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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 (Claudius Galenus 129~199/216?)】
〔서양 의학의 내용을 지배한 의학자〕
‘다혈질’, ‘신경질’과 같은 말의 유래를 찾으려면 기원전의 고문헌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용어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1)와 의사 히포크라테스2)가 주장한 4체액설(四體液說)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에 히포크라테스가 정한 4체액은 ‘혈액, 점액, 담즙, 물’이었으나 나중에는 물 대신에 ‘검은 담즙’으로 바뀌었고, 고대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가 이를 체계화하여 사람의 기질과 병인을 파악하고 치료하는 데 활용하였다. 4체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달라지고, 체액의 불균형으로 질병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4체액과 관련된 특성은 다음과 같다.
1)Empedocles(기원전 494?~434?): 만물이 물, 불, 흙, 공기 4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2)Hippocrates(기원전 460?~370??): 고대 그리스의 의사로 그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유명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1948년 제네바, 세계의사회에서 채택된 의사 선언문)]: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써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에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지키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우울질’은 ‘멜랑콜리’와 같은 말이다. 검다는 뜻의 melan과 담즙이란 뜻의 kholê가 합쳐져서 멜랑콜리(melancholy), 멜랑콜리아(melancholia;우울증) 같은 용어가 생겨났다. 갈레노스는 비장에서 만들어지는 검은 담즙이 부패하지 않으면 탁월한 정신력의 바탕이 되나, 열에 의해 검은 담즙이 연소되는 경우에는 멜랑콜리 질병에 걸린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오늘날 ‘검은 담즙’이란 것은 상상의 산물로 여겨질 뿐이다. 위키 백과사전은 미국의 소설가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것이 우울증”이라고 표현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을 믿었지만, 동물 해부를 통해 인체 내부 장기의 기능을 면밀하게 살펴 해부학, 병리학, 치료학, 약리학 분야에 체계적인 저술을 남겼고 이것이 서양 의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대한의사학회에 기고된 한 논문3)은 히포크라테스가 서양 의학의 정신을 지배한다면, 갈레노스는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 의학의 내용을 지배했다고 쓰고 있다.
3)출처: 여인석 (2018). “좋은 의사는 또한 철학자이다” 의사-철학자의 모델 갈레노스를 중심으로. 의철학연구, 25, 3-26.
갈레노스는 고대 로마의 페르가몬(현 터키의 베르가마)에서 귀족 계급 건축가인 아엘리오스 니콘(Aelius Nicon)의 아들로 태어났다. 갈레노스는 13살이 되기 전에 세 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배경에는 교육열이 높고 자상하며 부유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니콘은 어린 아들에게 글과 학문을 직접 가르쳤고 아들을 김나지움(gymnasium; 체육관)에 데리고 가서 달리기와 레슬링, 수영 등의 운동으로 단련시켰다. 자신의 저택 도서관에 두루마리로 된 많은 책을 가지고 있던 니콘은 아들의 독서 교육에 힘썼다. 14살이 되었을 때 갈레노스는 철학 학교에 입학하여 라틴어, 수학, 과학, 철학 등의 과목을 공부했다. 페르가몬에는 목욕탕, 도서관, 극장, 휴게 치료실을 갖춘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 의학과 치료의 신, 그리스 신화) 신전이 있었다. 신전의 사제들은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치료사이기도 했다.
갈레노스가 16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니콘은 신전의 휴게실에서 잠을 자다가 아스클레피오스가 나타나 갈레노스에게 의학 공부를 시키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니콘은 신의 계시라고 생각하여 아들이 신전에서 의술을 배우게끔 하였다.
당시의 의술은 약초를 달여 마시게 하거나 간단한 수술을 하는 수준이었고 점성술과 꿈을 이용한 주술적인 치료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의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는 프네우마(pneuma; 숨을 쉴 때 들이키는 우주 생명의 기운)였다. 갈레노스는 프네우마가 신진대사를 조절한다고 믿었고, 사체액설(四體液說)을 신봉하며 의술을 익혔다.
갈레노스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공부를 마치고 19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니콘이 죽었다. 갈레노스는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동시에 외로운 사람이 되었으므로 페르가몬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갈레노스는 남부 도시 스미로나(현 터키의 이즈마르)의 펠롭스 의학학교에 한동안 머물며 약리학과 식물학을 배웠다. 그리고 더 큰 배움을 얻고자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무세이온(Mouseion, Musaeum)도 그곳에 있었다. 갈레노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독수리들이 쪼아 먹어 앙상하게 뼈만 남은 인체의 골격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체의 해부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레노스는 소, 돼지, 원숭이 등의 동물을 해부하면서 연구했다. 그는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우심장으로 들어갔다가 폐로 들어가 거품 형태의 가벼운 물질로 변한다고 여겼다. 또한 공기와 섞여 폐로 들어온 프네우마는 좌심실에서 혈액과 섞인 후 생명 기운이 되어 동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혈액이 전신을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혈액은 한 방향으로만 흘러 인체의 말단에서 사라진다고 보았으며, 심장의 우심실과 좌심실을 나누는 근육벽 사이에 혈액이 통하는 작은 구멍이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9년 정도 머물렀던 갈레노스는 페르가몬으로 돌아와 검투사 훈련소의 의사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검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고 사자, 표범, 곰, 코뿔소와 같은 동물과도 격투를 해야 했으므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갈레노스는 4년 동안 장인들이 만든 의료 기구들을 이용하여 검투사들의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피부와 근육을 꿰매는 수술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고대 로마의 외과용 의료 도구들(출처: https://wellcomecollection.org/works/sfvvjfn3)
삼십 대 초반에 갈레노스는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이자 황제의 궁이 있는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집정관의 아내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의 병을 치료하면서 점차 유명해졌고, 로마의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4)와 그의 아들 콤모두스(Commodus)5) 의 주치의로 고용되어 의사로서는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돼지 등의 동물 해부를 시연하고 강연하였다. 갈레노스는 긴꼬리원숭이를 해부하여 인체 내부를 연구하는 데 참고했다. 해부를 통해 근육과 뼈의 조직, 심장의 구조, 정맥과 동맥의 차이를 관찰하고 뇌신경을 분류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동물의 성대를 묶거나 척수를 자르거나 요도를 묶어 다양한 실험도 했다. 그는 약리학, 생리학, 해부학, 병리학 등의 의학서와 수필, 서간문까지 4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지식을 책으로 펴기 위해 스무 명의 서기가 고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저서 상당수는 로마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약리학 30권, 생리학 17권, 치료학 16권, 해부학 9권, 병리학 6권, 수필과 편지 등이 후대에 남겨졌다. ≪갈레노스 약전≫이라 불리는 서른 권의 저서에는 약제의 제조와 투여량이 기록되었고, 천오백 년 동안 약전의 표준으로 통했다. 그의 방대한 의학 체계는 중세 이후 근대까지도 유럽 의학을 지배하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갈레노스는 ‘인간은 신이 창조하였으며 소화에는 자연의 영(spirit)이 작용하고, 호흡에는 생명의 영이 작용하며, 신경에는 동물의 영이 작용한다.’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종교계는 그의 이론을 적극 지지하고 보호했다. 덕분에 그의 의학서들은 1,400년 동안 중세 유럽 의학의 교과서로 굳건한 지위를 누렸고 갈레노스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으며 때로 화형6)에 처해지기도 했다.
갈레노스는 로마 제국의 17대 황제 콤모두스가 살해되고 18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가 등극한 후에도 황제의 주치의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한 연대는 불확실하여 서기 199년, 200년, 210년, 216년 등 다양한 추정이 있다. 가장 늦은 연대로 잡는다면, 그는 87세까지 살았다.
4)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서기 121~180).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그가 쓴 ≪명상록≫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에세이로 유명하다.
5) 로마 제국의 제17대 황제(서기 161~192). 최악의 황제 포학제(暴虐帝)로 불리며, 서기 192년 12월 31일 목욕을 하던 중 공모자들이 고용한 레슬링 선수에 의해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6) 스페인의 의사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인간의 영(spirit)이 하나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것이고 갈레노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어서 이단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