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법末法이란 '끝末법法'입니다 바른正법法이 살아있는 시대를 넘고 닮은像법法이 이어가는 시대를 벗어나 끝짱末법法이 횡행橫行하는 시대입니다 횡행이란 '모로橫감行'을 가리키지요 반듯하게 걸어가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모로가는 것을 횡행이라 합니다 부처님 정법正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법시대에도 정법은 살아있고 정법과 닮은像법法이 이어가고 있으나 실천에 옮기는 자가 드문 세상일 뿐입니다
'말법末法'은 흐름法의 끝末이지요 가령 한 동이 물을 마당에 부었을 때 물의 흐름이 처음에는 굵고 꽤 진합니다만 물 부은 데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 게 '끝법'입니다 물 흐름의 흔적은 점차 넓어지고 점점 엷어지다가 흔적마저 사라집니다 물氵흐름去의 끝末도 이와 같습니다 바른正법法이 아예 없는 게 아니고 닮은像법法이 없는 게 아닙니다 바른 법과 닮은 법이 좀 옅어졌을 뿐입니다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에서 바라볼 때 뿌리는 땅 속으로 뻗어갔으므로 사람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밑동은 굵은 기둥이 보이고 가지 끄트머리는 가지 끄트머리 대로 아주 다양多樣하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된 생명의 나무가 아니라 오랜 역사와 함께한 생명의 나무 육안으로는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범위가 넓어진 까닭에 도저히 한 눈으로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의 나무'를 부정할 순 없지요
쏟은 마당 물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다면 넓어진 만큼이나 진함이 약해졌겠지요 가령 동일한 양식을 나눔에 있어서 두 사람이 나눌 때와 세 사람이 나눌 때는 나눔의 양이 적어지거나 옅어집니다 물질 세계를 예로 들면 분명 그러합니다 서너 명이 나누고 너댓 명이 나누고 예닐곱 명이 나누고 여나믄 명이 나누어갈 때 질과 양은 점점 옅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줄거나 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데이터data를 여럿이 동시에 복사copy해 가더라도 질량質量은 늘거나 줄지 않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하드웨어hardware가 아니다 부처님 법은 소프트웨어software다 하드웨어는 분명 물질이지만 소프트웨어는 비물질의 세계다'라고. 그러나 나는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소프트웨어이면서 동시에 하드웨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한 변에 머물지 않습니다 중도中道이면서 통섭統攝consilience입니다
부처님 법이 비물질의 세계라면 그리하여 소프트웨어라면 여러 사람이 데이터를 베낌과 같은 이치로 본디 지닌 데이터도 늘 그대로여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법은 옅어집니다 빛깔도 옅어지지만 가르침도 약해집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은, 나아가 이《범망경》보살계본은 소프트웨어이면서 동시에 하드웨어입니다 보살계는 정신세계의 안내서인 동시에 몸의 올바른 실행에 대한 안내서guidebook입니다
지금은 말법시대末法時代입니다 시대劫가 오염濁되어 있고 견해見가 오염되어 있고 번뇌煩惱로 오염되어 있고 중생衆生이 오염되어 있고 삶의 방법命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되어 있다는 말은 흐려있음이지요 시대가 흐리고 견해가 흐리고 번뇌가 흐리고 생활이 흐리고 중생들이 흐려져 있습니다 이를 '오탁오세五濁惡世'라 하고 있습니다 왜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오탁오세'로 읽느냐고요? '다섯 가지로 혼탁한 혐오嫌惡스런 세계인 까닭이지요
말법은 분명 오염된 혐오스런 세계입니다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는 세계입니댜 여덟 치咫나 한 자尺 거리距離도 알아볼 수 없는 흐린 세상입니다 여덟 치와 한 자는 눈과 책의 거리입니다 책을 읽을 때 적당한 거리가 있는데 눈과 책의 적당한 거리가 지척咫尺입니다 지척의 거리도 가릴 수 없는 혼탁이라면 이는 분명 흐릿함의 극치일 것입니다
말법末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세末世는 주관일뿐 객관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이는 객관적 현상이 아닌 주관적 세계입니다 보살계를 지닌 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법시대는 이름일뿐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탁오세'도 이처럼 보는 자의 소견입니다 보살계를 몸소 닦고 실천하는 이에게 현실 세계는 어떻게 보일까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일 것입니다
보살계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종이경전《범망경》에 갇힌 세계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를 지니고 보살계에 의지하면 보살계는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자율운전 장치이고 목적지를 옳게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입니다 보살계는 종이경전에 갇히지 않습니다 보살계는 '지금 여기'를 떠나지 않은 채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인간의 삶과 함께하지요
그러므로 보살계는 계율인 동시에 삶에 필요한 설명서요 전단circulater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를 제대로 지니고 설명서로서의 보살계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밝은 등불을 얻음처럼 가난한 이가 귀한 보배를 얻음처럼 병든 이가 명의를 만나 쾌유함처럼 감옥에 갇혀 있던 자가 벗어남처럼 조난 당한 어려운 이가 구제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보살계는 삶의 스승이십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보살계를 건네 받고 보살계를 제대로 이용한다면 부처님 재세시거나 열반에 들어계시거나 우리가 말하는 말세이거나 아니거나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거나 말거나 보살계는 바른 길을 옳게 가리킬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요 보살계 서를 외는 '송계서誦戒序'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 그러므로 알지니라 청정그물 보살계는 다시없는 사부대중 말법시대 스승이니 부처님이 이세상에 머무신다 할지라도 지금설한 보살계와 다를바가 없느니라
'기포의 새벽 편지'를 읽는 이거나 또는 읽지 않는 이거나 산승山僧과 인연 닿은 분이거나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는 분이거나 지금 이 지구촌에서 함께 호흡하는 이거나 생명계生命界의 호흡을 멈추고 중음 세계中陰世界를 여행하는 이거나 바라건대 모두 행복한 설 명절 쇠시기를요
[생명의 나무(흑백) : 소중한 벗 정일스님 나머지 사진 중 한 장은 나의 글씨 '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