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굽이 이어지는 산길이 가파르다. “도천 스님은 취재하는 사람들 안 만나고, 이곳에서 허튼 수작하면 머리통 부서진다”는 원주 스님의 전화 법문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곳에도 문은 있다. ‘石門’(석문)이다. 돌문을 통과하니 하늘 문이 열린 듯하다. 대둔산의 기상이 형용하다. 대리석 108계단을 넘어서니 단아한 태고사가 사뿐히 앉아 있다.
조그만 키에 꼿꼿한 자세의 노승이 낫을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뒷산을 오른다. 조실 도천 스님이다.
“스님, 일하러 왔는데요. 낫 한 자루 주세요.” 그가 미소를 짓는다. 영락 없는 천진불이다. 그리곤 손을 잡아보더니 “이 고운 손으로 어떻게 낫질을 해. 기도나 하고 가 잉~.”
돌아서서 걷는 움직임이 아흔을 넘은 노구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다. 낫질을 하는가 싶더니, “신문 종이를 이렇게 버려서는 안되는데…”하며 종이를 줍고, 금새 창고 옆의 오줌통을 비우고 있었다.
“나는 태고사 머슴이여.”
실제 그는 6.25때 불타 폐허가 된 태고사터에 1962년 들어와 움막을 짓고 나물죽을 끓여먹으며 40년 간 머슴처럼 일해 손수 태고사를 세웠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경허 선사의 법맥을 이은 전설적인 도인 수월 선사를 찾아 금강산 마하연으로 갔다. 그는 수월 스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상좌인 묵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는 오직 벽만 쳐다보고 수행하며 일체 말이 없어 ‘묵언’스님으로 불린 은사를 15년간 나무하고 밥하고 빨래하며 시봉했다.
‘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일부작 일일불식)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는 백장청규의 성성한 삶은 할아버지 은사 수월 스님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남의 집 머슴을 살다 출가해 도인으로 일컬어지고, 열반 뒤 7일동안 밤낮으로 방광한 것으로 전해지는 수월 스님은 소문을 듣고 북간도까지 수많은 사람이 찾아갔지만 이에 아랑곳 없이 오직 일만 한 것으로 알려진다.
도천 스님이 해뜨면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해지면 들어오니 이 절 대중의 누군들 앉아있지 않는다. 모두가 일이 몸에 밴 듯하다.
새벽 3시. 잠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벌떡 일어나니 어둠 속에서 도천 스님이 서 웃고 있다.
“잘 잤어”
늦잠에 도량석 시간을 놓친 행자승을 깨우러 나선 것이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처럼 성성하니 그에게 나이란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세속 나이로 92살이던가.
그는 몸둥이의 종이 아니었다. 몸둥이를 종처럼 부렸다. 그의 방에 들어가 누워 있는 노승의 빼빼 마른 몸을 만졌다. “안마하다 방심하면 발로 걷어채인다”는 원주 스님의 ‘경고’가 있었지만, 몸을 주물렀다. 온통 군살이 박혀 나무등걸 같은 손을 마주 잡으니, 뭔지 모를게 울컥 솟아오른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차를 타지 않은 채 도시락 하나 메고 수백리길을 걸어 장보러다니던 그를 보고 아이들은 거지라며 돌을 던지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둔산의 도인’이라며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는 머슴처럼 오직 일할 뿐이다.
거지와 도인, 머슴과 큰스님이 둘인가 하나인가. 태고사를 뒤로 하니 다시 한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금산/글·사진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