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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85편 7-13절
찬송 / 261장 ·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성서 / 이사야 45장 1-8절, 요한복음 18장 33-38절
말씀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요한복음 18장 36절)
개를 그리는 것과 귀신을 그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대개 개가 더 쉽다고 대답한답니다. 강아지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아니까,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림을 업으로 하는 화가에게 물어보면 다르답니다. 화가는 대개 귀신이 더 그리기 쉽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개는 누구나 잘 알지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아이들도 대번에 잘못 그린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귀신은 사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보았다고 해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지요. 실제로 귀신이 나타난다면, 누구나 무서워서 눈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귀신도 긴 산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지요? 그러니 그냥 맘대로 그려도 사람들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허위와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배나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진실을 살아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거짓과 조작이 훨씬 쉽고 편하지요. 제가 젊었을 때 고등학교에서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다른 학교에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학교의 선생님 한 분이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났지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파트에 장만한 신혼 살림살이 그야말로 귀신같이 사라졌습니다. 가전이며 가구며 아예 이사하듯 깨끗이 없어진 것입니다. 누가 그런 것일까요? 도둑이지요. 참 대담한 도둑 아닙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 선생님의 가족 중에 신문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기자가 대뜸 경찰서로 찾아가서, 경찰서장에게 신문에 특종으로 때리겠다고 으름장으로 놓았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몽둥이 중에서도 ‘특종 몽둥이’가 도깨비방망이보다 더 신통방통한 것인가 봅니다. 그 이튿날에 사라졌던 살림살이가 그대로 귀신같이 돌아왔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도둑과 경찰의 계약 거래 때문이지요. 지방의 도시에서 그런 정도의 도둑질을 하는 도둑놈이라면, 이미 경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찰도 좀도둑 잡느라고 개고생하지 않고도 필요한 때마다 쉽게 공적을 쌓을 수 있고, 도둑도 적당히 주고받고 거래하며 도둑 사업의 안전과 발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입맛대로 사건을 왜곡하고 조작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요?
그런데 사실이 아니라 거짓을 만들어내고, 진실을 왜곡하여 허위를 조작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지난 광복절 이후 우리는 뜬금없는 역사 논란에 빠졌습니다.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받은 자를 비롯하여 대통령실과 몇몇 장관에 도지사까지, 아예 드러내놓고 참담한 주장을 했지요. 그중에서도 건국절 논란은 정말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이 자들은 우리나라는 1948년 8월 15일, 그러니까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왜 이러는 걸까요? 우리나라 헌법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합니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1948년에 건국되었으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저들은 1948년 이전에 우리 국민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니었다네요. 우리는 일본 국민이었답니다. 1910년 한일합방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 국민이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장했지요. 이거 누가 이렇게 주장하고 있을까요? 일본이지요. 일본입니다. 저들의 주장은 일본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1910년 ‘한일합방’은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조약 자체에도 흠결이 있고, 국민의 동의 없이 강압으로 체결한 것이기에 무효라고 확인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인데,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일제강점기 우리의 부모님들이 일본 국민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헌법에도 어긋나고, 일본과의 협약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도 대한민국의 국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들이 우기는 대로,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일본 국민이었다면, 안중근 의사는 반국가 테러분자가 되고 말겠지요.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앞으로 또 다른 강대국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나라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정말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저들의 음모는 비루하고 비열하고 사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불러 세우시는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불러 기름을 부으셔서 소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여기 이 고레스는 누구입니까? 고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누가 자기를 불렀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렇지요. 페르시아의 왕이니까, 당연히 페르시아의 신 마르둑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고레스의 소명은 돌판에 명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았던 이사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면서도 이사야는, 고레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어 5절에서도 또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비록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네게 필요한 능력을 주었다.” 무슨 말입니까? 고레스가 알건 모르건 그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택하여 세운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참 고집스러운 믿음 아닙니까? 고레스는 몰라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도 몰라도, 하나님은 바빌론에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일본 천황도 모르고,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더 확고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멈출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도 또한 멈출 수 없고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입니다. 이집트가 강점할 때는 파라오의 신민이 되고, 아시리아가 강점할 때는 아시리아 2등 국민이 되고, 바빌론이 잡아가면 바빌론의 충성스러운 노예가 되고, 페르시아가 일어나면 페르시아의 착한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이요, 변함없이 이스라엘 국민이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 또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대리자지요.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 아래 살아왔습니다. 출애굽하여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갈등하다가 패망해서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거 김문수식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세계 모든 강대국의 국민이 되는 영광을 누린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점령한 나라들을 관구로 재편해서, 호적등록도 하고 세금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용병으로 차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호적등록도 하고, 세금도 많이 내고, 군대까지 가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명실공히 명예로운 로마 시민이 된 것일까요? 비록 시민권을 누리는 자유 시민이나 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많이 벌면 출세해서 귀족도 되고 헤롯처럼 왕도 될 수 있으니까, 자랑스러운 로마의 국민이 된 것일까요? 로마는 황제가 모든 시민과 신민의 어버이라는데, 약소국의 개털 국민보다는 차라리 강대국의 2등 시민이 낫다는데, 정말 로마의 국민이 된 것일까요?
로마의 시민이 되면, 한 가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판을 받는 권리입니다. 무지한 봉건 왕국의 백성은 재판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하지만, 적어도 로마는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는 주는 것이지요. 로마의 법정은 로마의 긍지요 로마 시민의 자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로마의 법정에서 심문받고 재판받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대리자인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빌라도는 법정에 서기 전에 먼저 관저에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뭐가 궁금했을까요?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요?” 빌라도가 심문한 첫 질문입니다. 성격도 급하지요. 대뜸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핵심을 물어본 것입니다. 만약 왕이라고 대답하면, 반역자가 틀림없겠지요. 그 대답은 곧 유죄의 물증입니다. 만약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때는 풀려나서 살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왕이라 하는 것이 당신 생각이냐, 아니면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은근히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당신을 내게 넘긴 것은 당신 동족인데, 나는 당신에게 별 관심 없는데, 내가 당신을 살려줄 수도 있는데, 왜 뻗대느냐, 그런 얘기지요. 다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빌라도의 심문에 대답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거듭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참 쉽지만은 않은 말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먼저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로마라는 나라와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하셨는데, 그게 로마라는 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면, 그게 로마에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나와서, 나는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 뜻일까요? 나는 로마 나라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 세계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로마는 어떤 나라입니까? 로마는 세상 모든 나라를 ‘세계 평화’라는 명분으로 정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나라를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다 로마에 속해야 했습니다. 만약 어떤 나라가 로마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명백한 반역이지요. 그런 나라가 있다면, 무자비한 폭력으로 징벌하고, 불순한 반역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처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황제의 대리자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고 분명하게 천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로마 나라에 속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들도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고, 오만하게도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황제도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 풀떼기에 불과한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속하겠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빌라도 앞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정말 맵고 단단한 말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순교자들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노래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땅 한반도에서도, 일제 천황의 신사 앞에서, ‘내 나라는 일본에 속한 것이 아니오’ 하고 단호히 참배를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간 선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당당히 외치며 일어선 유관순 누나들이 있고, 분연히 총을 들고 일어선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분들을 일본 국민이라고 말합니까? 누가 그분들을 반역자요 폭도요 테러리스트라고 말한다는 말입니까? 일본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을 의사라고, 거룩한 순교자라 말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스스로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라고 혈서를 썼던 자들은, 최소한 스스로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을 초월해서 저 하늘 너머만 바라보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그러나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믿음이지요. 우리가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걸어가고, 우리의 역사가 어둠과 혼돈 속에 빠져 헤맬 때도, 그때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요 희망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 어떤 때에도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기도하며 살아가겠다는 굳은 다짐입니다.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겠다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다짐이며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우리의 뜨거운 사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