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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ей Зён 1일 ·
쿠르드족의 역사 - 쿠르드족의 기원, 이란(페르시아), 아르메니아와 한 형제였던 종족의 이야기
현재, 터키와의 관계에 있어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던 쿠르드족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쿠르디스탄이라 불리는 티그리스 강 북부 지역은 아주 오래된 종족이 기거하고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고고학회의 쐐기 문자와 우라르투 문자 해독 기록에 따르면 현재 동부 아나톨리아나 이란 지역의 산악 지대에 살았던 민족이 쿠르드족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수렵과 목축을 했고 티그리스 강과 자그로스 산맥 일대를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이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의 구티(Guti, Gutian people)나 그리스-로마 기록의 퀴르트(Cyrtians) 혹은 카르두키(Charduchi), 혹은 고대 왕국 우라르투와 메디아 등에서 이들 민족을 쿠르드인의 조상으로 보고 여기에서 기원했음을 찾기도 하는데, 사실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까지는 여러 인도-이란계 부족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었다. 쿠르드인들의 언어인 쿠르드어의 직접적인 기원은 파르티아까지 연결된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파르티아의 원(原) 종족인 파르니족의 분파라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현 이란 학계와 터키 학계, 아제르바이잔 학계, 아르메니아 학계에서도 이 기록이 가장 현실성이 있다고 여기며 정설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국 케임브리지 고고학회와 학술적 논쟁을 벌이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파르니족은 사실 <구약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을 바대(Bade) 족이라 불렀으며 아리아인, 스키타이계의 한 부류로 페르시아의 북동쪽에 이동하여 거주했던 민족 중 하나로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유목민족으로 정착하여 거주하지 않고 초원과 사막, 산맥 일대를 자주 이동하여 거주했으며 상당히 민첩하고 용맹한 민족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기마전투와 활쏘기로 유명했으며 이들이 잘 사용했던 활쏘기 기술이 바로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으로 알려진 말을 타고 달리며 뒤로 돌아 쏘는 배사(背射)의 기술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용맹한 부족이 파르니족이었다. 파르니족의 아르사케스 장군이 셀레우코스 왕조가 세워지고 약 70년 뒤인 B.C 248년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0만 군대를 보내지만 이 군대는 케즈만샤 전투에서 아르사케스에게 패배하고 만다. 많은 역사가들은 케즈만샤 전투의 시기를 두고 파르티아 제국이 설립된 시기로 추측하기도 했다.
이후에 파르니족은 점점 확대되어 페르시아 일대의 서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아르사케스의 형제이자 후계자였던 티르데드(Tirded)가 파르니족을 정비하였고 그의 아들인 메흐르데드(Mhrded)는 파르니족의 영토를 남쪽 야즈드, 서쪽 메소포타미아로 더욱 확장 시켰다. 메흐르데드는 정복자로 불리면서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의 페르시아 영토를 거의 모두 회복했다. 오랫동안 파르니족은 동전뿐만 아니라 예술과 언어 및 국가적 전통의식까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동, 서양의 혼합 문화가 가장 찬란했던 시기라고 평가된다. B.C 290~B.C 280년 사이에 페르시아 동부 지역에 자리 잡은 스키타이계 아리아인이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략하여 파르니족은 큰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나 필리아피테스(Phriapites)는 아리아 인을 페르가나 계곡으로 유인하여 포위 공격해 3만 명 이상을 섬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아리아 인들의 서진(西進)은 좌절되었지만 마우리아 왕조의 2대 왕인 빈두사라(Bindusara, B.C 320년~B.C 272년)가 서방 진출을 위해 헤라트로 진출해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필리아피테스(Phriapites)는 헤라트로 진격하여 마우리아 군을 격퇴하고 요새를 철거했다.
필리아피테스(Phriapites)는 아시아의 헬레니즘화에 큰 노력을 걸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계획을 무산시키게 된다. 그러나 셀레우코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필리아피테스(Phriapites)의 반기를 저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필리아피테스(Phriapites)는 파르티아 왕국의 시조 아르사케스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 동안 내부 정쟁으로 인하여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리디아가 셀레우코스를 공격해 왔기 때문에 이에 셀레우코스가 자리 잡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그 혼란으로 인해 각 도시들마다 붕괴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큰 위협적인 국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스키타이의 세력으로 이들과는 외교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더라도 리디아와 마케도니아가 해군을 이끌고 시리아를 기습할 수 있는 것을 우려했다. 헬레니즘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셀레우코스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비록 즉각 이들 주변국들과 교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 이집트와 셀레우코스가 전쟁에 돌입함에 따라 알렉산드로스 사후, 불과 50여 년 만에 헬레니즘 제국 내에서 치열한 내전이 재개되었다. 당시까지는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만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리디아, 마케도니아의 아나톨리아 침공은 위와 같이 2차 헬레니즘 내전으로 증폭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셀레우코스가 갑자기 반기를 든 파르니족 필리아피테스(Phriapites)의 반기를 제압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B.C 3세기 이후 그리스, 마케도니아 인들의 이주가 격감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그리스 문화와 언어는 기반을 잃었으며, 페르시아의 상류 계급조차 헬레니즘 문화를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티그리스 강변의 셀루키아(Sellucia)나 수사(Susa)와 같은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페르시아인들조차 그리스 사상과 문화를 크게 환영하지 않았고 의외로 그리스 문화가 이 지역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100년도 채 못 되어 페르시아에서 파르니족을 중심으로 한 사카계 세력이 강하게 반발하게 되면서 이후 B.C 250년경에 필리아피테스(Phriapites)의 아들 아르사케스(Arsaces)가 박트리아를 공격해 점령하고 그들을 지배하에 두었다.
파르니족은 박트리아에게서 조공을 받으며 재정도 확충했고 제국을 건국할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고 같은 동종 사카계 유목 부족이었던 사르마트 족이 B.C 244년경에 파르니 족을 공격하자 사르마트의 세력을 오늘 날 타지키스탄의 후잔드(Huzand)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르마트는 중앙아시아에 500년간 존속했으며, 스키타이의 세력들을 유럽으로 밀어내고 중앙아시아의 지배 연합 종족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팽창한 로마와도 경쟁을 벌였을 만큼 강력한 세력을 구가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셀레우코스 왕조도 각 주의 반란에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파르니족은 영토의 대부분이 고원 지대여서 농산물이 빈약한 곳이었으나, 동, 서 간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에 위치하여 대상(隊商, Caravan)으로부터 통행세를 받았으며 박트리아와 같은 서역 국가들에게서 조공을 받아 재정을 확충했다. 파르니족은 본래 셀레우코스 제국에 예속된 부족이었지만, 중앙아시아 일대의 사카계 민족들 중 헬레니즘의 속박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파르니족의 족장 아르사케스(Arsaces :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Arshak)는 B.C 244년 이후 사르마트를 격퇴한 이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아슈하바트를 수도로 삼고 국가를 창설하게 된다. 이 때부터 파르니 족은 중앙아시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부족들을 규합하여 세운 국가를 파르티아라 불리게 된다. 파르티아 인들은 뛰어난 기마병이었으며, 가부장적 부족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사케스는 혈통이 가까운 스키타이계와 아리아인 등과 결합하였으며, 페르시아계 부족을 단합시켰다. 이로 인하여 아르사케스는 스키타이계 부족들을 통합하여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함으로써 그 용맹성으로 인해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다. 아르사케스의 얼굴은 파르티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동전의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한편, 페르시아 일대에 거주하거 있던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와 셀레우코스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서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B.C 1000년 이전 카스피 해 남부에는 페르시아인보다 먼저 스키타이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오늘날 카스피 해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이란인의 조상은 아리아인과 사카계 스키타이 일부 부족들의 후손이다. 더불어 이란인의 조상과 쿠르드족의 조상이 같은 지파다.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아베스타>에 의하면 B.C 1000년경 스키타이의 이수르타(Isurta)를 족장으로 하는 다수의 아리아인들과 일부 스키타이 인들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 이란 북부와 카슈미르 지방, 그리고 이라크 북부와 오늘날 터키 동부의 반 호수 일대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후 B.C 500년경 이들은 기근을 피해 메소포타미아 북부 평원으로 이주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북부 평원에서 대를 이어 거주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북부 평원을 구티(Guti) 평원이라 했는데 이란에 정착하지 않고 분파된 파르니족을 구르티(Gurti), 혹은 구르트(Gurt) 부족이라 했디. 한편 다른 일부 파르니족은 메디아에 속했다가 메디아 왕가의 혈통들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이주했는데, B.C 230년경 아르다시르(Ardashir) 가문의 인솔로 아제르바이잔을 탈출해 오늘날 쿠르디스탄에 속하는 디야르바크르 일대를 방랑한 후 메소포타미아에 귀환했고 파르티아는 이들을 흡수했다. 이들 또한 파르티아 정부는 구르티(Gurti), 혹은 구르트(Gurt) 부족이라 기술했다.
그리고 이들은 쿠르드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앞서 서술한 것처럼 현 이란 학계와 터키 학계, 아제르바이잔 학계, 아르메니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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