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社稷壇)
[위치]
청주시 중심부인 흥덕구 사직동에 위치하며, 현재의 충혼탑 부근이다.
[정의]
사직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사직단이 있었던 자리.
[개설]
사직단은 천자(天子)나 제후(諸侯)가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한 해 농사의 풍년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각 고을의 주, 군, 현에 사직단을 두었다.
[건립경위]
청주 사직단은 고려말기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청주에 와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한해 풍년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며 각 고을의 주,군,현에 사직단을 두게 되면서 청주 사직단에서 본격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변천]
조선시대 청주에도 서쪽 3리, 즉 지금의 서공원에 사직신을 모신 사직단을 쌓았는데, 이 사직단에는 대지를 지모신(地母神)으로 인식하여 남근(男根)을 바치던 고대의 유풍에 따라 돌기둥을 끝만 내놓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매년 2월과 8월 첫 번 술일(戌日)에 청주목사가 제관이 되어 정기적으로 제물을 차려놓고 예전(禮典)에 따라 관행제를 지냈으며, 또 가뭄이 심하면 청주목사가 사직단에서 비 오기를 비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을 두고 지방의 관아에도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임금의 명에 따라 제례를 봉하였다. 그래서 서울을 비롯해 서울 부산 광주 청주에도 사직단이 있던 곳이 사직동이란 지명으로 남아있고 남원등 여러 도시에도 사직단의 흔적이 보존되고 있다.
[현재상황]
현재 사직단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현재 사직동 충혼탑 부근이 사직단 자리로 추정된다.
사직단이 서공원 현 충혼탑 위치에 있었던 것이 청주시 청주근대60년사 사직동 지명 표식설치내용(유래비)및 사직동 거주 원로들의 증언으로 볼 때 확실하다고 보인다.
현재 사직단은 서공원에 충혼탑이 건립되면서 원위치에서 벗어나 충혼탑서편 출구계단 옆에 천지신단표식과 상석이 설치된 채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천지신단의 표식은 당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상석은 이전하면서 새로이 제작하여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천지신단 표식이 있는 주변은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이미 .크게 자라고 있다.
[사직동 주민들의 노력]
처음 사직동을 찾아 이중훈 동장을 인터뷰하면서 해 한 사직동 주민들의 사직단 제단 조성을 원하는 마음은 간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장에 취임하고 보니 그동안 없어진 사직단을 다시 설치하기 위해 대동계 계원들 중심으로 노력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직단은 사직동 지명 유래가 됐고, 주민들이 원하고, 또한 주민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 바로 사직단을 다시 찾는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박사출신인 동장은 우선 사직단 자료를 찾기 위해 여러 문헌과, 청주시지, 과거의 신문, 다른 지역에서 사직단에 대해 용역한 보고서, 일본에서 나온 자료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사직동 주민들은
사직단의 재 설립, 사직단 기존 위치 지역 인 충혼탑 경내 부지에 제단 조성 및 안내판 설치 추진, 추진위원회 구성, 관계기관지속적인 협력을 바라고 있었다.
[의의 및 평가]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농신에 대한 제의를 행하여왔는데, 이러한 전통은 토속신에게 제를 올리던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풍년 및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조선시대의 사직단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청주의 사직단은 선조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존재해 있던 정신세계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고 할것이다.
[사직단의 역사]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백성은 땅이 없으면 설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여 도성 안에 사직을 모신 사직단(社稷壇)을 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시작된 국행제이다. 그 뒤 여러 왕조에서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사직단을 세우고 제사하니 이로부터 사직이 ‘국가’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국민경제 생활의 근간이 되는 농업을 중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이미 신라 선덕왕 4년(783) 사직단을 세워 토지의 신인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고려 성종10년(991)과 조선의 태조4년(1395)에 각각 사직단을 세워 담장을 둘렀다고 한다.
정월의 상신일 납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더구나 태조 3년(2394)에는 사직단의 관리를 전담키 위한 관청으로 사직서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사직단은 담만 남고 나머지 부속물은 거의 파괴되어 사직과 종묘의 신주를 함께 옮기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겨진 바 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圜丘壇)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태직(太稷)으로 고쳤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사직례]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 분포지도 -청주시 (충북대학교박물관·청주시, 1998)
청주시지(淸州市誌)(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1997)
디지철 청주문화대전 홈페이지
EnCyber(두산백과사전)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오작교님 늘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공부 잘했습니다 연아님...고마워요...
글이 너무 많아 지루하셨죠? 다음부터는 글의 내용을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