”가 목회를 뜻한다는 것은 그것이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예언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장로회는 목회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기관이며, 안수는 목회자를 세우는 공식적인 방법이다.
예언은 장로회가 목회자를 세울 때 행사하는 신기한 언어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목회자의 사명을 체계적으로 일러주는 설교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볼 때 디모데가 가지고 있던 은사는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예언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목회의 은사였던 것이다.
목회 은사 가진 디모데
디모데는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예언으로 말미암아 목회의 은사를 받았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이때 디모데는 목회자의 뜨거운 소명을 받았을 것이다. 디모데는 목회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목회자로 안수하는 장로회의 신뢰 앞에서 순결한 목회자의 삶을 각오했을 것이다.
신기한 언어사건으로든지 아니면 목회자의 소명을 일러주는 설교로든지 예언을 들으면서 디모데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목회자의 길을 다짐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목회자로서 디모데의 초심이었을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본 것 같다. 디모데도 초년병 목회자로서 가졌던 순수한 초심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순수한 초심 잃을 수 있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을 연습하라고 말하거나(7),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하거나(13), 진보를 나타내라고 말하거나(15), 이 일을 계속하라고(16) 다그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도 바울은 시간이 지나면서 디모데의 초심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초심이 변하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초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처음에 직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냉랭해지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생리를 환하게 배우면서 능구렁이 목사가 되고, 성도들은 교회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무감각한 각질 신자들이 된다.
열정 식지 않도록 노력해야
목회자에게서도 성도에게서도 처음으로 직분을 받을 때 맛보았던 감격이 사라지고 모두 요령껏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된다. 교회의 타락은 이렇게 시작된다. 교회의 타락의 성향은 초심의 감동을 상실한 매너리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교회의 회복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초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진보를 나타내라(딤전 4:15)
역사는 속도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꾸준히 진보가 있었다. 발 빠른 짐승을 탈것으로 이용하던 인간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관을 발명하여 이동거리를 좁혔다. 소리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인간의 염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실현되기까지는 그 이전의 시간을 고스란히 희생해야 했다. 그만큼 소리의 속도에 도달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인류는 속도 향상 추구해 와
하지만 인간은 속도의 진보에서 속도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음속의 한계를 넘어서자마자 빛의 속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쓴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의 속도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인간은 속도에서 진보한다. 사도 바울은 무한의 속도를 맛본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세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었고 영원한 생명을 담지하였다(딤전 1:16-17).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게서 느낀 시간의 속도와 영원한 생명에서 감지한 시간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계산방식을 넘어서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빛이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듯이(딤전 6:16) 하나님의 속도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속도이다. 신의 속도는 영원의 속도이며, 영원에서는 속도가 순간보다도 빠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도는 이미 속도가 아니기 때문에 빠름도 느림도 없다. 그래서 구태여 비유하자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을 뿐이다(벧후 3:8). 이런 사도 바울이 진보를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음속이나 광속 혹은 생각의 속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진보를 말한다면 신의 속도를 알고 있는 사도가 진보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으로 말해서 시간에서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진보를 추구한다면 영원에서의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진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보를 나타내는 것은 신의 속도와 영원의 속도를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진보하는 것을 그렇게 힘썼을 뿐 아니라(빌 3:14) 신자들에게서도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힘썼던 것이다(빌 1:25).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신자는 마땅히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신자의 생명력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진보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을 주의하라, 이것들 안에 머물라” (나의 번역). 사도 바울은 “이것들”로 앞에서 언급했던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13). 진보를 위하여 신자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성경을 연구하여 권면하고 교육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소홀히 하거나 태만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성경연구와 그에 기초한 권면과 교육은 신자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신자에게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자체여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신자는 반드시 진보하며, 그의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는 퇴보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불안한 자세로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퇴보하지 않기 위해서 불쌍하게 몸부림친다. 게다가 퇴보를 막아보겠다며 정말 기괴하고 이상한 방법들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다. 정답은 신의 계시 속에 들어있건만 우리는 인간의 지혜에서 얻어낸 오답을 선호한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그런 행동이 우리의 퇴보를 얼마나 더 부채질할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퇴보가 더욱 속도를 내고야 말 것임을 알지 못한다.
퇴보 염려보다 진보 관심 가져야
물론 우리는 퇴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퇴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뿐 아니라 진보하지 못하는 것도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우리 시대의 교회들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진보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속도는커녕 빛의 속도도, 빛의 속도는커녕 소리의 속도도, 소리의 속도는커녕 말굽의 속도도 못 내고 있다. 마치 신의 속도도 영원의 속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