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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뚤어진 애국심을 고취하는 중국 영화 <장진호> ]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영화화한 중국 영화 <장진호> 선풍으로 중국대륙이 난리가 아닙니다. 역대 최고의 투자비를 투입한 이 영화는 역대 관람객 수와 수익액수를 연일 갈아치우고 있다고 합니다.(사진, 오! 신이여...추위 속의 미 해병대원, 이 사진은 그해 퓰리쳐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는 끝난 후 거수경례를 하는 관객, 눈물을 질질 짜고 있는 관객들 등등해서 중국 대륙은 그야말로 애국심으로 뒤범벅이 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미국과 지구촌 헤게모니 쟁탈을 벌이면서 미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압박을 받고 있는 중국은 이 영화를 통해서 애국심을 톡톡히 고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상술하는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71년 전 바로 이맘때)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장진호가 위치하고 있는 개마고원에서 미군(미 해병 1사단, 미 육군 7사단 일부, 영국군 대대) 3만 여명과 중공군 제9병단의 15만 여명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 혈투를 벌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이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갖은 역경을 뚫고 흥남까지 내려와 10만 명의 피난민을 데리고 무사히 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이 영화에서 자기들이 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독재국가답게 여기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아예 재갈을 물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미군은 1만 7천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중국군은 4만 8천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맥아더의 오만에 따른 오판(중공군의 대거 잠입 관련 각종 정보들을 애초부터 깔구 뭉갠 것)으로 서부전선에서는 미 8군이 중공군에 개박살이 나면서 정신없이 쫓겨 내려오고 있어서 만약 장진호 전투가 서부전선처럼(사진, 필사적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미 해병대원들)
미군이 궤멸로 끝났으면 중동부전선에서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에 한국전의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저나 이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의 운명도 참으로 기이하게 흘러 갔을런지도 모릅니다.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탁월한 지휘하에 미 해병들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중공군 9병단은 너무나 기진맥진해서 애초 계획대로 밀고 내려오기는커녕 탈탈 털려버린 전력을 추스리느라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들이 승리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사실은 애초의 목표(중동부 전선에서 밀고 내려온다는)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코 성공한 전투는 아니었던 겁니다.
[ 장진호 전투(1950.11.27~12.11) 이야기 ]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미군이나 한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맥아더의 정치적 목적과 중공군에 대한 형편없는 저평가 등이 뒤섞인 가운데 마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레이스에 열중하고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도꾜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크리스마스 이전에(사진, 인천 상륙작전 직후, 맥아더와 왼쪽 스미스 소장)
모두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병사들에게 잔뜩 안겨주어 병사들의 가슴은 부풀어 오를대로 올라 있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는 엉뚱하게도 중공군의 개입은 아예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에 두고 압록강 대포위 작전을 계획합니다. 사실 중공으로서도 당시 국내 사정이나 국력의 여건상 개입하기 힘든 조건이기는 했습니다만 당시 공산주의 사회의 연대감을 생각한다면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중공 측에서도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반드시 참전한다는 의사를 주 북경 인도대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휘하의 군대를 8군과 10군단(해병1사단, 육군7사단 일부)으로 나누고 8군은 워커장군 지휘 하에 서쪽 지역으로 개성->평양->사리원을 축으로 해서 서쪽으로 기동하고, 10군단은 알몬드 장군 지휘 하에 동부지역 원산으로 상륙하여 낭림산맥을 가로질러 압록강 쪽으로 북진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으로 북진해서 거대한 집게발 포위망을 형성, 잔여 북괴군을 완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한국의 지형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낭림산맥으로 양분된 양 군단의 유기적 협동이 어렵고 북한군의 속절없는 패전으로 큰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밀고 올라갈 수 있기야 했지만 중공의 전쟁개입 경고와 한반도 북부의 엄청나게 추운 날씨,
산악투성이인 지형상의 특징들은 무시해 버리기에는 애초부터 대포위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큰 무리였습니다.(사진, 일자별로 살펴본 장진호 전투)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에 잔뜩 신이 나 있는데다가 중공군을 한없이 깔보고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인데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신과 같은 존재인 맥아더에게 워싱턴 합참본부 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이래라 저래라할 만한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끙끙거리면서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거기다 10군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맥아더의 딸랑이이기도 한 직속 부하 알몬드 장군은 한술 더 떠서 설사 중공군이 있더라도 설마 이런 험지를 뚫고 공세를 펼치지 않으리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10군단이 신속한 공세로 적을 밀어 치면 8군보다 먼저 북한군을 포위해 성공적 작전을 펼 수 있으리라는 공명심에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더욱 다급하게 북진 레이스를 재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장진호의 주역이자 10군단의 주력인 미 해병 1사단의 사단장인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런 무모한 계획이 사뭇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당시 동부 지역의 작전 구역은 작전거리가 480km나 되는데다가 도로 상태도 극히 좋지 않아서 거의 외길로 이루어진 위험한 산길을 통과해야 했던 겁니다.
또한 사단의 병력조차 분산되어 보병 1연대는 원산, 5연대는 신흥, 7연대는 수동쪽에 분산 배치되었고 기갑 장비들은 타부대로 전출 명령까지 받은 상황에서 진격만을 외쳐대고 있었으니 우려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간간히 중공의 포로들이 잡히기도 한지라 절대 우습게 볼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포로로 부터 미군을 포위 섬멸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하였는데도 동경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와 알몬드 장군의 이러한 낙관론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중공군 관련 정보들은 아예 깔구 뭉개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장인 스미스 장군은 알몬드 장군의 진격 명령에 거의 불복종에 가까운 형태로 차근차근 후방을 구축하면서 장진호에 들어갈 때까지, 알몬드 장군에게 집중배치 요구를 끊임없이 주장해 결국 장진호에 들어갈 때 까지 병력을 가까스로 모을 수 있었습니다.(사진,장진호 전투의 일등 공신, 스미스 소장)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스미스 장군의 이런 신중한 판단이 없었으면 미 10군단은 중공군에게 철저한 궤멸을 당했을 겁니다.
더구나 스미스 장군은 병력의 집중배치 뿐만 아니라 좁은 교통로를 미리 인지하고 하갈우리 등 군데군데에 보급창을 설치하고 야전 활주로(하갈우리 바로 밑 장진)를 개척한 것은 참으로 선견지명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11월 7일 경 해병 1사단의 선봉인 7연대는 황초령 인근에 진입한 뒤 15일 경에는 하갈우리로 25일에는 장진호 서편 유담리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5연대는 하갈우리 북쪽에,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죠.
이때 중공군은 밤에만 살금살금 이동하면서 장진호 인근에서 고토리 남쪽 진흥리까지 매복하고 있다가 미군이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의 축선으로 길게 늘어져 배치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니까 토막토막 잘라서 각각 잡아먹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겁니다.
이때 중공군 9병단 지휘관인 송시륜 장군은 국공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27년 농민 무장군으로 시작해 1930년에는 홍군 20군단 참모장을 지내면서 실전에 강했고 한국으로 들어온 중공군들 또한 일본군과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경험치를 늘린 실전적인 군대였습니다. 비록 장비면에서 미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실력은 무시할 것이 못되었습니다.
드디어 11월 27일, 중공군은 길게 늘어진 미 해병1사단을 공격해 16개 보병중대 중 3개 중대를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해 사단의 병력을 각각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고립시켜 버립니다. 미 해병대는 상황의 악화를 막고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철수를 했지만 이미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날씨까지 연합군을 괴롭힙니다.(사진, 중공군 9병단을 지휘한 송시륜 장군)
11월 초에 이미 첫눈이 내렸고 기온은 급강하 하였으며 모두들 알다시피 개마고원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해 야간에는 평균기온이 영하 30~40도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처음부터 이런 추위를 크게 생각치 않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전쟁을 끝낼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던지라 동계 장비도 열악했습니다, 참호를 파려해도 땅이 얼어 꽁꽁 얼어있었고 구호용 혈액과 몰핀도 얼어 붙는 바람에 위생병이 입에 몰핀을 넣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차량이나 야포 등도 고장나기 일쑤였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땅을 파고 참호를 파지 못하자 시체를 쌓아올린 다음 거기에 물을 뿌려 굳혀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으니 이 동장군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공군도 마찬가지라 대규모 지원을 받기 힘든 중공군은 동사자가 속출했고 미군의 야포에 파고 들어갈 땅도 장비도 없어 그대로 노출되 공격 받아 큰 피해를 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추위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웅크리고 있다가 얼어 죽거나 집단으로 투항하는 일도 종종 있었죠. 너무 추워 정신들이 나간 상태였습니다.(사진, 중공군 포로들)
양쪽 다 모든 것은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다시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서 11월 27일부터 벌어진 전투로 능선을 따라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탄약이 다 떨어져 가는 5연대와 7연대 병력은 백병전도 불사하며 고지를 지켜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갈우리쪽과 고토리쪽도 공격이 있었고 28일 쯤에는 완벽하게 절단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하갈우리 쪽에는 사단본부 지휘소가 있었고 후방 지원과 방어를 위해 고토리에 1연대 병력이 있었는데(사진, 장진호 모습)
스미스 장군은 고립을 막기 위해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고 고토리의 풀러 연대장에게 지시합니다만 보낸 1개 중대는 중공군의 강력한 방어망에 갇혀서 실패하고 맙니다.
두 번째 시도는 영국 41 코만도 연대가 미군과 미 해병 900명 가량이 다시 돌파를 시도합니다만 중공군의 집중 사격에 피해를 키웠고 당시 현장에 있던 드라이스데일 중령이 긴급히 상황을 보고합니다만 스미스는 막히면 전체가 다 무너질 것을 알기에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돌파구를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어찌어찌 뚫고 하갈우리까지 들어갑니다만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후일 이 돌파구를 죽음의 계곡이라 이름 붙이죠. 이렇게 포위 당한 상태에서 양측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최악이고 양쪽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비전투 손실 또한 만만찮고, 장비가 좋다지만 대규모 중공군의 포위 병력에 고립무원 상태인 상황이다 보니 중공 관영언론은 12월 4일 보도에서 "미 해병 1사단 곧 포위 섬멸" 이라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퍼뜨렸습니다.
미국 언론들도 상황이 최악임을 알리고 있었으며 그러자 미국 내에서도 정예 병력이라고 알려져 있는(사진, 남쪽으로 남쪽으로...미 해병대는 한구라도 전우의 시체를 구해가지고 가는 전통이...)
해병 1사단이 전멸 위기에 놓여 있다고 미국내 여론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 상황이면 전 병력이 항복하고 포로가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2월 1일 스미스 장군은 결단을 내립니다. 일단 5연대가 유담리를 방어하고 있으면, 7연대가 하갈우리 쪽으로 돌파하고, 7연대가 하갈우리에 도달할 즈음에 5연대도 하갈우리로 후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해서, 야전 지휘관으로는 너무 신중한 게 아니냐며 임시 비행장 설치시 비판을 받던 장진 비행장이 드디어 복구를 완료하고 기능을 시작합니다. 오후 2시경 C-47 수송기가 이 활주로를 이용해 보급품과 부상자를 나르기 시작했고 이것은 고전을 하던 미 해병대에 숨통을 트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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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 4일경이 되면 5연대와 7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23km를 뚫고 하갈우리로 후퇴합니다.
당시 5연대와 7연대는 장비와 부상자들을 거의 잃지 않고 후퇴했는데 후퇴 속도는 1km를 전진하는데 무려 4~5시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당시 이 후퇴 장면을 목격한 부대원들과 지휘부는 "마치 유령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라며 이 포위망 돌파의 고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수송기를 통해 하갈우리로 들어온 종군 기자들이 스미스 장군을 인터뷰 하기 시작했고 이때 어느 기자 하나가 후퇴작전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그 유명한 답을 합니다.(미 해병대 후퇴 행렬)
“이건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요.”
뭐 사실상 사방이 포위된 상황이니 후퇴가 공격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닐겁니다. 12월 5일에 스미스 장군은 작전회의를 통해 12월 6일 흥남으로의 공격 (후퇴)를 결정합니다. 워낙 5연대와 7연대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사진, 고난 속의 미 해병대)
이들에 대한 휴식과 함께 부대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일단 계획에 따르면 5연대 전투단이 (영국 41코만도, 육군 31연대 전차중대, 포병1연대 포함) 하갈우리를 방어하는 동안 7연대 전투단 (육군 7사단 31연대 임시대대, 포병11연대 2개 대대, 사단 지휘부 포함)이 고토리를 뚫고 하갈우리에서 완전 철수하면 5연대 전투단이 다시 고토리로 들어와 후방을 방어하며 전투 항공단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사지를 빠져나간다는 계획으로 진행시켰습니다.
그리고 초기 5km 까지는 계획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이렇게 다잡은 맛있는 먹잇감을 그냥 보낼 리가 없었습니다. 특유의 게릴라식 전투로 미군 철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기습을 통해 기동 가능한 차량을 먼저 잡아버리고, 도로를 막고 있다가 급습하고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의 10만에 달하는 민간인 피난민들이 미군 부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니 중공군은 민간인으로 위장해 미군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2월 9일에는 군단 사령부로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사진, 철수가 끝나고 폭파되는 흥남 항구)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적인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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