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3장 23-24절 중한 것과 덜 중한 것을 바꾸어버린 악인들
사람이 살다보면 많은 중요한 순간들을 만나게 되고 그때 그때마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에게 두 남자가 사랑을 고백했다고 합시다. 그 여자는 두 남자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남자는 이런 장점이 맘에 들고 저 남자는 저런 장점이 마음에 듭니다. 그 장점들은 둘 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럴 때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오르바와 룻의 서로 다른 선택이 한 사람은 모압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은 이스라엘로 들어가서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되었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은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하나니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그 이상의 큰 복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크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태백산맥 꼭대기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는 동쪽으로 흐르면 동해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흐르면 서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 애매한 경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있듯이 여러분들의 인생에도 애매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누군가의 합리적인 조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조언자가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이미 떠나간 자리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워낙 많은 시간이 지나가기 때문에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할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종교적이냐 아니면 신앙적이냐이며, 또한 법적이냐 아니면 관계적이냐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여러차례 예를 들면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옳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또 그것이 진리라고 믿으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다가 누군가가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하고 말하면 받아들이기 보다는 크게 반발하며 심지어는 성질을 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은 항상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유의깊게 듣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나 여러분들이 옳다고 여기기보다는 배움의 자세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울 것이 많지만 교만한 사람은 좋은 가르침이 자기 앞에 와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옳지 못한 확신 때문에 진정한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이 강조하는 두 가지의 다른 강조점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23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문제삼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는 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식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앞에서도 역시 진실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가지 드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물질적인 드림입니다. 하나는 성도의 삶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첫 번째 드림인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물질적 드림은 바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드리는 열심히 지나쳐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 이상을 드리면서 자기들의 의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헌금으로 드리는 십일조 외에도 물건을 사면 거기에서도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입니다. 시장에서 먹을 물건을 샀을 때 그들은 자기가 돈주고 산 것에서도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열심 아닙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것을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을 드리면서도 마땅히 드려야할 또 다른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정의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세상 가운데 있는 진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가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면서 그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정의를 버린 것입니다.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정의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을 더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의는 이방인이나 가난한 자나 나그네들이나 병든 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자기들의 입장에서의 정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정의는 왜곡된 것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 입장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베트남 입장에서 우리 나라를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그런 자기 의를 내세우며 합리화하는 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다음으로 긍휼의 문제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긍휼을 버렸습니다. 불쌍히 여겨야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써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구원을 받기 원하셔서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척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의식한 종교인들에 불과했습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믿음없음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은 믿음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믿음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이 아닌 행위에 의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열심을 가지고 드리는 십일조가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둘다 행해야하는 중요한 것들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십일조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에 예수님이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서 십일조 드리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온 십일조는 아얘 예수님이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주장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십일조도 드려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구원을 못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믿은 강도는 십일조를 드린 적도 없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는 왜 드립니까? 그 이유의 첫번째는 성전 봉사를 위해서입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역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을 위해서 드립니다. 목사나 전도사처럼 전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면서 섬기는 사역을 맡아하는 교회의 일꾼들을 위한 사례로 십일조를 사용합니다. 세 번째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서입니다. 이 세가지 사역을 위해 그것을 드리는 것을 신약 성경은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이어서 드린다고 해서 “연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연보 속에 주일헌금이나 감사헌금이나 십일조나 선교헌금이나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드리는 헌금들을 연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온전한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은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드리고 그보다 덜 중요한 십일조도 역시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한 말씀 하고 계십니다. 24절입니다.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재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더 치중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에 의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았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은 온전하십니까? 내면만 치중하여 수도원에 들어가 고행하는 것도 잘못이요, 외면만 중요시 하다가 내면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여러분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온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여려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